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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송와 손공 유사장(松窩孫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26
송와 손공 유사장
공의 휘는 몽두(夢斗), 자는 원칠(元七), 호는 송와(松窩)이고 밀양 사람이다. 문효공(文孝公)의 휘는 순(順),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의 휘는 부(富), 응천군(凝川君)의 휘는 익감(翼減), 광리군(廣理君)의 휘는 극훈(兢訓), 밀성군(密城君)의 휘는 빈(贇)이니, 모두 상계(上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책(策)은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고, 의화(義和)는 현감을 지냈다. 비장(比長)은 호가 입암(笠巖)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 제학(弘文提學)을 지냈고,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과 15학사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며, 금남(錦南)주 136) 최부(崔溥) 공과 전교를 받들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수하였다. 그러나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부안(扶安)으로 물러나 쉬었고,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살았으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고조 일(逸)은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시웅(始䧺)은 동중추(同中樞), 조부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 부친 덕효(德孝)는 생원으로 호는 봉양(鳳陽)이다.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창서(金昌瑞)의 따님으로, 규중의 법도를 순수하게 갖췄고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으며, 정조 병오년(1786) 11월 11일에 정동리(井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몸가짐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8세에 입학하여 《소학(小學)》 책을 가르쳤는데 진퇴와 응대가 한결같이 그 가르침을 따랐고, 어버이의 명으로 처음에 공령(功令)을 업으로 삼아 글을 짓고 구두점을 찍었으며, 시문(詩文)이 문채 나고 아름다웠다. 갑술년(1814)에 부친 봉양공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공이 이때부터 드디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학문하는 데에 마음을 오로지 하였다. 또 시를 지어 말하기를, "의리는 반드시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야 하니[義理須尋日用間], 정성스럽게 해 나가면 안연(顔淵)을 기대할 수 있네.[諄諄往邁可希顔] 바람과 구름, 달과 이슬은 모두 어떤 모습인가.[風雲月露皆何狀] 시인(時人)들이 미혹하여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네.[可惜時人迷不還]"라고 하였다.
공의 부친이 일찍이 권학(勸學)의 뜻으로 칠송정(七松亭)에서 지낼 것을 명하였다. 이로 인해 칠송정 아래 집 한 채를 지어 '송와(松窩)'라고 편액하고 시를 지어 말하기를, "소나무 아래 한 칸의 집에[松下一間屋], 맑은 바람이 옷깃에 가득 불어오누나.[淸風吹滿衣] 세한(歲寒)주 137)은 진중(珍重)한 뜻이니[歲寒珍重意], 내 너(소나무)와 함께 돌아가리라.[吾與爾同歸]"라고 하였고, 계신공구(戒愼恐懼)주 138)와 인일기백(人一己百)주 139) 등의 말을 자리 곁에 써 두고 보면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렸으며, 조석으로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할 때에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병을 간호할 때에 근심을 다하여 밤에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집상(執喪)할 때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수척해진 나머지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일어났으며, 제삿날이 되면 서글퍼하고 두려워하여 종신의 상(喪)주 140)을 부쳤고, 형제 5명과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으면서 즐겁고 매우 화목하게 지냈다. 평소에 마음가짐은 성실하고 몸가짐은 장중(莊重)하였으며, 근면하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다스렸고, 겸손함과 공손함으로 다른 사람을 대했으며, 남에게 선행이 있으면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사랑했고, 남에게 악행이 있으면 자기의 병처럼 두려워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학문의 경로와 참된 진리의 원부(元符 매우 큰 상서(祥瑞))가 사서(四書)에 있는데, 다만 근심스러운 것은 매운 고추의 껍질을 삼키듯이 숙독하지 않고 생각을 정밀하게 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의복은 화려할 필요가 없고 몸을 가리면 될 뿐이며, 음식은 감미로울 필요가 없고 배를 채우면 될 뿐이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은 오직 학문 이 한 가지 일이다."라고 하였으며, 밝은 창 아래 책상에 우두커니 정좌(靜坐)하여 침잠(沈潛)하고 연구하며 날마다 일정한 과정(課程)이 있었다. 좋은 시절이 와서 간혹 산수가 맑고 빼어난 곳을 만나면 동지들을 이끌고 가서 소요하고 시문을 주고받으며 회포를 폈는데, 초연히 세속을 벗어난 생각이 있었다. 계사년(1833) 12월 2일에 세상을 떠나 고을 인량동(仁良洞) 미현(微峴)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시규(文始奎)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고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처상(處祥)·처무(處茂)·처종(處宗)이고, 딸은 서문원(徐文源)에게 출가했다. 큰아들이 낳은 손자 인용(麟鏞)은 군수(郡守)이고, 둘째 아들이 낳은 손자는 진용(璡鏞)과 종용(琮鏞)이며, 셋째 아들이 낳은 손자는 출계하여 계부(季父)의 후사가 되었다.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영렬(永烈)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오래도록 전하려고 하였는데, 내가 고루한 데다가 병으로 몸을 폐한 상태이지만 그 은근한 뜻을 어기는 것이 어렵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주석 136)금남(錦南)
최부(崔溥, 1454~1504)의 호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이고 나주 출신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저서로는 표류기인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가 1769년(영조45)에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주석 137)세한(歲寒)
추운 계절이란 뜻으로, 어려운 역경에도 변치 않는 절조를 말한다. 《논어》 〈자한(子罕)〉에서 공자가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雕.〕"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석 138)계신공구(戒愼恐懼)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을 때에도 경계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을 때에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주석 139)인일기백(人一己百)
《중용장구》 제20장에 "남이 한 번에 잘하면 나는 그것을 백 번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하면 나는 그것을 천 번을 할 것이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주석 140)종신지상(終身之喪)
기일(忌日)을 말한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군자는 종신의 상이 있으니, 이는 기일을 말한다. 기일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다. 이날은 뜻을 오로지 하여 감히 사사로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松窩孫公遺事狀
公諱夢斗。字元七。號松窩。密陽人。文孝公諱順。淸城府院君諱富。凝川君諱翼減。廣理君諱兢訓。密城君諱贇。皆上系顯祖也。入我朝。有諱策。文科牧使。至孫義和。縣監至孫比長。號笠巖文科弘文提學。與佔畢齋金先生。選入十五學士。與錦南崔公溥奉敎修東國通鑑。燕山朝。退休扶安。子孫仍居。世有隱德。高祖逸。贈工曹參議。曾祖始䧺。同中樞。祖興新。副護軍。考德孝。生員號鳳陽。妣光山金氏昌瑞女。閫儀純備有女士風。正宗丙午十一月十一日。生公于井洞里。姿性溫仁。容儀粹美。八歲上學。授小學書。進退應對。一遵其敎。以親命初業功令。綴文點句。詞華斐蔚。歲甲戌。大人鳳陽公登庠。公自是遂廢擧業。專心治學。且有詩曰。義理須尋日用間。諄諄往邁可希顔。風雲月露皆何狀。可惜時人迷不還。其大人嘗以勸學之意。命寓于七松亭。亭下因築一室。顔曰松窩。有詩曰松下一間屋。淸風吹滿衣。歲寒珍重意。吾與爾同歸。以戒愼恐懼人一己百等語。書于座側。視爲自警。事親孝。晨昏定省。朝夕滫瀡。致誠致力。俾無有憾。侍疾致憂。夜不解帶。執喪過哀。杖而後起。遇忌諱之辰。悽愴怵惕。以寓終身之喪。兄弟五人。長枕大被湛樂隆洽。平居立心忠慤。持身莊重。御家以勤儉。接人以譙恭。人有善。愛之如己出。入有惡。畏之如己病。嘗戒子弟曰。學問蹊逕。眞詮元符。在四子書。但患讀之不熟思之不精。如辣椒之皮呑耳。又曰。衣服不必華麗。蔽身而已。飮食不必甘美。充腸而已。所可盡心盡力。死而後已者。惟是學問一事。明窓棐几。兀然靜坐。沈潛硏究。日有程磨。値良辰佳節。或遇水石淸絶處。携同志ㅡ逍遙酬暢。超然有出塵之想。癸巳十二月二日考終。葬州之仁良洞微峴壬坐原。齊南平文氏始奎女。有婦德生三男一女。處祥處茂處宗。女適徐文源。長房麟鏞郡守。二房孫璡鏞琮鏞。三房出爲季父後。曾孫以下不盡錄。曾孫永烈抱家狀。屬余爲文以壽其傳。余以固陋。加以病廢。而重違勤意。謹据狀而略加修潤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