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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성균 생원 봉양 손공 유사장(成均生員鳳陽孫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24
성균 생원 봉양 손공 유사장
공의 휘는 덕효(德孝), 자는 왈현(曰賢), 호는 봉양(鳳陽)이니, 손씨는 계통이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신라 문효공(文孝公) 휘 순(順)이 그 시조(始祖)인데, 고려에 와서 훈벌(勳閥)주 126)이 혁혁히 빛나 우리나라의 거성(巨姓)이 되었다. 우리 조정에서 휘 책(策)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이분이 낳은 휘 경(敬)은 그의 백씨(伯氏 맏형) 휘 검경(儉敬)이 뜻을 굽히지 않아 보성(寶城)으로 귀양 가는 것을 보고 공도 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비장(比長)은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홍문 제학(弘文提學)과 이조 참의(吏曹參議)였는데,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부안(扶安)으로 물러나 쉬었고 호는 영귀당(詠歸堂)이니,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고조 휘 우절(遇節)은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일(逸)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시웅(始䧺)은 동중추(同中樞)이고, 부친 휘 흥신(興新)은 부호군(副護軍)이다. 모친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양효영(梁孝永)의 따님이고, 계비(系妣) 대구 서씨(大邱徐氏)는 서문강(徐文綱)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워 부덕(婦德)이 매우 갖춰졌으니, 영조 무인년(1758) 10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재성(才性)이 총명하여 스스로 말의 뜻을 알았고, 한 번 들으면 매번 잊지 않았으며, 나아가 배워 공부할 때에 기억하고 외우는 것이 매우 민첩하였다. 어느 날 종가(宗家)에 가서 사당이 불완전하여 제사를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돌아와 부친에게 고하여 묘우(廟宇)를 수선하고 종가를 구휼(救恤)하자고 청하자, 부친이 마음속으로 기특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아이가 이와 같으니 가문에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글방을 열어 스승을 맞이하여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및 백가(百家)의 책을 쌓아놓고 강학(講學)을 도와주었으며, 아침저녁으로 경계하고 신칙하여 방기함이 없게 하였다. 부친이 질병에 걸려 임종할 때 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가문의 계책은 다만 독서에 달려 있으니, 내가 죽은 후에 네가 일심(一心)으로 향학(向學)하여 한결같이 변함없다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 운명(殞命)하였다. 공은 슬프고 비통함이 끝이 없어 여러 번 기절했다가 깨어났고, 송종(送終 장사(葬事))의 절차와 집상(執喪)의 법은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다. 부친이 임종할 때에 부탁한 것을 생각하여 더욱 각고의 노력을 하면서 잠시도 편안히 한가하게 지내지 않았고, 문장이 성대하고 명성이 매우 자자하여 순조 갑술년(1814)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영귀(榮歸)주 127)함에 미쳐 친척과 친구들이 환영하면서 축하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공이 기뻐하는 얼굴빛 없이 말하기를, "부모를 잃은 처지로 외람되이 과거에 합격하여 귀가하여 문으로 들어왔는데 기쁨을 드릴 곳이 없으니, 정경(情景)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매우 서럽고 슬플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동생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밤에는 나란히 누워 자고, 낮에는 책상을 맞대며 기뻐하면서 화락하게 지냈으며, 재산과 집물(什物)은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였다. 병술년(1826) 4월 4일에 졸(卒)하여 인량동(仁良洞) 좌곡사동(左谷寺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창서(金昌瑞)의 따님으로 5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계두(啓斗)·몽두(夢斗)·필두(弼斗)·채두(采斗)·인두(寅斗)이고, 딸은 남원 윤필창(尹必昶)·탐진 최주효(崔柱孝)·탐진 최홍규(崔弘奎)·광산 김모(金某)에게 출가했다. 손자 처호(處護)·처진(處震)·처팔(處八)·처수(處修)는 장남이 낳았고, 처상(處祥)·처무(處茂)·처종(處宗)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처권(處權)과 처영(處英)은 셋째 아들이 낳았고, 처범(處範)은 넷째 아들이 낳았으며, 처종은 다섯째 아들의 뒤를 이었다. 현손 영렬(永烈)이 그의 부친 군수공(郡守公)이 지은 가장(家狀)을 가지고 그의 8촌 동생 손영모(孫永謨)로 하여금 나에게 가문에 길이 전하려고 하는 글을 요청하게 하였는데,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에 근거하여 이처럼 말한다.
주석 126)훈벌(勳閥)
국가에 공훈(功勳)이 있는 문벌(門閥)을 말한다.
주석 127)영귀(榮歸)
과거에 급제한 후 근친(覲親)하러 가는 것을 말한다.
成均生員鳳陽孫公遺事狀
公諱德孝。字曰賢。號鳳陽。孫氏系出密陽。新羅文孝公諱順。其鼻祖。至麗朝。勳閥烜爀。爲東方巨姓。我朝有諱策文。牧使。生諱敬。見其伯氏諱儉敬。以不屈謫寶城。公亦與之南下。三傳至諱比長文科重試官弘文提學吏曹參議。燕山朝退休扶安。號詠歸堂。世有隱德。高祖諱遇節。贈戶曹參議。曾祖諱逸。贈工曹參判。祖諱始䧺。同中樞。考諱興新。副護軍。妣濟州梁氏孝永女。系妣大邱徐氏文綱女。溫仁柔嘉。婦德甚備。以英宗戊寅十月十四日生。公才性穎悟。自能解語。一有所聞。輒不忘。就學授課。記誦甚敏。一日往宗家。見廟貌不完。祭儀未備。歸告大人。請爲之修繕廟宇。周恤宗家。大人心奇之。語人曰。有兒如此。家戶有望矣。遂開塾延師。貯四子六經及百家書以資講學。朝夕戒勅。俾無放闕。大人遘疾臨終。顧謂公曰。門戶之計。只在讀書。我死之後。汝若一心向學。終始無替。則我之目。可以瞑矣。言訖而終。公哀痛罔極。屢絶而甦。送終之節。執喪之儀。一遵禮制。念大人臨沒之託。益加刻勵。暫不暇逸。文瀾藹蔚。聲華藉甚。純廟甲戌中司馬。及其榮歸也。親戚知舊。無不歡迎稱慶。公無喜色曰。風樹餘生。猥參科名。而歸家入門。獻悅無所。追念情景。只切悲愴而已。與其弟友愛甚篤。夜則連枕。書則連床。怡怡湛樂。財産什物。有無共之。丙戌四月四日卒。葬仁良洞左谷寺洞子坐原。齊光山金氏昌瑞女。五男四女。男啓斗夢斗弼斗采斗寅斗。女適南原尹必昶耽津崔柱孝耽津崔弘奎光山金某孫處護處震處八處修長房出。處祥處茂處宗二房出。處權處英三房出。處範四房出。處宗系五房。玄孫永烈以其大入郡守公所撰家狀。使其三從弟永謨。請余文爲傳家不朽計。辭不獲。謹据狀爲之說如是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