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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송파 처사 정공 유사장(松坡處士鄭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25
송파 처사 정공 유사장
공의 휘는 순영(淳榮), 자는 현여(顯汝), 호는 송파(松坡)이다. 정씨는 하동(河東)을 관향으로 하는 사람들이니, 평장사(平章事) 휘 도정(道正)이 처음으로 보첩(譜牒)에 오른 선조가 된다. 휘 지연(芝衍)은 찬성사(贊成事)로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며, 휘 익(翊)은 중현 대부(重顯大夫)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고, 휘 인귀(仁貴)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며, 휘 여해(汝諧)는 호가 돈재(遯齋)로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金先生 김종직(金宗直))을 스승으로 섬겨 학행(學行)으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니, 모두 중계(中系)로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지평이 낳은 휘 기령(箕齡)은 진사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이니 문행(文行)이 세상에 드러났고, 참봉의 현손 문상(文翔)은 호가 화은(華隱)으로 병자년의 난에 의병을 창도하였으며, 이분이 낳은 휘 은하(殷河)는 호가 육송(六松)인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으니,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휘 명윤(命潤)은 호가 잠곡(潛谷)이고, 증조 휘 구원(矩元)은 호가 농암(聾巖)이며, 조부 휘 재칠(在七)은 호가 죽와(竹窩)이고, 부친의 휘는 국현(國鉉)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모친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부녀자의 법도를 순수하게 갖췄으니, 순조 신묘년(1831) 8월 12일에 능주(綾州) 거동리(車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얼굴은 둥글고 몸은 살이 쪘으며, 풍모는 장중(莊重)하여 어려서부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고 웃지 않았다. 정성(定省)주 128)과 감취(甘毳 맛있고 연한 음식)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반드시 삼갔으며, 성품이 독서하는 데 부지런하여 날마다 과정(課程)이 있었고, 많은 서적과 경서를 교대로 섭렵하였으며, 문사(文詞)의 각 체는 지은 글이 넉넉하고 시원스러워서 한 시대의 거벽(巨擘 대가(大家))들이 추대하지 않음이 없었다. 다만 운명에 막혀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공론이 원통하게 여겼지만, 공은 편안히 처하여 불평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다. 만희재(晩羲齋)주 129) 양진영(梁進永) 공과 무사재(無邪齋)주 130) 박영주(朴永柱) 공은 모두 고을의 덕망이 높은 선비이니, 공이 수시로 찾아가 안부를 묻고 계속해서 학문을 익히고 닦았다. 늘그막에 선거(選擧)의 폐단을 보아 마침내 관리가 되려는 뜻을 끊고, 한결같이 요약(要約)함으로 돌아와 근원(根源)을 궁구할 것을 궁극의 계획으로 삼았다. 이에 《중용》·《대학》·《논어》·《맹자》 등의 책을 가지고 밤낮으로 이치를 연구하고 마침내 탄식하며 말하기를, "전날에 보았던 것은 매독환주(買櫝還珠)주 131)일 뿐만 아니니, 옛사람의 이른바 '늙으면 지혜로워지지만, 모(耄)주 132)가 뒤따른다.주 133)'라고 한 것은 이러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라고 하였다. 장흥(長興)의 어곡리(漁谷里)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산이 깊고 마을이 후미져서 세속의 경계가 요원하고, 마을의 뛰어난 선비 몇 사람만이 문정(門庭) 사이에서 글을 읽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두문불출하여 빛을 감추었으니, 은은하게 비단옷에 홑옷을 덧입는 것주 134)과 같았다. '송파(松坡)'라고 자호(自號)하고 시를 지어 뜻을 보였으니, "추워진 뒤에 언덕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소나무를 보았으니[特立坡松寒後見], 애오라지 만년의 절조를 지키면서 서로 같아지고자 한다.[聊持晩節願相如]"라고 하였다. 정미년(1907) 2월 18일에 졸(卒)하여 부등(釜嶝) 정좌(丁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낭주 최씨(朗州崔氏)는 최한신(崔漢信)의 따님으로 6남을 두었으니, 우채(瑀采)·봉채(琫采)·학채(䳽采)·필채(弼采)·발채(發采)·기채(琪采)이다. 손자는 찬협(燦協)·찬주(燦宙)·찬일(燦佾)·찬홍(燦弘)·찬회(燦懷)·찬의(燦宜)·찬명(燦明)·찬직(燦直)·찬석(燦錫)이다. 아, 공은 내가 사는 고을의 선배이다. 내가 상숙(庠塾)주 135)에서 연회(宴會)하는 자리와 사우(士友)들이 글을 짓고 술 마시는 장소에서 인연으로 종유(從遊)하여 감화를 받았다. 그런데 짧은 시간에 헤어지고 가난과 질병으로 구차하게 사느라 한번 어곡리 산중으로 찾아가 그가 덕을 진전시킨 공(功)을 보지 못하였는데, 공은 이미 영원히 세상을 떠난지라 따라가려 해도 오직 미치지 못하니 매우 통한스러울 뿐이다. 정찬협이 한창 부모상 중에 있으면서 가장(家狀)을 들고 찾아와 불후(不朽)의 글을 청했을 때,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진실로 감히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가장을 어루만지며 읽노라니 눈물이 줄줄 흘러 차마 끝내 사양하지 못했다.
주석 128)정성(定省)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준말로,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리면서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129)만희재(晩羲齋)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원(景遠), 능주(綾州) 출생이다.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림들이 양진영의 시를 찬탄하여 '풍아명어좌해(風雅鳴於左海)'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만희집(晩羲集)》이 있다.
주석 130)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의 호이다. 자는 유석(類錫),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03년(순조3)에 능주에서 태어났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와 교분이 두터웠다. 문집으로 《무사재집(無邪齋集)》이 있다.
주석 131)매독환주(買櫝還珠)
상자만 사고 구슬을 돌려준다는 뜻으로,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을 천히 여기고, 천하게 여겨야 할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춘추(春秋) 시대 정(鄭) 나라 사람이 초(楚) 나라 사람에게서 궤[櫝]를 살 때, 그 궤에 장식된 좋은 구슬들은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궤만 차지했던 고사에서 나왔다. 《韓非子 外儲說》
주석 132)모(耄)
80세 노인이 늙으면 정신이 혼미하여 노망이 든다는 말이다.
주석 133)늙으면……뒤따른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 원년(昭公元年)〉에 나온다.
주석 134)은은하게……것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덧입는다.' 하였으니, 그 문채가 드러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지만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지만 날로 없어진다.〔詩曰: '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135)상숙(庠塾)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를 말한다.
松坡處士鄭公遺事狀
公諱淳榮。字顯汝。號松坡。鄭氏本河東人。平章事諱道正。爲登譜之祖。諱芝衍。贊成事諡文忠公。諱翊重。顯大夫贈兵曹判書。諱仁貴戶曹參判。諱汝諧。號遯齋。師事佔畢齋金先生。以學行除司憲府持平。皆中系顯祖也。持平生諱箕齡。進士健元陵參奉。文行著世。參奉玄孫文翔。號華隱。丙子亂倡義旅。生諱殷河。號六松。孝旌閭。於公爲七世也。高祖諱命潤。號潛谷。曾祖諱矩元。號聾巖。祖諱在七。號竹窩。考諱國鉉。世有隱德。妣淸道金氏某女。壼範純備。純廟辛卯八月十二日。生公于綾之車洞里。公面圓體厚。風儀莊重。自幼不好戱美。不妄言笑。定省甘毳。必誠必謹。性勤讀書。日有課程。群書群經。輪流涉獵。文詞各體。栽述贍暢。一時巨擘。無不推先。但厄於命。未得有遇於時。物論稱屈。而處之恬然。未見有不平之意。晩羲齋梁公進永無邪齋朴公永柱。皆鄕裏宿德也。公隨時省候。講磨不輟。晩年見選擧之敝遂絶意干進。一以反約窮源爲究竟計。將庸學論孟等書。日夜硏理。乃歎曰。前日之見。不帝爲買櫝而還珠也。古人所謂將知而耄至者。非此之謂耶。寓居長興之漁谷里。山深洞僻。俗境遙遠。惟有村秀才子多少人。尋行數墨於門庭之間。閉戶塞竇。潛光鏟輝。誾然如尙絅之錦。自號松坡。賦詩以見志。有曰。特立坡松寒後見。聊持晩節願相如。丁未二月十八日卒。葬釜嶝丁坐原。配朗州崔氏漢信女。擧六男。瑀采琫采䳽采弼采發采琪采。孫燦協燦宙燦佾燦弘燦懷燦宜燦明燦直燦鍚。嗚呼。公吾鄕先進也。余於庠塾樽俎之地。士友文酒之場。得以夤緣遊從。有所薰染。曉暮分離。貧病苟活。未能一造漁谷山中得觀其進德之功。而公已千古矣。追惟靡逮。只切痛恨。燦協方在重哀之中。以家狀來謁不朽之文。余非其人。固知不敢承膺。而撫狀釀涕。有不忍終辭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