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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 오월당 이공 유사(梧月堂李公遺事)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1 / 유사(2)(遺事(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1.0001.TXT.0001
오월당 이공 유사
공의 휘는 민변(敏釆)이고, 자는 달서(達瑞)이며. 호는 오월당(梧月堂)이다. 이씨는 공산(公山) 사람으로,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 이후로 문학과 잠영(簪纓)주 1)이 대대로 찬란하게 빛났다. 호가 혁회재(衋悔齋)인 휘 위(韡)는 만력(萬曆)주 2) 연간에 이름난 진사로 사림(士林)이 제사를 모셨으니, 바로 공의 8세이다. 증조는 기형(基馨)이고, 조부는 문갑(文甲)이며, 부친은 택무(擇茂)이고, 모친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성원(聖源)의 따님으로 순조(純祖) 무자년(1828)에 능주(綾州)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말하거나 웃을 때 복스럽고 장난끼가 있으면서도 출입할 때 걸음걸이가 의젓하여 어른스러운 모습이 있었다. 가정에서 가르침을 받고 스승과 벗을 따를 때에는 학문을 하는 절차와 효성스럽고 우애스러운 행실이 성대하여 동료들의 추중을 받았다. 부모를 섬기고 장사 지내며 제사 지낼 때에는 정성과 예절이 모두 지극하였고, 직접 제례(祭禮)를 가려 뽑아 집안의 자제들에게 주어 외고 익히게 하였으며. 매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여러 여식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서 말하길, "제사를 받드는 것은 규문의 큰 예절이니, 반드시 이것을 잘 알아야 출가한 사람으로서 부인의 도리를 이룰 수 있다." 하였다. 항상 "검약한 생활로 잘못되는 경우는 적다.주 3)"와 "생각함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주 4)"라는 말을 좋아하여 자리 오른편에 써 붙여 놓고 밤낮으로 반성하며 말하길, "성인의 말씀은 말이 간략하지만 의미가 갖추어져 있고, 글이 비근하지만 뜻이 심원하니, 진실로 이 두 구절을 체득하여 미칠 수 있다면 마음을 보존하고 자신을 지키며, 일에 응하고 사물에 접하는 방법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언젠가 한 번은 밤에 이웃에 사는 아이가 몰래 정원에 들어가 나무에 올라 과일을 따고 있음에도 공은 속으로 참으면서 말하지 않고, 또한 집안사람들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대체로 그 아이가 갑자기 떨어져 다칠까 염려해서였다. 남의 훌륭한 점을 보면 자신이 지닌 듯하였고, 남의 나쁜 점을 보면 자신의 병통인 양하였으며, 마음 씀은 충후(忠厚)했고 일을 함은 꼼꼼하였으니, 향촌에서 안면이 있든 없든 그를 군자로 지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갑술년(1874) 3월 9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남평(南平) 반계(潘溪)의 뒷산 기슭 경좌(庚坐) 언덕에 안장되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대호(大鎬)의 따님으로 1남 3녀를 두었다. 지난 경신년(1860)에 내가 약관(弱冠)의 나이로 죽수서원(竹樹書院)주 5)을 유람하면서 향촌 유생들의 큰 회합을 본 적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어르신이 있었는데 자태와 형상이 단정하고 후덕하였으며, 풍채와 거동이 온화하고 화락하였으며, 말을 하거나 의론을 내면 사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주목하였다. 그 분이 누구인지 묻고서야 오월당 이공임을 알았다. 여러 사람이 빽빽하게 모여 앉아 어수선하였기에 비록 조용히 가르침을 받들지는 못했지만 흠모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오래도록 잊지 못하였다. 그런데 덧없는 인생에 변고가 많아 다시 문안을 여쭈지도 못하였다가 돌아가신 지 수십년이 지난 뒤에서야 공의 아들을 만나 함께 따르고 강마하는 것이 이처럼 친밀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공의 아들 인환(仁焕)이 울며 말하길, "선군(先君)의 아름다운 이름을 어느 누가 모르겠는가. 불초(不肖)한 내가 일찍 아버님을 여의었기에 그 분의 실제 행적에 대해 보고 기억한 것이 없고, 유문(遺聞)에서 얻은 것이 단지 그저 몇 단락 말씀뿐이지만 사라지게 내버려둘 수 없으니, 바라건대 글을 지어 없어지지 않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게나." 하였다. 아아, 머리가 하얗게 센 늙은 나이에 선배의 장후한 풍도를 추상하니 구구한 가슴에 사무친 슬픈 마음을 가눌 수 없기에 감히 강하게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1)잠영(簪纓)
관(冠)에 꽂는 비녀와 갓끈을 말한 것으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을 비유한다.
주석 2)만력(萬曆)
명나라 제13대 황제인 신종(神宗)의 연호로, 1573~1620년에 해당한다.
주석 3)검약한 …… 적다
공자의 말로 《논어(論語)》 〈이인(里仁)〉 제23장에 보인다.
주석 4)생각함이 …… 않는다
《주역》 〈간괘(艮卦) 상(象)〉에 "산이 거듭함이 간이니, 군자가 본받아 생각이 그 지위에 벗어나지 않는다.〔兼山艮, 君子以, 思不出其位.〕"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로,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증자가 "군자는 생각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君子 思不出其位〕"라고 하였다.
주석 5)죽수서원(竹樹書院)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능주(綾州)로 귀양 갔다가 곧 사약을 받고 죽은 조광조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梧月堂李公遺事
公諱敏釆。字達瑞。號梧月堂。李氏公山人。恭肅公諱明德後。文學簪纓。世代煒燁。至諱韡。號衋悔齋。爲萬曆名進士。士林俎豆之。卽公八世也。曾祖基馨。祖文甲。考擇茂。妣濟州梁氏聖源女。以純祖戊子。生公于綾州七松。言笑禧戱。出入步趨。疑然有老成風度。至於擩染家庭。從逐師友。爲學節度。孝友行治。蔚然爲儕流之推重焉。生事葬祭。情文備至。手抄祭禮。賜門子弟誦習。每於行祭時。輒令諸女觀之曰。奉祭祀是閨閫大節。必須通此可以適人成婦道。常愛以約失之者鮮。及思不出其位之語。書付座右。日夕顧省曰。聖人之言。言約而意備辭近而旨遠。信能於此二句。體當得及。則存心持己應事接物之方。可以幾矣。嘗夜有隣兒。竊入園中。登樹摘果。公隱忍不發。亦不令家人知之。盖隱其倉卒落傷也。見人之善。若己之有。見人之惡。若己之病。用心忠厚。作事周詳。鄕黨知不知。無不以君子目之。甲戌三月九日卒。葬南平潘溪後麓庚坐原。配驪興閔氏大鎬女。擧一男三女。曩在庚申。余弱冠。遊竹樹書院。見鄕儒大會。而中有一丈人。姿相端厚。風儀愷悌。發言出議。四座屬目。問之乃知爲梧月堂李公也。稠座撓撓。雖未能從容承誨。而滿心欽艷。久而不忘。誰知浮生多故。未及再候。而歿後數十年之餘。乃得其遺胤。與之從逐講磨。若是密勿哉。遺胤仁焕。泣而語曰。先君令名。人誰不知。不肖早孤。其於實行。未有所睹記。而得於遺聞者。只是零星數段語而已。不可任其泯沒。幸爲下筆以惠不朽也。嗚呼。白首頹齡。追想先輩長厚之風。不勝區區感愴之情。有不敢牢辭云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