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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덕와 박공 유사장(德窩朴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27
덕와 박공 유사장
공의 휘는 준원(準元), 자는 정삼(正三)이니, 박씨의 계통은 밀양에서 나왔다. 우리 조정에서 휘 울(蔚)은 찰방(察訪)이고, 이분이 휘 맹성(孟誠)을 낳았으니 첨정(僉正)이며, 이분이 휘 영걸(永傑)을 낳았으니 부호군(副護軍)으로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휘 억서(億瑞)를 낳았으니 사맹(司猛)이다. 이분이 낳은 휘 지수(枝樹)주 141)는 감찰(監察)로 임진년(1592)에 입근(立慬 절개를 지켜 죽은 것)하였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정려(旌閭)의 명이 내려졌다. 이분이 낳은 휘 천주(天柱)는 주부(主簿)이고, 이분이 휘 성소(成素)를 낳았으며, 이분이 휘 상언(尙彦)을 낳았으니 첨추(僉樞)이고, 이분이 휘 필익(必益)을 낳았다. 이분이 낳은 휘 경린(慶麟)은 첨추이니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영환(英煥)이고, 조부는 재기(在璣)이며, 부친은 규진(圭鎭)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2녀를 두었고, 모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모의 따님이니, 헌종 기유년(1849) 5월 6일에 능주(綾州) 벽지리(碧池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지극히 착한 성품이 있어 효우(孝友)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9세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 슬프게 부르짖음이 다함이 없어 거의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는데, 본 자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모친과 조부모를 섬길 때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으니, 몸을 편안히 해드리고 입에 맞는 음식을 드리는 데에 모두 넉넉하지 않음이 없었다. 모친의 성품이 엄하였지만, 공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하여 간모(幹母)주 142)의 도를 잘 얻었다. 어느 날 상자에서 우연히 그 선인(先人)이 기록한 전권(錢券)을 손에 넣고 말하기를, "저 사람이 빌려 가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만일 내가 발설한다면 그가 반드시 불복할 것이니, 쟁단(爭端)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이를 불태웠다. 공의 족숙 우인공(愚忍公)과 함께 산소 아래에 있는 옛집을 청소하고 스승을 택하며 벗을 맞이하여 자손들의 학업을 익히는 곳으로 삼았는데, 가르치는 과정(課程)과 모든 절도가 분명하여 조리와 두서가 있었다. 종족이 번성하여 같은 마을에 함께 사는 자가 백여 집이었는데, 은의(恩誼)가 조화롭고 흡족하여 한 사람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없었다. 성품은 침착하고 장중(莊重)하며 질박하고 성실하여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고 출입은 간소했으며, 속되고 잡스러운 장난을 눈으로 보지 않고, 진귀하고 보기 드문 물건을 집으로 들이지 않았으며, 성기(聲伎)주 143)·잔치·세력과 이익·번화한 것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오직 빛을 감추고 종적을 감추어 어리석음을 안고 졸렬함을 지키는 것을 궁극의 가계(家計)로 삼았다. 무신년(1908) 12월 24일에 고종명하였는데, 임종할 때 두 아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위로 구순의 늙은 어버이가 계신데 내가 이 지경이 되어 불효의 죄가 크다. 너희들은 잘 섬기고 잘 봉양하여 구천(九泉)에 있는 네 아비의 한을 무겁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같은 동네 신정리(新井里) 뒤 기슭 조부 산소 아래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이정호(李貞鎬)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박경동(朴敬東)과 박시동(朴時東)이고, 딸은 전주 이근무(李根茂)와 진주 형시만(邢時萬)에게 출가했다. 아, 내가 중년에 공과 벗이 되었고 또 외람되게 인척이 되어 친밀하게 왕래한 지 수십 년이 되었다. 이에 그의 행동거지와 풍모, 마음가짐과 일 처리가 질박하고 참되며 성실하고 삼가는 데서 나오지 않음이 없어서 조금도 거짓으로 꾸미고 속이는 뜻이 없었음을 보았으니, 옛날에 이른바 '선진(先進)'이란 자는 공이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선진이 삼대(三代 하, 은, 주)의 말에 있었는데도 오히려 '야인(野人)'이라고 하니, 이는 공이 종신토록 침체되어 남에게 인정받지 못한 이유이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공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살고 죽는 것에 활발하고 저승과 이승에 유감이 없었으니, 이와 같을 뿐이었다. 박경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늙고 게다가 병까지 들어 받아서 감당하기 어려움이 있었지만 옛일을 생각해보고 또한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141)박지수(朴枝樹)
1552~1593. 임진왜란 때에 순절한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자는 무중(茂仲), 호는 모봉(茅峰)이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주석 142)간모(幹母)
《주역(周易)》 〈고괘(蠱卦) 구이효(九二爻)〉에 "어머니의 일을 주관함이니, 곧고 굳세게 해서는 안 된다.〔幹母之蠱, 不可貞.〕"라고 한 데서 나왔다.
주석 143)성기(聲伎)
궁중이나 귀족의 집에 종사하는 가희(歌姬)와 무녀(舞女)를 말한다.
德窩朴公遺事狀
公諱準元字正三。號德窩。系出密陽。我朝有諱蔚。察訪。是生諱孟誠。僉正。是生諱永傑。副護軍贈吏曹參議。是生諱億瑞。司猛。是生諱枝樹監察。壬辰立慬。贈左承旨命旌閭。是生諱天柱。主簿。是生諱成素。是生諱尙彦。是生諱必益。是生諱慶麟。僉樞。是公之高祖。曾祖英煥。祖在璣。考圭鎭。世有隱德。妣公州李氏某女。有二女。妣金海金氏某女。憲宗己酉五月六日。生公于綾州碧池里。幼有至性。孝友著聞。九歲遭外艱。哀號罔極。幾絶復甦。見者嘖嘖。事慈夫人及祖父母。盡誠力。便身適口。無不畢給。慈夫人性峻。公怡色婉容。甚得幹母之道。一日篋笥中。偶得其先人所錄錢券。乃曰。彼不言借貸。若自我發口。彼必不服。非所以惹起爭端乎。遂焚之。與其族叔愚忍公。掃墓下舊構。擇師邀友。爲子孫肄業之所。而指授課程。凡百節度。的有條緒。宗族蕃衍。同住一巷者。爲百餘家。而恩誼諧洽。無一人失和。禀性沈重質慤。平居寡言笑簡出入。俚雜之戱。不接於目。珍怪之物。不入於家。於聲伎遊宴勢利紛華泊如也。惟以潛先斂迹。抱愚守拙。爲究竟家計。戊申十二月二十四日考終。臨終顧二子曰。上有九耋老親。而吾至於斯。不孝罪大。汝等善事善養。母重乃父九泉之恨也。葬同坊新井里後麓祖墓下乾坐原。配光山李氏貞鎬女。圭二男二女。敬東時東。女適全州李根茂晉州邢時萬。嗚呼。余中年得與公友。又忝瓜誼。綢繆往來數十年。見其容止風儀。處心行事。無不出於質實誠慤。而無一毫欺誣矯僞之意。古所謂先進者。公其庶幾焉。然先進在三代之末。猶謂之野人。此公所以終身沈淹而不見知於人也。然人之知不知。於公何有。生死活潑。幽明無憾。斯焉而己矣。敬東奉家狀。屬以不朽之文。余老且病。有難承堪。而撫念疇昔。又不忍終辭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