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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화암 양공 유사장(華庵梁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23
화암 양공 유사장
공의 휘는 재성(在成), 자는 대집(大集)이다. 양씨는 계통이 제주(濟州)에서 나왔고 대대로 성주(星主 제주 목사)를 물려받았다. 고려 의종(毅宗) 때에 와서 휘 원준(元俊)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휘 문성(文聖)은 우리 조정에서 벼슬을 지냈으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휘 팽손(彭孫)주 123)은 교리(校理)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혜강(惠康)이니, 세상에서 학포 선생(學圃先生)으로 불렀다. 증조의 휘는 한영(漢永), 조부의 휘는 상기(相麒), 부친의 휘는 제묵(悌默)이니 모두 은덕(隱德)이 있었고, 모친 광산 이씨는 이용하(李龍河)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 무신년(1848) 12월 25일에 능주(綾州) 신산리(莘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선량한 성품이 있었기에 부모를 섬길 때에 오직 삼가서 부모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고, 여러 아이와 놀 때도 입으로는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손으로는 경솔하고 잡된 장난을 치지 않았다. 7세에 학교에 들어갔는데 진퇴와 응낙(應諾)이 다른 아이들과 같지 않았고, 매우 부지런히 독서하여 과정(課程)에 흠결이 없었다. 평소에 집이 매우 가난하여 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짓고 가축 기르는 것을 몸소 주관하지 않음이 없어서 구체(口體)의 봉양(奉養)주 124)에 모자람이 없었다. 거처할 때에 공경을 다하고 봉양할 때에 즐거움을 다하여 온 집안에 화기(和氣)가 가득하였다. 동생과 우애가 매우 지극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었는데 늙어서도 여전하였고, 재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에도 함께하여 굶고 배부른 것이 고르지 않은 탄식이 있은 적이 없었다. 모든 혼례비용과 출입할 때의 재물과 빈객의 대접을 모두 자력으로 공급하였고, 미루어 족친과 인척, 친구와 종유하는 자에게까지 모두 기쁘게 은혜를 베풀고 찬연(燦然)히 예로 대하였다. 계미년(1883)에 화학산(華鶴山)에 살면서 몇 칸짜리 집을 짓고, 형제가 서로 마주 대하며 말하고 웃으며 화락하게 지내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자식과 조카들이 곁에서 모시면서 독서하고, 친한 벗들이 책상을 둘러싸고 수창(酬唱)하였으니, 그 세속을 끊은 모습과 세속에서 벗어난 모습이 아름다워 잊을 수가 없었다. 상(喪)을 당하여 매우 슬퍼하면서 늙었다고 하여 스스로 용서하지 않고, 빈궁하다 하여 스스로 기운을 잃지 않아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에 유감이 없었다. 갑오년(1894)의 난에 이웃 마을 사람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사악함에 물들어 사는 것이 정도를 지키면서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고,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하늘을 거스르면 화가 발생하고 하늘을 따르면 복이 이르며, 선은 어겨서는 안 되고 악은 좇아서는 안 되니,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라."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백성들이 살고 죽는 명맥(命脈)이다. 공은 동생 양재해(梁在海)에게 천 리 밖의 스승에게 배우고 사방에 유학(遊學)함으로써 거의 헛되게 세월을 보내지 않도록 권하고, 피와 땀으로 힘써 일하여 그 비용을 감당하자 향리(鄕里)에서 탄복하고 칭찬하여 '이러한 형이 있어서 이러한 동생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명예와 이익을 그리워하지 않고 명성과 위세를 바라지 않았으며, 거친 의복과 거친 음식에도 고궁(固窮)주 125)하고 안빈(安貧)하였지만, 흠모한 것은 선인(善人)과 정사(正士)이고 힘써 노력한 것은 경사(經史)와 서적(書籍)이었다. 시냇가와 산 사이에서 소요하고 쑥대 우거진 궁벽한 곳에 파묻혀 유유자적하면서 애오라지 인생을 마쳤으니, 그 고상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는 세상에서 진실로 알아주는 자가 있을 것이다. 내가 공과 같은 땅에 살면서 비록 서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마음의 친밀함은 조석으로 자리를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백발의 노년에도 앙모하는 바가 적지 않았는데, 어찌 공이 좀 더 오래 살지 못하고 갑자기 이러한 지경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계묘년(1903) 12월 21일에 세상을 떠나 장흥(長興) 장서면(長西面) 운곡(雲谷) 삼개봉(三開峯) 아래 정방(丁方)을 향한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찬휴(文粲休)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는데, 공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회중(會中)·회연(會沇)·회구(會求)이고, 딸은 하동 정순봉(鄭淳鳳)에게 출가했다. 양재해가 가장(家狀)을 지어 나에게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을 부탁하였기에, 삼가 가장의 말을 근거하여 약간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주석 123)양팽손(梁彭孫)
1488~1545.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1519년(중종14)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저서로는 《학포유집》 2책이 전한다.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주석 124)구체(口體)의 봉양(奉養)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양지(養志)의 효도와 상대되는 말로,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등 육신만을 위해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孟子 離婁上》
주석 125)고궁(固窮)
군자는 곤궁할 때에도 도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군자는 진실로 곤궁하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제멋대로 행동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고 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華庵梁公遺事狀
公諱在成。字大集。梁氏系出濟州。世襲星主。至高麗毅宗朝。有諱元俊。門下侍郞平章事。有諱文聖。仕我朝皆其顯祖也。至諱彭孫校理贈吏判諡惠康。世稱學圃先生。曾祖諱漢永。祖諱相麒。考諱悌默。皆有隱德。妣光山李氏龍河女。公以憲宗戊申十二月二十五日生于綾之莘山里。幼有至性。事親惟謹。未嘗有違。與群兒遊。口不出鄙俚之言。手不作浮雜之戱。七歲上學。進退唯諾。不類他兒。讀書甚勤。課程無闕。家素貧甚。漁樵耕牧。無不躬幹。口體之養。不至見乏。居致其敬。養致其樂。二家之內。和其藹如也。與弟友愛甚至。長枕大被。老而猶然。有無共之。未嘗有飢飽不均之歎。凡皆嫁之用。出入之資。賓客之供。皆自力以給。推以至於族親姻戚。知舊遊從。皆驩然有恩。燦然有禮。癸未僑寓於華䳽山中。構數椽屋子。兄弟相對。言笑湛樂。日以爲常。子侄侍傍讀書。親朋繞床酬唱。其絶俗之標。出塵之象。可艶而不可忘也。遭喪哀甚。不以耆艾而自恕不以貧寠而自沮。情文無憾甲午之亂。戒隣里人曰。染邪而生。不如守正而死。戒子弟曰。逆天則禍生。順天則福至。善不可違。惡不可從。爲善去惡。此是民人生死命脈也。勸其弟枉海。從師千里。遊學四方。殆無虛歲。而血力拮据以應其費。鄕里歎賞。以爲有是兄有是弟。平生不慕名利。不赳聲勢。惡衣菲食。固窮安貧。而所慕者善人正士。所務者經史書藉。徜徉於溪山之間。沈淹於蓬蒿之中。優哉游哉。聊以卒歲。其高韻逸躅。世固有知之者矣。余與公居在同壤。雖未能源源相聚。而襟期之密勿。未嘗非朝夕合席也。白首歲寒。所仰不細。豈知公不少延而遽至於此耶。以癸卯十二月二十一日觀化。葬長興長西面雲谷三開峯下向丁之原。配南平文氏粲休女。有婦德。先公一年而終。生三男一女。會中會沇會求。女適河東鄭淳鳳。在海撰家狀示余。因有一言之托。謹据狀辭。略加修潤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