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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학고 박공의 유사(鶴臯朴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02
학고 박공의 유사
공의 휘는 준량(準亮)이고, 자는 성지(聖智)이며, 호는 학고(鶴臯)이다. 박씨(朴氏)의 선계는 밀양(密陽)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규정(糾正)을 지낸 휘 현(鉉)이 중조(中祖)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강생(剛生)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휘 절문(切問)은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휘 중손(仲孫)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난 공신(靖難功臣)에 녹훈되어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고, 휘 미(楣)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으며, 휘 광영(光榮)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낸 밀성군(密城君)이고, 휘 난(蘭)은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된 밀평군(密平君)이며, 휘 숭원(崇元)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밀천군(密川君)이고, 휘 기현(耆賢)은 충청 감사(忠清監使)를 지낸 밀계군(密溪君)이며, 휘 안길(安吉)은 동중추(同中樞)를 지낸 밀흥군(密興君)이니, 이들이 모두 현조(顯祖)이다. 고조 휘 선증(善曾)은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증조 휘 기환(起煥)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휘 재욱(載郁)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부친 휘 세진(世鎭)은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모친 증 정부인(贈貞夫人)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증 참의(贈參議) 덕기(德機)의 따님으로 부덕이 있었다. 순묘(純廟) 갑신년(1824) 8월 15일에 공을 낳으니, 기운과 골격이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자질과 성정이 영특하고 비범하자 그의 대부(大父)가 사랑하여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집안을 일으켜 세울 희망이 이 아이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착하여 부모가 병에 걸리면 곧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지 않았고, 8세에 공부를 시작해서는 번거롭게 과정(課程)을 정해 독려하지 않아도 여러번 독송하는데 매우 근실하였고, 조금 장성해서는 같은 고을에 사는 만희재(晚羲齋) 양 상사(梁上舍)를 따라 의혹을 질정하고 변별하며 스스로를 넓혀갔다.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잠자리를 살피는 예절과 맛있는 음식을 바치는 도리를 일찍이 어긴 적이 없었는데, 일찍이 한 번은 여러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효도하려 한들 미치지 못하고 우애하려 한들 때가 없는데, 지금 우리 형제들은 위로 부모님이 모두 생존해 계시고 아래로 변고가 없다. 이러한 때는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두렵게 여겨야 할 시기이니, 어찌 서로 권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침이 되면 나가서 밭 갈고, 저녁이 되면 글방에 들어와 책상을 마주한 채 책을 읽되 확실하게 과정을 두었으며, 상례를 다스릴 때에는 슬퍼하면서도 인정과 예법에 부족한 점이 없었다. 겸손함으로 자신을 단속하고, 공손함으로 남을 대했으며, 모든 일을 처리할 때에는 이해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흉년이 든 해를 만나게 되면 의복을 줄이고 음식을 절약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구휼해 주어 공에게 힘입어 살아간 사람들이 자못 많았다. 언젠가 한 번은 흥양(興陽)으로 가는 길에 구걸해 먹고 사는 여인이 맨땅에서 아이를 낳은 것을 보고 때가 한겨울인지라 공이 전대를 털어 객점 주인에게 넉넉히 주어 따뜻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잘 조리하고 보양하게 하였다. 갑오년(1894)의 변란 때에는 자제와 친척들을 경계시켜 물들지 않게 하였다. 만년에는 화학산(華鶴山) 아래 산림과 계곡, 괴석 등의 경치가 있는 곳에 집 한 채를 지어 문을 닫아걸고 행적을 숨겨 종유를 끊고 교류를 그만둔 채 흔들흔들 한가로이 거닐며 애오라지 스스로를 즐기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다. 하루는 병에 걸려 자손들이 의원을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니, 의원이라 하더라도 어찌하겠는가. 단지 너희들이 몸가짐을 조심하여 집에 있을 때에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책을 읽고 학문하여 가업을 실추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였다. 무술년(1898) 8월 19일에 세상을 떠나니, 신풍방(新豊坊) 강촌(江村) 뒤 기슭의 갑좌 언덕에 안장하였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윤해(潤海)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으며, 계배(系配) 남원 양씨(南原梁氏)는 영환(永煥)의 따님이다. 1남인 흥래(興來)는 김씨의 소생이고, 손자는 노삼(魯三)ㆍ노언(魯彥)ㆍ노홍(魯洪)이다. 증손자 동규(東奎)는 첫째 노삼의 소생이고, 정규(井奎)는 둘째 노언의 소생이며, 승규(承奎)는 셋째 노홍의 소생이다. 노삼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후세에 길이 남길 글을 청하니,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대략 가다듬고 꾸며서 그의 뜻에 부응하였다.
鶴臯朴公遺事
公諱準亮。字聖智。號鶴臯。朴氏系出密陽。以高麗紏正諱鉉爲中祖。入我朝。有諱剛生。副提學。諱切問。左贊成。諱仲孫。文科策靖難勳封密山君。諱楣。文科禮議。諱光榮。文科刑曹參判密城君。諱蘭贈領議政密平君。諱崇元。文科漢城判尹密川君。諱耆賢。忠清監使密溪君。諱安吉。同中樞密興君。皆其顯祖也。高祖諱善曾。壽陞通政。曾祖諱起煥。贈司僕寺正。祖諱載郁。贈左承旨。考諱世鎭。贈戶曹參判。妣贈貞夫人全州李氏贈叅議德機女。有婦德。純廟甲申八月十五日生。公氣骨峻茂才性穎異。其大父撫愛之曰。家戶之望。其在於此乎。幼有至性。父母有疾。輒涕泣廢食。八歲上學。不煩程督而誦數甚勤。稍長。從同郡晚羲齋梁上舍。質疑辨惑。以自展拓。定省之節。甘脆之供。未嘗有違。嘗語諸兄弟曰。孝有不及。悌有不時。今吾兄弟。上則俱存。下則無故此是一喜一懼之日也。盍相勉焉。朝而出耕。夜而入塾。對床讀書。的有課程。執喪哀毀。情文無闕。持身以謙。接人以恭。凡百處事。不以利害爲取舍。遇饑歲。縮衣節食以周貧乏賴活頗多嘗於興陽路中見乞婆露地産兒。時維隆冬。公傾行橐。厚給店人。使之携入溫室。善爲調養。甲午之亂。戒子弟族戚。俾勿梁。晩築一室於華鶴山下。有邱林泉石之勝。杜門斂跡。絶遊息交。婆娑徜徉。聊以自娛。以壽陞同中樞。一日屬疾。子孫將迎醫。公曰。死生天也。雖醫何爲。只願汝輩持身謹勅。居家孝弟。讀書學問。勿墜家業也。以戊戌八月十九日終。葬新豊坊江村後麓甲坐原。配貞夫人慶州金氏潤海女。有女士行。系配南原梁氏永煥女。一男興來。金氏出也。孫男魯三魯彥魯洪。曾孫男東奎長房出。井奎二房閏。承奎三房出也。魯三奉家狀來。謁不朽之文。謹據狀而略加修潤。以塞其意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