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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농와 양공 유사장(聾窩梁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28
농와 양공 유사장
공의 휘는 덕환(德煥), 자는 정서(正瑞), 관향은 제주(濟州)이다. 당요(唐堯 요(堯)임금) 때에 양을나(良乙那)144)144) 양을나(良乙那) : 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와 함께 탐라를 처음 세웠다는 전설상의 세 신인(神人) 가운데 한 명이다.
가 제주 한라산(漢挐山)에 내려왔으니, 바로 그 시조이다. 후대에 신라의 조정에 들어가 양씨 성을 하사받았고, 휘 순(洵)이 신라에 들어가 벼슬을 지내 한라군(漢羅君)에 봉해졌다. 우리 조정에서 휘 이하(以河)는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능주(綾州) 삼현사(三賢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이분이 낳은 휘 팽손(彭孫)은 교리(校理)인데 정암(靜庵)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趙光祖))과 도의로 사귀었고 시호는 혜강(惠康)이니, 세상에서는 학포 선생(學圃先生)이라고 부른다. 이분이 휘 응기(應箕)를 낳았으니 교위(校尉)이고, 이분이 휘 산립(山立)을 낳았으니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휘 인용(仁容)을 낳았으니 첨정(僉正)으로 송석정(松石亭)을 짓고 산수와 문적(文籍)을 스스로 즐겼다. 이분이 휘 위남(渭南)을 낳았으니 진사이고 참봉을 지냈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고, 이분이 낳은 휘 우전(禹甸)이 선인(先人)의 정자를 중수(重修)하여 유유자적하였다. 이분이 낳은 휘 지해(之瀣)는 맏형 지항(之沆)과 함께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분이 휘 대하(大夏)를 낳았고, 이분이 휘 익조(益祖)를 낳았으니 현감이며, 이분이 휘 성헌(成憲)을 낳았으니 통덕랑(通德郞)이고, 이분이 휘 일현(一鉉)을 낳았으며,이분이 휘 찬호(贊浩)를 낳았으니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이분이 낳은 휘 양식(梁栻)은 명경(明經)으로 해시(解試 향시(鄕試))에 합격했지만, 누차 예부시(禮部試)에 떨어졌으니 바로 공의 부친이다. 모친 장흥 마씨(長興馬氏)는 마언모(馬彦模)의 따님으로 부원군(府院君) 마천목(馬天牧)의 후손이니, 헌종 계묘년(1843) 11월 3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외모는 헌칠하고 성품은 온화하였으며, 말은 입 밖에 나오지 못할 듯하고, 다닐 때에는 옷을 가누지 못할 듯했다. 평소에 근검은 그의 가계(家計)이고 경근(敬謹)은 일생의 법이었으며, 선행을 즐기고 이익을 좋아하는 것은 천성에서 나왔고, 빈곤하게 살았지만 자기의 분수에 편안했으며, 함부로 출입하지 않고 함부로 교유하지 않아서 성시(城巿)의 가게와 명리(名利)의 번화한 곳에서 공의 얼굴을 알지 못한 자가 많았고, 함께 종유한 자는 적막한 물가에서 한두 명의 가난한 벗일 뿐이었다. 성품이 독서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고,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일일이 수시로 기록하여 벗이 차분하게 강론하고 토론하는 것을 기다렸으니, 그 불치하문(不恥下問)주 145)이 이와 같았다. 어려서 지극히 착한 성품이 있어서 효성스럽게 봉양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고, 맏형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늙어 백발이 되어서도 나갈 때에는 채찍을 나란히 하였고, 들어와서는 침상을 나란히 하였으며, 기뻐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애당초 서로 떠난 적이 없었다. 이를 미루어 족척(族戚)과 벗에 이르렀으니, 죽음을 애도하고 산 사람을 위문하였으며, 곤궁한 사람을 도와주고 환난을 구해주는 일은 힘이 닿는 데까지 행하였다. 늘그막에 더욱 도회(韜晦)주 146)하여 '농와(聾窩)'라고 자호(自號)하고, 득실과 시비에 대해서는 멍하니 듣지 못하는 듯하였으며, 오직 《논어》 한 책이 책상 위에 있었는데 때때로 이 때문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갑진년(1904) 2월 16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62세이고, 살았었던 마을 뒤 남쪽 기슭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철현(金哲鉉)의 딸로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회철(會澈)·회수(會遂)·회기(會箕)이고, 딸은 하동(河東) 정모(鄭某)와 해주(海州) 최모(崔某)에게 출가했다. 아, 사람에게 양심(良心)이 있는데 오직 사욕(私欲)이 이를 공격하고, 사욕이 마음을 공격할 때에 그 단서가 하나가 아니지만, 명리(名利)의 해가 가장 심하다. 그러나 일찍이 화락(和樂)한 자질과 효우(孝友)의 행실로 명리의 사이에 매몰된 적이 없고 그 순수하고 참된 천성을 온전히 한 자는 공이 그러한 사람일 것이다. 자기 힘이 아니면 먹지 않은 것은 서치(徐穉)의 부류이고주 147), 은거하여 의를 행한 것은 동생(董生)의 무리인데주 148), 후대 사람들이 송석정의 옛 터를 보고 남창(南昌 서치의 고향)의 산천(山川)과 안풍(安豊 동생의 고향)의 수석(水石)과 같이 돌이켜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가 공의 형제들과 금석(金石)처럼 굳고 변함없는 우정으로 노쇠할 때까지 서로 좇았는데, 이제 모두 나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 외롭고 쓸쓸하게 되어버렸으니, 누구를 따르고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회철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후세에 길이 전하려는 글을 요청하였는데, 옛일을 추억해보매 몹시 서글퍼져서 감히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145)불치하문(不恥下問)
손아랫사람이나 지위나 학식이 자기만 못한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묻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論語 公冶長》
주석 146)도회(韜晦)
자신의 재능이나 학식 따위를 감추는 것을 말한다.
주석 147)자기……부류이고
서치(徐穉, 97~168)는 후한 예장(豫章) 남창(南昌) 사람으로, 자는 유자(孺子)인데, 집안이 가난해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後漢書 卷53 徐穉列傳》
주석 148)은거하여……무리인데
동생(董生)은 당나라 때 안풍(安豐)에 은거한 동소남(董召南)이다. 한유(韓愈)가 〈동생행(董生行)〉을 지어 "수주 속현에 안풍이 있는데, 당나라 정원 연간에 이 고을 사람 동소남이 그곳에 은거하여 의를 행했다.〔壽州屬縣有安豐, 唐貞元年時, 縣人董生召南, 隱居行義於其中.〕"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聾窩梁公遺事狀
公諱德煥。字正瑞。貫濟州。唐堯時有良乙那。降于濟之漢挐山。其始祖也。後世入朝新羅。賜姓梁至諱洵入仕新羅。封漢羅君。我朝有諱以河。贈左承旨。享綾州三賢祠。生諱彭孫。校理。與靜庵趙先生爲道義交。諡惠康。世稱學圃先生。生諱應箕校尉。生諱山立。贈戶曹參判。生諱仁容。僉正。築松石亭。以山水文籍自娛。生諱渭南。進士參奉。孝旌閭。生諱禹甸。重修先亭以寄傲焉。生諱之瀣。與伯氏之沆。幷學尤庵宋先生之門。生諱大夏。生諱益祖。縣監。生諱成憲。通德郞。生諱一鉉。生諱贊浩。文行著名。生諱栻。明經擧解。屢屈禮。部卽公之考也。妣長興馬氏。彦模女。府院君天牧后。憲宗癸卯十一月三十日生。公體相頎而長。性氣溫而和。言若不出口。行若不勝衣。勤儉其平生家計也。敬謹其終身柯也。樂善嗜利。出於天性居貧處困。安於己分。不妄出入。不妄交游。城巿店肆名利繁華之地。不識公之面多矣而所與遊從。只是寂寞之濱一二寒友生而已。性好讀書。老而不懈。有所疑。一一劄記。待朋友從容講討。其不恥下問如此幼有至性孝養著聞與伯氏友悌甚篤至老白直。出則連鞭。入則連床。怡怡湛樂。未始相離。推以至族戚朋友。哀死問生賙窮恤患之節。隨力所及。晩益韜晦。自號聾窩。於得失是非。嗒然若不聞也。惟有論語一書在案上。時以怡顔焉。甲辰二月十六日觀化。得年六十二。葬所居村後南麓壬坐原。齊光山金氏哲鉉女。擧三男二女。會澈會遂會箕。河東鄭某海州崔某。嗚呼。人有良心。惟欲攻之。欲之攻心。不一其端。而名利之害。最爲甚焉。早以愷悌之姿。孝友之行。未嘗乾沒於名利之間。而有以全其純實之天者。公其人耶。非力不食徐穉之流也。隱居行義。董生之徒也。未知後之人視松石遺居。而追想之如南昌山川安豊水石否耶。余與公昆季爲金石之交。衰老相從。今皆棄我而逝。踽踽凉凉。誰因誰倚。會澈以家狀。請爲不朽計撫。念悲悵。不敢以非其人辭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