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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용한 오공 유사장(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容閒吳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15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용한 오공 유사장
오씨(吳氏)는 동방(東方)의 거성(鉅姓)인데, 패릉(貝陵)을 관향으로 삼은 자가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고려조에 휘 연총(延寵)주 101)은 벼슬이 평장(平章)이고 시호는 문양(文襄)으로, 영토를 확장한 위훈(偉勳)이 있었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현필(賢弼)이 패릉에 봉해져 이로 인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5대를 전해 내려와 충을(忠乙)은 우리 조정에서 찬성(贊成)을 지냈고,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익손(益孫)은 효행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으며, 침랑공이 패릉에서 능주로 그의 부모를 장사지냈는데, 여묘(廬墓)하면서 이로 인해 거주하였다. 3대를 전해 내려와 휘 방한(邦翰)은 임진년(1592)에 의병을 창도하여 진주(晉州)에서 입절(立節)주 102)하였다. 7대를 전해 내려와 휘 만상(萬祥)은 효행으로 여러 번 추천에 들었고, 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조광엽(曺光葉)의 따님이니 바로 공의 부친과 모친으로, 정조 정사년(1797) 2월 14일에 부춘방(富春坊) 칠송리(七松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어렸을 때에 남다른 자질이 있어 말하고 웃으며 즐겁게 노는 것이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았고, 스승에게 나아감에 미쳐서는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항상 무릎을 모아 단정히 앉아 밤낮으로 부지런히 하였고, 산사(山寺)에서 책을 읽을 때에 집과 10여 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매일 한 번씩 반드시 안부를 살피자, 부모가 공부에 방해될까 염려하여 매우 엄하게 저지하였다. 이후부터 부모의 소식이 격조하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났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주선하여 소식을 들은 뒤에야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으니, 그 독실한 효성이 이와 같았다. 갑술년(1874)에 큰 흉년을 만났는데, 공이 이웃 사람들을 진휼(賑恤)하여 이에 힘입어 살게 된 자가 많았다. 약관(弱冠)에 부모상을 연달아 당하여 집상(執喪)의 모든 절차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좇아서 행하였고,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을 갖추어 다했다. 늘그막에 우봉(牛峯)에서 오봉산(五峯山) 아래에 우거하였으니, 대개 고요한 데로 나아가 한가롭게 지내기 위해서였다. 문규(門規)를 세워 종족과 친하게 지내고, 향약(鄕約)을 수행하여 이웃 마을 사람들과 잘 지냈다. 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가엾게 여겨 잘 보살폈으되 늙어서도 쇠퇴하지 않았고, 여러 조카를 보살펴 기르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이 하였으며, 집안이 화목하고 형제가 즐겁게 지내니 자손들은 그 가르침을 준행했고 향리에서는 그 의리에 감동하였다. 을해년(1875)에 우로은(優老恩)으로 통정(通政)에 올랐고, 병자년(1876) 1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 제주 양씨(濟州梁氏)는 통덕랑(通德郞) 양중현(梁中鉉)의 따님으로 어질고 예가 있어 부도(婦道)를 잘 지녔는데, 공보다 12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의 자질은 침착하고 무게가 있으며, 기상은 온화하고 아담하며, 언어는 간략하고 어눌하며, 행동거지는 차분하고 세심하였다. 경(經)의 뜻에 심오하고 일 처리하는 데 밝으니, 향려(鄕閭)에 의심나는 일이 있거나 알지 못하는 행정상의 사무가 있으면 매번 공에게 나아가 해결하였다. 아, 공은 바로 선친의 벗이다. 기억하건대 공과 선친께서 백발과 태배(鮐背)주 103)의 모습으로 평상을 마주하고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시고, 소자(小子)는 그 앞에서 추주(趨走)주 104)하고 예예[唯諾]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 모두 천고의 이별을 이루었고, 이렇게 애처롭고 외로운 내가 마침내 공의 덕을 기록하는 글[狀德之文]을 짓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공의 손자 오왕홍(吳枉鴻)이 장차 유사(遺事)를 수습하여 후대에 오래 전하려고 할 때, 내가 곁에서 모신 날이 오래되었다고 하여 대략의 줄거리를 서차(序次)하게 하였을 뿐이다.
주석 101)오연총(吳延寵)
1055~1116.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집안이 어려웠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였다. 1096년(숙종1)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1107년(예종2) 부원수(副元帥)로 원수(元帥) 윤관과 함께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은 뒤 개선하였다.
주석 102)입절(立節)
절개를 지켜서 죽은 것을 말한다.
주석 103)태배(鮐背)
복어의 등이란 뜻으로, 늙은이를 말한다. 사람이 늙으면 복어의 등에 있는 얼룩 같은 검버섯이 피부에 생긴다고 하여 이르는 말이다.
주석 104)추주(趨走)
윗사람의 앞을 지날 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것을 말한다.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容閒吳公遺事狀
吳東方鉅姓。貫貝陵者。爲尤著。勝朝有諱廷寵。官平章諡文襄。有拓地偉勳。六傳諱賢弼。封貝陵。因以爲貫。五傳至忠乙。我朝官贊成。三傳諱益孫。以孝除寢郞。寢郞公自貝陵。葬其親於綾。盧墓而因居焉。三傳至諱邦翰。倡義壬辰。立節晉州。七傳諱萬祥。以孝累入剡薦。夫人昌寧曺氏光葉女。卽公考妣也。以正廟丁巳二月十四日。生公于富春坊七松里第。幼有異質。言笑嬉遊。不類凡兒。及就傳。文理日就。常斂膝端拱。昕宵不怠。讀書山寺。距家十餘里。每日必一番省候。父母憂其妨功。止之甚嚴。自後音聞有曠。憂形於色。必周旋得聞。然後乃安意讀書。其誠孝之篤如此。遭甲戌大無。賑恤隣保。多所賴活。弱冠連遭考妣喪。執喪諸節。一遵家禮備盡情文。晩年自牛峯。寓居五峯山下。盖就靜養閒計也。立門規以親宗族。修鄕約以和隣里。矜養寡妹。老而不衰。撫育諸姪。同於己出。室家雍睦。兄弟湛樂。子孫遵其敎。鄕里感其義。乙亥以優老恩陞通政。丙子正月六日棄世。夫人濟州梁氏通德郞中鉉女。賢而有禮。甚得婦道。先公十二年而終。公姿質沈重。氣容溫雅。言語簡訥。動止安詳。邃於經義。明於料事。鄕閭之間。事有所疑。政有未達。輒就決焉。嗚呼。公卽先人友也。曾記其䳽髮鮐背。對床款款而小子趨走唯諾於前豈知行未幾何俱成千古。而哀此孤露。乃述其狀德之文耶。公孫枉鴻。將欲收拾遺事。以壽來世。以余侍側日久。使之序次梗槩云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