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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신천 처사 정공 유사장(新泉處士鄭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22
신천 처사 정공 유사장
공의 휘는 수현(洙鉉), 자는 성첨(聖瞻)이고 계통은 하동에서 나왔다. 휘 도정(道正)은 평장사(平章事), 휘 국룡(國龍)은 도첨의(都僉議), 문충공(文忠公) 휘 지연(芝衍)은 찬성사(贊成事)이니, 모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문충공이 낳은 휘 익(翊)이 우리 조정에 와서 벼슬이 병조 판서(兵曹判書)였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여해(汝諧)는 김점필재 선생(金佔畢齋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으니, 세상에서 돈재 선생(遯齋先生)이라고 불렀다. 이분이 낳은 휘 기령(箕齡)은 진사이고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을 지냈으며, 5대를 전해 내려와 휘 은하(殷河)는 호가 육송(六松)인데, 덕을 감추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으니, 공에게 6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덕중(德中), 증조의 휘는 명윤(命潤), 조부의 휘는 구원(矩元), 부친의 휘는 재대(在大)이니, 대대로 문행(文行)으로 드러났다. 모친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순조 계유년(1813) 1월 24일에 능주(綾州) 거동리(車洞里)에서 공을 낳았다. 기개와 도량이 빼어나고 시원하며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어려서부터 모든 장난과 저속한 말은 입에서 내지 않았고, 음란한 물건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며, 들어와서는 부형(父兄)을 섬기고 나가서는 장상(長上)을 섬기되 공경하고 삼가기를 한결같이 성인(成人)처럼 하였다. 학문하는 절도와 몸가짐의 위의(威儀)와 모양은 한결같이 고인(古人)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점차 자라면서 동향(同鄕)의 만희재(晩羲齋)주 120) 양진영(梁進永) 공과 무사재(無邪齋)주 121) 박영주(朴永柱) 공과 종유하여 강토(講討)하고 문변(問辨)하였다. 중년에 와서 하석(霞石)주 122) 성 선생(成先生)과 노사(蘆沙) 기 선생(奇先生 기정진(奇正鎭))을 찾아뵙고 평소에 간직했던 경전의 은미하고 심오한 뜻과 전례(典禮)의 의심스럽고 난해한 절목을 의논하여 확정 짓고 헤아려 질정하였으니, 확충시켜 나아간 바가 많았다. 일찍이 공령(功令 과거에 사용하는 시문) 근체(近體)의 문장에 비록 매우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시속을 따라 부지런히 노력하여 가문의 바람에 응하였는데, 이때 와서 드디어 한 번에 모두 사양하여 물리치고, 두문불출하여 세상과 사절한 것은 고요함을 지키고 한가롭게 지내려고 해서였다. 이에 한 구역에 정사(精合)를 짓고 물을 끌어와 샘을 만들어 '신천(新泉)'이라 편액하고, 날마다 마을의 뛰어난 자들을 데리고 와서 글을 읽었다. 고을에서 매번 예회(禮會) 및 문예(文藝)의 연회를 베풀 때면 반드시 공을 빈객으로 맞이했는데, 공이 유건(儒巾)과 유복(儒服)으로 풍의(風儀)가 매우 훌륭하여 이 때문에 온 좌중이 숙연하였고, 고을 자제들을 대하여 자상하게 이끌어 깨우쳐 주되 성의가 간절하고 지극하니, 듣는 이들이 절로 감복하였다. 평소에 온화하고 어질고 자애로워 화기(和氣)가 사람을 감동시켰고, 화합하면서도 휩쓸려 빠지지 않고 절조가 곧아도 속세와 단절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내외의 모든 이들이 원망함이 없고 원근의 사람들이 서로 믿었으며, 똑같은 말로 추켜세우고 이간하는 말이 없어 사림(士林)에서 공을 조정에 추천하는 데에 이르렀다. 무자년(1888) 12월 26일에 세상을 떠나 부등(釜嶝)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모(某)의 따님이고, 계배(系配)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모(某)의 따님으로 8남을 두었으니, 순철(淳哲)·순기(淳基)·순귀(淳龜)·순룡(淳龍)·순원(淳䲶)·순별(淳鱉)·순홍(淳鴻)·순필(淳弼)이다. 손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정병국(鄭炳國)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요청하였다. 아, 내가 어렸을 때에 이분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일이 어제처럼 또렷한데, 갑자기 영원히 이별한 지 이미 20여 년이 지났다. 향방(鄕邦)에서 당시의 덕망 높은 어른들을 다시 볼 수 없으니, 여생에 다하지 못한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이에 감히 그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120)만희재(晩羲齋)
양진영(梁進永, 1788~1860)의 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원(景遠), 능주(綾州) 출생이다. 최익현(崔益鉉) 등 많은 사림들이 양진영의 시를 찬탄하여 '풍아명어좌해(風雅鳴於左海)'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만희집(晩羲集)》이 있다.
주석 121)무사재(無邪齋)
박영주(朴永柱, 1803~1874)의 호이다. 자는 유석(類錫),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803년(순조3)에 능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를 찾아가 문인이 되었고,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과 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와 교분이 두터웠다. 문집으로 《무사재집(無邪齋集)》이 있다.
주석 122)하석(霞石)
성근묵(成近黙, 1784~1852)의 호이다.
新泉處士鄭公遺事狀
公諱洙鉉。字聖瞻。系出河東。平章事諱道正。都僉議諱國龍。贊成事文忠公諱芝衍。皆顯祖也。文忠生諱翊。入我朝。官兵曹判書。六傳諱汝諧。受學于金佔畢齋先生。以學行薦。拜司憲府持平。世稱遯齋先生。是生諱箕齡進士。健元陵參奉。五傳諱殷河號六松。隱德不仕。以孝旌閭。於公爲六世。高祖諱德中。曾祖諱命潤。祖諱矩元。考諱在大。世著文行。妣晉州姜氏某女。有婦德。純廟癸酉正月二十四日。生公于綾之車洞里。氣宇秀爽。性度至孝。自幼。凡嬉戱俚近之語。不出諸口。淫邪之物。不接於目。入事父兄。出事長上。克敬克謹。一如成人。爲學節度。持身儀樣。一以古人爲法。稍長從同鄕晩羲齋梁公進永無邪齋朴公永柱講討問辨。至中歲。往拜霞石成先生蘆沙奇先生。以平日所蓄經傳微奧之旨。典禮疑難之節。商確裁質。多所展拓。嘗於功令近體之文。雖不甚屑意。而隨俗黽勉以應門戶之望。至是遂一令掃斥。杜門謝世。爲守靜養閒計。築一區精舍。引流爲泉。顔曰新泉。日引村秀才子。尋行數墨。鄕中每設禮會及文藝之遊。必邀公爲賓。公以儒布儒服。風儀甚偉。一座爲之肅然。對鄕子弟。諄諄提諭。誠意懇至。聽者自服。平居溫仁慈愛和氣動人和而不流貞不絶俗是以內外無怨。遠近相信。一辭推詡。無有間言。至有士林剡薦。戊子十二月二十六日考終。葬釜嶝子坐原。配驪興閔氏某女。系配密陽朴氏某女。有八男。曰淳哲淳基淳龜淳龍淳䲶淳鱉淳鴻淳弼。孫以下不盡錄。曾孫炳國抱家狀來。謁不朽之文。嗚呼。余在小少。陪從杖屨。承奉聲咳。歷歷如昨日。而奄然千古之隔。已二十餘年。鄕邦間。不復見當日耆舊人物之盛。其爲餘生不盡之恨何如。玆不敢以非其人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