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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묵재 이공 유사장(默齋李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14
묵재 이공 유사장
내가 일찍이 우리 지방의 선배 인물의 성대함을 보았더니, 고(故) 묵재(默齋) 이공(李公)의 집안이 가장 성대하였다. 공의 동조 형제(同祖兄弟 4촌)가 8명에 이르는데, 모두 체격과 용모는 훌륭하고 뛰어나며 문학은 풍부하여 사람들이 고양팔룡(高陽八龍)주 94)에 견주었다. 공의 휘는 면휘(勉徽)이고 자는 중서(仲敘)이니, 총명하고 빼어나며 시원한 자질로 가학과 법불(法拂)주 95)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영향받고 훈도(薰陶)받았으며, 보충하여 증장하고 넓혀나가 일찍이 효우(孝友)로 널리 알려졌고, 만년에 행의(行義)로 널리 알려져 위대하게 말세의 일사(逸士)주 96)가 되었다. 공이 부모를 섬길 때에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모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드렸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나아가 봉양하여 부모의 입과 몸에 맞게 하였으며, 부모의 뜻을 먼저 알아차리고 받들어 순종하여 그 마음과 뜻을 편안히 해드렸다. 전후의 상(喪)은 애훼(哀毁)에 지나쳤지만 정문(情文)주 97)을 빠뜨림이 없었고, 동산에 맛 좋은 복숭아가 있었으나 부모님이 즐겨 드시는 것이었기에 끝내 차마 입에 넣지 못했다. 공은 형제들과 온화하고 화락하게 지내어 분가할 때에 밭은 거칠고 척박한 것을, 기구는 썩어 문드러진 것을 자신이 취하고, 품질이 좋은 것을 미루어 그의 아우에게 주었다. 중부(仲父)의 아들이 환포(還逋 환곡의 포흠)를 범하자, 공이 중부에게 걱정을 끼칠까 두려워하여 몰래 자기의 토지를 팔아서 이를 갚아주었다. 늦게 아들 한 명을 둔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공이 매우 사랑하였기에 집으로 안고 돌아오라고 명하여, 10여 년 동안 기르고 가르치기를 자기가 낳은 아들처럼 하였으니, 이는 효우의 실상이다. 천성이 간략하고 중후하며 침착하고 과묵하여 종일토록 어리석은 듯했으며,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했지만 《소학》과 《대학》에 더욱 정통(精通)하였다. 문사(文詞)는 화려하면서도 실속이 있고, 식견은 넓으면서도 정밀하였으며, 비방과 칭찬 때문에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았고, 득실(得失) 때문에 느긋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며, 바른말을 하고 얼굴빛을 단정하고 엄숙하게 하자,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어려워했다. 일찍이 어떤 사람이 금품을 보내오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옛사람은 사지금(四知金)주 98)을 받지 않았는데, 지금 나는 어린아이가 곁에 있으니, 어찌 오지(五知)주 99)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어느 날 밖에서 돌아와 집안에 불이 난 것을 보았는데 손해 본 것이 적지 않았으니, 대개 여비(女婢)가 조심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공이 여비를 보고 이르기를, "너는 화상을 입은 곳이 없느냐?" 하고는 끝내 한마디 말이 없었다. 족척과 친구의 길흉(吉凶)과 경조(慶弔), 기근(饑饉)에 구하여 도와주되, 때마다 빠뜨림이 없었고 정의와 예의를 모두 흡족하게 하였다. 향방(鄕邦)의 상숙(庠塾)주 100)과 연회 석상의 문단(文壇)에 출입하는 풍의(風儀)와 좌우의 처리하는 일은, 그 위의(威儀)가 엄숙하고 말하고 웃는 것이 정다워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히 마음으로 기쁘게 하고,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대문에 이르는 걸객(乞客)을 보면 후하게 베풀어 주었는데, 불쌍히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으니, 이는 행의(行義)의 실상이다. 경신년(1860) 8월 23일에 졸하였으니, 태어난 신유년(1801)과의 시간적 거리를 계산해보면 향년 60세이다. 주(州) 남쪽 풍류재[風流峙]에 장사지냈는데, 뒤에 비사등(飛沙嶝) 부신(負申)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아, 내가 어려서 선인(先人)을 곁에서 모실 적에 공의 어짊에 대해서 들은 것이 어제처럼 역력한데, 부모를 잃고 외롭게 된 지 지금 50여 년이 되었다. 그런데 태평한 문문(文物)의 시대에 향당(鄕黨)의 큰 덕망을 지닌 원로의 풍채를 다시 볼 수 없으니, 고금의 일을 생각하면 절절하여 끝없이 슬플 뿐이다. 이씨는 관향이 광산(光山)으로, 고려조에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휘 이순백(李珣白)을 등보(登譜)의 조(祖)로 삼는다. 중엽에 휘 선제(先齊)는 경창군(慶昌君)으로 호는 화문(華門)이고, 휘 조원(調元)은 은일(隱逸)로 여러 번 불러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고 호는 청심당(淸心堂)이니, 문학(文學)과 사환(仕宦)이 대대로 많았다. 고조 필광(必光)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고, 증조 언규(彦規)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영근(永根)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부친 선우(先佑)는 호가 균헌(筠軒)이고 모친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상규(文祥奎)의 따님이다. 공은 함양 박씨(咸陽朴氏) 박이긍(朴履兢)의 따님과 혼인하여 4남 1녀를 낳았으니, 동한(東漢)·문호(文鎬)·지호(贄鎬)·인호(仁鎬)이고, 딸은 죽산인(竹山人) 안의환(安義煥)에게 출가했다. 손자 승두(承斗)와 혁회(赫會)·현규(現圭)에게 출가한 손녀는 큰아들이 낳았고, 손자 승규(承奎)와 기백(琪白)·배한숙(裵漢淑)에게 출가한 손녀는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손자 승우(承愚)·승일(承一)과 오계영(吳桂泳)에게 출가한 손녀는 셋째 아들이 낳았고, 손자 승지(承祉)·승태(承泰)와 박제영(朴齊英)·손사규(孫士圭)·문모(文某)에게 출가한 손녀는 넷째 아들이 낳았다. 증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글을 요청한 자는 승우이다.
주석 94)고양팔룡(高陽八龍)
동한(東漢) 때에 순숙(荀淑)의 아들 8명이 모두 재주가 뛰어났기에, 상고(上古) 시대의 제왕인 고양씨(高陽氏) 전욱(顓頊)의 재주가 뛰어난 아들 8명에 비겼다. 그리고 그가 살던 마을은 본래 서호리(西豪里)였는데 고양리(高陽里)로 변경하여 부르게 하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순숙의 8명의 아들을 팔룡(八龍)이라 불렀다. 《後漢書 卷92 荀淑列傳》
주석 95)법불(法拂)
〈초은 손공 유사장(楚隱孫公遺事狀)〉 주 참조.
주석 96)일사(逸士)
절의가 빼어나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는 선비를 말한다.
주석 97)정문(情文)
인정(仁情)과 예문(禮文)을 말한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자식으로서 부모를 잃은 슬픔과 초상을 치르는 데 있어 정해진 예법을 말한다.
주석 98)사지금(四知金)
양진(楊震)이 동래 태수(東萊太守)로 부임하는 도중 창읍(昌邑)에 도착했을 때, 창읍 영(昌邑令) 왕밀(王密)이 밤중에 양진을 찾아가서 금 10근을 바치며 "밤중이라 아무도 아는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진이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며,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4 楊震列傳》
주석 99)오지(五知)
사지(四知)인 천지(天知)·신지(神知)·아지(我知)·자지(子知)에 어린아이가 아는[稚兒知] 것을 더한 것을 말한다.
주석 100)상숙(庠塾)
지방과 마을에 설치한 학교를 가리킨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옛날에 교육기관으로 집에는 숙을 두고 당에는 상을 두며, 술에는 서를 두고 나라에는 학을 두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라는 말이 나온다.
默齋李公遺事狀
余嘗及見吾鄕先輩人物之盛。而故默齋李公之家。最爲蔚然。公同祖兄弟。至爲八人。而皆體相峻茂。文學宏贍。人以高陽八龍擬之。公諱勉徽。字仲敘。以頴悟秀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擩染薰陶。充長展拓。早以孝友著。晚以行義聞。偉然爲叔世之逸士。其事親也。怡色柔聲以樂其耳目。服勤就養以適其口體。先意承順以安其心志。前後喪。過於哀毁。情文無闕。園有好棰。以親之所嗜。終不忍入口。其處兄弟也。溫溫湛樂。析箸時。田取荒薄。器取朽敗。而推其品好者。以給其弟。仲父之子嘗犯還逋。公恐貽憂於仲父。潛賣已土以償之。有一妹晚有一子。公甚愛之。命抱還於家。育之敎之十餘年。如己出。此孝友之實。天性簡重沈默。終日如愚。淹貫經史而尤邃於。小學大學。文詞華而實。見識博而精。不以毁譽而爲喜怒。不以得失而爲舒慘。正言正色。人皆敬憚。嘗有人饋以錢物。公笑曰。古人不受四知金。今吾稚兒任側。豈非五知乎。一日自外還。見家中失火。見損不少盖女婢不謹致然。公顧謂婢曰。汝無所爛乎。終無一言。族戚知舊。吉凶慶弔。饑饉賙恤。隨時無闕。情禮俱洽。鄕邦庠塾之地。樽俎翰墨之場。所以出入風儀。左右酬應者。其威儀抑抑。言笑款款。令人怡然而心悅。肅然而心服。見乞客臨門。厚加施及。而矜惻之意。刑於色。此行義之實。庚申八月二十三日卒。距寅降辛酉得年爲六十。葬州南風流峙。後移于飛沙嶝負申原。呼嗚。余在童艸。侍先人側。得聞公之賢。歷歷如昨日。風樹孤露。今五十有餘年矣。昇平文物。鄕黨長德之風。不可得以復見。俯仰今古。只切無窮之悲而已。李氏貫光山。以勝朝尙書左僕射諱珣白爲登譜之祖。中葉有諱先齊。慶昌君號華門。諱調元。以隱逸累徵。至吏曹參議。號淸心堂。文學仕官。奕世相望。高祖必光贈掌樂院正。曾祖彦規贈吏曹正郞。祖永根贈戶曹參判。考先佑號筠軒。妣南平文氏祥奎女。公娶咸陽朴氏履兢女生四男一女。東漢文鎬贄鎬仁鎬。女適安義煥竹山人。孫承斗。孫女李赫曾李現圭。長房出。承奎李琪白裴漢淑二房出。承愚承一吳桂泳三房出。承祉承泰朴齊英孫士圭文其。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謁文者承愚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