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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학생 조공 유사장(學生曺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29
학생 조공 유사장
공의 휘는 석흥(錫興), 자는 군오(君五)이니, 조씨는 창녕인(昌寧人)이다. 고려말에 장양공(莊襄公) 휘 저(著)가 망복(罔僕)주 149)의 의리로 연주군(聯珠郡) 대곡리(大谷里)로 은둔하였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이곳에 살게 되었다. 이분이 낳은 휘 성한(成漢)이 처음으로 본조(本朝)에서 벼슬하였으니 강진 현감(康津縣監)을 지냈고, 이분이 휘 천좌(天佐)를 낳았으니 성균 좨주(成均祭酒)를 지냈으며, 이분이 낳은 휘 용일(龍釰)은 효행으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고, 휘 호온(好溫)에 이르러 학행으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2대가 지나 휘 억구(億璆)는 호가 죽헌(竹軒)이고 진사인데, 대곡리에서 부춘동(富春洞)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5대가 지나 휘 일리(一履)는 호가 돈재(遯齋)인데, 말년에 부춘동에서 성 동쪽 필봉(筆峯) 아래로 옮겨 우거하였으니, 조용한 데로 나아가 한가롭게 지내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증조의 휘는 희주(喜周), 조부의 휘는 광민(光敏), 부친의 휘는 기림(起霖)이다. 모친 순창 조씨(淳昌趙氏)는 조성원(趙星元)의 따님이니, 헌종 무신년(1848) 2월 8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체상(體相)은 풍만하고 성품은 온순하고 무던하며,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유순하다 하여 장자(長者)에게 사랑을 받았다. 서당에 나아가 독서할 때에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움을 보고 마침내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 잡으며, 직접 농사짓고 손으로 김을 매어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을 드렸다. 17세에 완산 이씨(完山李氏) 이찬국(李燦國)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씨가 현숙(賢淑)하고 내조하여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졌다. 21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애훼(哀毁)가 매우 지나쳤으며 이척(易戚)주 150)을 모두 지극히 하였고, 삭망(朔望)에 산소 살피는 일을 풍우(風雨)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남동생 3명과 누이동생 2명이 모두 어리고 연약하여 공이 불쌍히 여기고 어루만져주면서 정성껏 가르치고 길러주었으며, 혼례는 제때를 놓치지 않았고, 분가하는 절차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모친의 명을 받았다. 일찍이 초년에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그의 중제(仲弟) 조석준(曺錫俊)으로 하여금 나아가 배우게 하였는데, 대소의 사무를 반드시 직접 스스로 주관하고 담당하여 바깥 생각으로 분산되어 치달리는 근심이 없게 하여 안심하고 전력하여 그의 학업을 마치게 하였다. 여러 자식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과정(課程)을 지시하고 가르쳐 주어 엄하게 조리와 두서를 두었고, 현명한 사우(師友)를 좇아 사방에 유학(遊學)하게 하였다. 흉년을 만나서는 대소의 식구들을 모으고 고락(苦樂)을 함께하여 굶주림과 배부름이 균등하지 않다는 생각을 없게 하였다. 누이동생 한 명이 집이 가난하고 의지할 데가 없었는데, 공이 본 마을로 옮겨 살게 하고 후하게 그 형편을 도와주어 생계를 꾸려가게 해 주었다. 처남 조씨의 집이 살기가 몹시 어렵게 되자, 공이 주머니를 털어 도와주어 떠돌아다니는 근심을 면하게 해 주었고, 족척(族戚)과 이웃 마을 사람들 가운데 빈궁하고 환난이 있으면 방문하여 위로하고 돌보아 주되 예의를 빠뜨린 적이 없었다. 일찍이 전물(錢物)을 빌려준 사람이 있었는데, 오래되어도 갚지 않자 공이 마침내 그 문권(文券)을 태우고 말하기를, "뒷날 다툼의 단서가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명예와 이익이 있는 장소에 이르지 않고 현귀(顯貴)한 사람을 보지 않았으며, 야비하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고 거칠고 잡스러운 장난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다만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자신의 참됨을 기르며 자신의 의리를 행할 뿐이었다. 58세에 모친상을 당했으나 집상(執喪)의 절차는 노쇠하다 하여 스스로 용서하지 않았다. 정미년(1907) 7월 18일에 졸하여 도덕봉(道德峰)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이 일찍이 장학(長瘧)으로 7년 동안 오래 고생할 때에 이씨가 진실로 정성껏 도와주고 보호해주었으며, 몰래 스스로 다리를 베고 국을 끓여 올리자 숙질(宿疾)에 차도가 있었다. 이에 아들 조필승(曺弼承)이 널리 알려 기리는 일을 하려고 했는데, 이씨가 꾸짖어 이를 저지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이씨가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여 아예 먹고 마시지 않자, 여러 자손이 백방으로 정중히 간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군자의 짝이 되어 도와서 가도(家道)를 이룰 만하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필승·선승(善承)·순승(順承)이고, 딸은 이덕회(李德會)와 이승옥(李承玉)에게 출가했다. 아, 세대가 내려올수록 풍속이 경박해져서 인정(人情)이 외면으로 치달려 글에 현혹된 지 오래되었으니, 일에 임함에 겉치레가 없고 남을 대함에 해치거나 탐함이 없어서 한결같이 꾸밈없고 참되며 정성스럽고 삼가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공과 같은 자가 몇 사람이겠는가.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원망함이 없고 탓함도 없으며, 순박하고 예스러우며 거짓 없는 천진함에서 생장하고 늙어 죽은 것이 공과 같은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조필승이 유훈(遺訓)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고 힘써 부지런히 배워 그 광채를 감추어 어둡게 하였으니, 이로 인해 후세에 높이 드러내는 일이 있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주석 149)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書經 微子》
주석 150)이척(易戚)
상례(喪禮)의 형식과 슬픈 마음을 말한다.
學生曺公遺事狀
公諱錫興。字君五。曹氏昌寧人。麗末莊襄公諱著。以罔僕之義。遯于聯珠郡大谷里。子孫因居焉。是生諱成漢。始仕本朝。康津縣監。是生諱天佐。成均祭酒。是生諱龍釰。以孝行除參奉。至諱好溫。以學行除參奉。皆其顯祖也。再傳諱億璆。號竹軒。進士。自大谷移寓富春洞。五傳諱一履。號遯齋。自富春晩寓於城東筆峯下。盖就靜養閒計也。曾祖諱喜周。祖諱光敏。考諱起霖。妣淳昌趙氏星元女。以憲宗戊申二月八日生。公體相敦厚。性氣溫良。自幼。以孝順見愛於長者。就塾讀書。見家力甚艱。遂山樵水漁。躬耕手釛。以供親旨。十七委禽于完山李氏燦國女。李氏賢淑有內助。生理稍舒。二十一遭外艱。哀毁過甚。易戚兩至。朔望展墳。風雨不廢。有三弟二妹皆稚弱。公哀而撫之。諄諄敎養。婚嫁不失其時。至於分爨之節。一禀母夫人之命。嘗恨早貧失學。使其仲弟錫俊就學。大小事務。必親自幹當。勿使有分馳外慮之患。安心專力以卒其業。敎諸子。必指授課程。嚴有條緒。從賢師友。使之遊學四方。遇饑歲。聚大小眷口。同甘苦。俾無飢飽不均之慮。一妹家貧無依。公令移居本村。厚助其力以立家計。內弟趙氏家。存活極艱。公傾橐以助之。俾免流離之患。至族戚隣里有貧窮患難。問訊存恤。未有闕儀。嘗有人借貸錢物。久而不還。公遂火其券曰。只爲後日之爭端也。平居不到聲利之場。不見要貴之人。不出鄙褻之言。不近荒雜之戱。只是守吾分養吾眞行吾義而已。五十八遭內艱。執喪之節。不以衰老自恕。丁未七月十八日卒。葬道德峯癸坐原。公嘗以長瘧。七年沈苦。李氏血誠救護。暗自刲股。和羹以進。宿疾見差。子弼承欲爲聞褒之擧。李氏責以止之。公之沒也。李氏警以下從。絶不飮食。諸子女百方苦諫。竟未遂意。其至行偉節。足以配君子而助成家道也。擧三男二女。弼承善承順承。女適李德會李承玉。嗚呼。世降俗下。人情鶩於外而眩於文久矣。臨事無表襮。接人無忮求。而一出於質實忠慤之中。如公者爲幾人。無是無非。無怨無尤。生長老死於淳古無僞之天。如公者爲幾人。弼丞服膚遺訓。力學不怠。其潛光幽輝。安知不因此而有顯敡於來許也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