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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증 좌승지 송류정 민공 유사장(贈左承旨松柳亭閔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19
증 좌승지 송류정 민공 유사장
공의 휘는 영방(榮邦), 자는 계빈(季彬), 호는 송류(松柳)이니 계통은 여흥(驪興)에서 나왔다. 휘 칭도(稱道)는 고려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상의 봉어(尙衣奉御)였으니 이분이 시조이다. 휘 영모(令謨)는 평장사(平章事)로 시호는 문경(文景)이고, 휘 지(漬)는 도첨의 정승(都僉議政承)으로 시호는 문인(文仁)이며, 휘 근(瑾)은 여산 부원군(驪山府院君)이니, 모두 여사(麗史)에 드러나 있다. 우리 조정에서 휘 중립(中立)은 판전교령(判典校令)을 지냈고, 휘 소생(紹生)은 삼척 도호부사(三陟都護府使)를 지냈다. 휘 회삼(懷參)은 호가 의암(義庵)으로, 세조조(世祖朝)에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고주 115), 풀려나 마침내 능주(綾州) 월곡(月谷)에 살았으니 이분이 11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해익(海翼), 증조의 휘는 수귀(壽龜), 조부 휘 정수(挺洙)는 교관(敎官)에 추증되었고, 부친 휘 상록(相祿)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인(淑人)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이언규(李彦珪)의 따님으로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고, 계비(系妣) 숙인 광산 이씨(光山李氏)는 이광흡(李光熻)의 따님이니, 영조 을미년(1775)에 송석방(松石坊) 오류촌(五柳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총명하고 조숙하여 엄연히 성인의 의용(儀容)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점차 자라면서 개연히 고인(古人)의 위기(爲己)의 학문에 뜻을 두었다.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여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 수 없고, 도가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다."라고 하고, 《소학(小學)》으로 전지(田地)를 정하고, 《대학》으로 규모를 세우며, 《논어》와 《맹자》로 조리(操履 몸가짐과 마음가짐)를 밝혔다. 그래서 매우 부지런하게 여러 번 독송하고 깊이 사색에 잠겨 이를 마음에 보존하고 몸에 체득하였으니,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처럼 편안히 자득하였다. 자리 곁에 구용(九容)주 116)과 구사(九思)주 117)를 써놓고 출입하고 기거할 때에 늘 거울삼아 살폈다. 생도(生徒)들을 가르칠 때 분명하게 과정(課程)을 두고 차근차근 질서 있게 매진하여 성취한 것이 많았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살아계실 때 섬기는 것과 장례를 치르고 제사 지내는 것을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랐으며, 인정(仁情)과 예문(禮文) 두 가지를 지극히 하였다.
늘그막에 집 한 채를 지어 편액에 '송류정(松柳亭)'이라 쓰고, 자유롭게 소요하면서 날마다 서적을 스스로 즐겼고, 명예와 이익, 화려함에 관해서는 담박하였다. 문규(門規)를 정하여 친척 간의 두텁고 화목한 정을 익혔고, 향약(鄕約)을 세워 예속(禮俗)의 사귐을 밝히자 내외의 사람들은 원망이 없고 원근의 사람들은 서로 기뻐하였으니, 몸이 집밖을 나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미친 이익과 혜택이 많았다. 경자년(1840)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나 선하동(仙荷洞)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고암촌(鼓巖村) 앞 반룡산(盤龍山) 북쪽 기슭 정좌(丁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계사년(1893)에 손자 민덕호(閔德鎬)의 귀함으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부인 숙부인(淑夫人)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희대(文喜大)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가 매우 갖춰졌고 묘는 합장했으며 3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치형(致衡), 출계하여 계부(季父)의 후사가 된 치승(致昇), 호조 참판에 추증된 치화(致華)이고, 딸은 광산(光山) 김시창(金時昌)과 달성(達城) 배원태(裵元台)에게 출가했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증손 영욱(泳郁)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했을 때, 내가 그 적임자가 아니기에 진실로 감히 받들어 감당하지 못하지만, 단지 민영욱과는 조부, 아들, 손자 3대의 가깝고 두터운 정분이 있었기에 차마 결국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115)세조조(世祖朝)에……좌천되었고
1456년(세조2)에 김정수(金正水)가 제학 윤사균(尹士盷)에게 송현수와 판관 권완(權完)이 역모를 꾸민다고 고발했는데, 민회삼이 이에 연루되어 제주도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좌천되었다. 《梅山集 卷40 義菴閔公墓誌銘》
주석 116)구용(九容)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몸가짐으로, 발은 진중하게[足容重], 손은 공손하게[手容恭], 눈은 바르게[目容端], 입은 무겁게[口容止], 목소리는 조용하게[聲容靜], 머리는 곧게[頭容直], 숨소리는 엄숙하게[氣容肅], 서 있는 모습은 덕이 있게[立容德], 얼굴빛은 장엄하게[色容莊] 하는 것이다. 《禮記 玉藻》
주석 117)구사(九思)
군자가 지녀야 할 9가지 마음가짐으로, 볼 때는 밝음을 생각하고[視思明], 들을 때는 귀 밝음을 생각하고[聽思聰], 얼굴빛은 온화함을 생각하고[色思溫], 모습은 공손함을 생각하고[貌思恭], 말할 때는 충성스러움을 생각하고[言思忠], 일할 때는 경건함을 생각하고[事思敬], 의심스러울 때는 질문할 것을 생각하고[疑思問], 화를 낼 때는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忿思難], 재물을 얻을 때는 의리에 합당한가를 생각한다[見得思義]는 것이다. 《論語 季氏》
贈左承旨松柳亭閔公遺事狀
公諱榮邦。字季彬。號松柳。系出驪興。諱稱道。仕麗朝官尙衣奉御。是爲鼻祖。諱令謨平章事文景。諱漬都僉議政承文仁。諱瑾驪山府院君。竝著麗史。我朝有諱中立判典校令。諱紹生三陟都護府使。諱懷參號義庵。世祖朝謫守大靜。解放。遂寓于綾州之月谷。是其十一世祖也。高祖諱海翼。曾祖諱壽龜。祖諱挺洙贈敎官。考諱相祿贈司僕寺正。妣淑人慶州李氏彦珪女。有女士行。系妣淑人光山李氏光熻女。英宗乙未。生公于松石坊五柳村。生有異質。穎悟夙就。嚴然有成人儀度。稍長。慨然有志於古人爲己之學。嘗自警曰.非學無以知道。非道無以爲人。以小學定田地。以大學立規模。以論孟明操履。誦數甚勤。思索甚苦。存之於心。體之於身。氷解凍釋。怡然自得。書九容九思於座側。出入起居。常常鏡考。敎誨生徒。的有課程。循循征邁。多所成就。性孝。生事葬祭。一遵禮制。情文兩至。晩築一室。題其顔曰松柳亭。寄敖徜徉。日以書籍自娛。至於聲利芬華泊如也。定門規以講敦睦之誼。立鄕約以明禮俗之交。內外無怨。遠近胥悅。身不出家。而利澤之及人者多矣。庚子五月十八日考終。葬仙荷洞。後移窆于鼓巖村前盤龍山北麓丁坐原。癸巳以孫德鎬之貴。贈承政院左承旨。配淑夫人南平文氏喜大女。壹儀甚備。墓祔。三男二女。男致衡。致昇出爲季父后。致華贈戶曹參判。女適光山金時昌達城裴元台。孫曾以下不盡錄。曾孫泳郁奉家狀來。有不朽之託。余以非其人。固不敢承當。而但於泳郁。有祖子孫三世契分之厚。不忍終辭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