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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구심재 정공 유사장(求心齋鄭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18
구심재 정공 유사장
돈재(遯齋) 정 선생(鄭先生)은 내가 사는 고을의 선유(先儒)이니, 김점필재(金佔畢齋)의 문인으로서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훌륭하게 세상에 유명해져 자손들이 계승할 만한 바탕이 되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후손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때때로 유학(儒學)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근고(近古)의 호는 구심재(求心齋), 자(字)는 성언(成彦)인 처사(處士) 휘 양훈(陽勳)도 그중 한 분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의젓하게 성인(成人)의 모습이 있어서 장난치며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뛰어노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날마다 곁에서 어른을 모시면서 응대하는 것을 오직 삼갔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책 읽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는데, 곁에서 그 뜻을 듣고 인하여 말하기를, "만일 책을 읽지 않으면 어떻게 이러한 의리를 알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한가한 틈을 타서 이웃 마을 경암(敬庵) 정공(鄭公)의 문하로 나아가 배웠으니, 경암은 바로 그의 친족 장로(長老)이다. 정공(鄭公)은 평소에 마음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 방법이 있고 가르치는 데에 법이 있었는데, 공이 한결같이 그 가르침을 준수하여 어긴 적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서부터 제사(諸史)와 백가(百家)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면서 순조롭게 깊게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서 문리(文理)와 시문(詩文)이 찬란하게 문채를 이루었고, 의리의 근원에 침잠하여 핵심적인 깊은 뜻에서 실마리를 뽑아내어 찾았으니, 이는 마치 얼음이 풀리고 얼어붙은 것이 녹는 것과 같았다. 이 때문에 마음에 보존되어 몸에 체득한 것과 남에게 시행하여 일에 조처한 것이 찬연히 조리가 있고 엄연히 법이 있었다. 매번 한가한 날에 과거 공부를 하여 시문(時文)주 110)의 각 체가 풍부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득실(得失) 때문에 개의치 않았고, 궁벽하고 황량한 곳에 종적을 감추고 전원에 빛을 숨겼으며, 삼경(三逕)주 111)에 꽃과 대나무를 심고 네 벽엔 책을 가득 쌓아놓고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그러니 그 뛰어난 운치와 지취, 고아한 풍격과 뛰어난 자취를 또 어찌 보잘것없이 부침하는 것으로 다르게 볼 수 있겠는가. 막힌 데에서 형통한 곳으로 변하여 가고주 112)[否之亨], 곤란한 데에서 통하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주 113)[困之通] 애초에 사군자(士君子)의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 아님이 없다. 공은 하동(河東)의 저족(著族)이다. 고조 휘 흘(忔)은 호가 송암(松庵)으로 정동계(鄭桐溪)주 114)의 문인인데, 병자년(1636)에 의병을 일으켜 판윤(判尹)에 추증되었으니, 이가 돈재 선생의 4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문참(文參)이고, 조부의 휘는 세채(世采)이며, 부친의 휘는 집(鏶)이고 참봉(參奉)을 지냈다. 모친 함안 조씨(咸安趙氏)는 조상민(趙尙敏)의 따님이니, 영조 정사년(1737) 6월 7일과 순조 기사년(1809) 8월 6일은 바로 그가 태어난 날과 세상을 떠난 날이고, 묘는 신산(莘山) 응막동(鷹幕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있다. 부인 청도 김씨(淸道金氏)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흥상(興相)과 필상(必相)이고, 딸은 제주(濟州) 양은호(粱殷浩)에게 출가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족손 정재우(鄭在禹)가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저술이 적지 않았는데 여러 번 화재로 소실되어 한 글자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상상할 수 있는 유풍(遺風)과 여열(餘㤠)은 고을 인사들이 전송(傳誦)한 말뿐입니다. 연대가 더욱 멀어질수록 전송(傳誦)이 점점 미약해지면 백세(百世) 뒤에 누가 다시 공을 아는 자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한 마디 은혜로운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듣고 추앙하는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감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110)시문(時文)
과거 답안에 쓰던 문체로, 팔고문(八股文)을 이르는 말이다.
주석 111)삼경(三逕)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은사 장후(蔣詡)가 뜨락에 송(松)·국(菊) 죽(竹)을 심은 뒤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주석 112)막힌……가고
비(否)는 천지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비색하고 막히는 때이니, 이러한 때에는 절개를 굳게 지키면 길하여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비괘(否卦) 상전(象傳)〉에 "천지가 사귀지 않음이 비이니, 군자가 보고서 덕을 검약하여 난을 피해서 녹으로써 영화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天地不交否, 君子以, 儉德辟難, 不可榮以祿.〕"라고 하였다.
주석 113)곤란한……것은
곤(困)은 곤란하고 험난한 때이니,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의를 잃지 않으면 그 도가 형통해진다는 뜻이다. 《주역》 〈곤괘(困卦) 단전(彖傳)〉에 "험하지만 기뻐하여 곤란하여도 그 형통한 바를 잃지 않으니, 오직 군자일 것이다.〔險以說, 困而不失其所亨, 其唯君子乎.〕"라고 하였다.
주석 114)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 1569~1641)으로, 동계는 그의 호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이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求心齋鄭公遺事狀
遯濟鄭先生。吾鄕先儒也。以金佔畢齋門人。文學行義。偉然名世。而爲子孫可繼之地。是以詵詵來許。紹休趾美。往往以儒學著聞。近古求心齋處士諱陽勳。字成彦。亦其人也。自幼凝然有成人儀樣。不好戱嬉。不事遊走。日侍長者側。應對惟謹。一日見入授讀。從傍聽其義。因曰。若不讀書。何以知此等義理乎。遂挾閒就學于隣閈敬庵鄭公之門。敬庵卽其宗黨長老也。平日持守有方。敎授有法。公一遵其敎。未有違越。年弱冠。自四書五經至諸史百家。無不輪流淹貫。文理詞華。斐然成章。沈潛乎義理之源。紬縪乎肯綮之蘊。如冰解而凍釋。是以其存於心而體於身。施於人而措諸事者。燦然有條。儼然有則。每以餘日。游於功令之業。時文各體。無不贍麗。而不以得失關心。斂迹窮荒。潛光畎畝三逕花竹。四壁圖書。婆娑徜徉。聊以自遣。其偉韻逸趣。高風遐躅。又豈可以區區陞沈而差殊觀哉。否之亨。困之適。未始非士君子安身立命處也。公河東著族。高祖諱忔。號松庵。鄭桐溪門人。丙子擧義。贈判尹。是遯齋先生四世孫也。曾祖諱文參。祖諱世采。考諱鏶參奉。妣咸安趙氏尙敏女。英宗丁巳六月七日。純祖己巳八月十六日。卽其懸弧與屬纊也。墓莘山鷹幕洞亥坐原。齊淸道金氏。擧二男一女。男興相必相。女適濟州粱殷浩。孫以下不錄。族孫在禹。持家狀過余曰。著述不爲少矣。而屢失回祿。隻字不遺。其遺風餘㤠所可想象者。鄕人士傳誦之語而已。年代愈遠。而傳誦浸微。則百世之下。誰復有知公者乎。願勿悋一言之惠也。聞之不勝追仰之私。有不敢多辭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