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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초은 손공 유사장(楚隱孫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13
초은 손공 유사장
공의 성은 손(孫), 휘는 승경(承憬), 자는 사오(士悟), 호는 초은(楚隱)으로, 계통은 밀양(密陽)에서 나왔다. 시조 휘 구례마(俱禮馬)주 82)는 바로 모량(牟梁) 육부(六部) 대인(大人) 가운데 한 명이다.주 83) 신라부터 고려까지 유명한 재상과 대신이 빛나게 서로 이어졌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 책(策)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계경(季敬)은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이분이 낳은 휘 의화(義和)는 현감(縣監)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민(敏)은 현감을 지냈으며, 이분이 낳은 휘 비장(比長)주 84)은 호가 입암(笠巖)이고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을 지냈으니,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세기(世基)는 덕릉 참봉(德陵參奉)을 지냈고, 조부 휘 중로(重老)는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부친 휘 홍적(弘績)주 85)은 호가 도봉(道峯)으로 한림(翰林)에 있다가 대교(待敎)로 벼슬이 올랐는데, 을사년(1545)에 안명세(安名世)주 86) 공과 사국(史局)에 있을 때, 시사(時事)를 직필(直筆)했기 때문에 간사한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위원(渭原)으로 유배당하여 졸하였다.주 87) 그러나 선조(宣祖) 3년 경오년(1570)에 신원(伸冤)되고 복직되었으며, 부안 옹정원(甕井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모친 공인(恭人) 우주 황씨(紆州黃氏)는 진사 황언규(黃彦珪)의 따님으로, 곧고 조용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규문의 예의가 매우 잘 갖춰졌으니, 가정(嘉靖) 경자년(1540)에 부안 요촌(蓼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매하고, 재능과 국량, 뜻과 기개가 뛰어나고 출중하였다. 약관에 종숙 한계공(寒溪公)과 함께 일재(一齋)주 88)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을 때, 선생이 원대한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사화(史禍) 뒤에 깊이 통한(痛恨)을 품어 모친을 모시고 초산(楚山) 동쪽에 은거하면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농사지어서 맛있는 음식을 드렸고, 세로(世路)에 출신(出身)하여 나아가 벼슬을 구하려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선조조(宣祖朝)에 참봉(參奉) 벼슬로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년(1592)의 난에 적의 우두머리가 장차 전주(全州)를 침범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한계공 및 물재(勿齋) 안의(安義) 공과 함께 경기전(慶基殿)주 89)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을 받들고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에 이안(移安)하였는데, 조중봉(趙重峯)주 90)이 금산(錦山)에서 해를 입었다는 것을 듣고 격분을 견디지 못하였다. 정유년(1597)에 적의 세력이 다시 거세지자, 공이 한계공과 물재공에게 이르기를, "어진(御眞)의 봉안(奉安)을 내 장차 공들에게 맡길 것이니, 공들은 힘써 노력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의병 수천 인을 모아 행군하여 양성(陽城)에 이르러서 적을 맞아 온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굴하지 않고 죽었다. 가동(家僮) 차곡석(車曲石)과 이악금(李惡金) 등이 공이 순절(殉節)한 것을 보고 모두 적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으니, 바로 9월 5일이었다. 묘소주 91)는 정읍 용호동(龍虎洞) 앞 기슭 손좌(巽坐)의 언덕에 있고 묘갈(墓碣)이 있다. 부인 나주 나씨(羅州羅氏)는 참봉 나응기(應箕)의 따님이고, 계배(系配)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익정(金益精)의 따님이니, 아들 한 명은 진종(振宗)이고, 딸은 오충갑(吳忠甲)과 김지영(金地英)에게 출가했다. 손진종의 5남은, 영엽(永燁)·통훈(通訓) 영욱(永煜)·영환(永煥)·영형(永炯)·영위(永煒)이다. 영엽의 1남 처유(處裕)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고, 영욱의 2남은, 참의(參議) 세유(世裕)와 태유(泰裕)이며, 영환의 계자(系子)는 필유(必裕)이고, 영형의 2남은 필유와 후유(後裕)이며, 영위의 3남은 계유(繼裕)·성유(聖裕)·혜유(惠裕)이다. 4세손 봉문(鳳文), 5세손 연(縯), 6세손 경엽(景曄), 7세손 철우(哲宇)와 석량(鍚亮)은 모두 효행으로 널리 알려져 정려(旌閭)를 하사받았으니, 이는 공이 후손을 위하여 남겨준 계책이 미친 바가 아니겠는가. 공은 가학과 법불(法拂)주 92)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도덕과 연원이 있는 문하에서 종유하였으니, 평소에 영향받은 것이 있고 본성을 확충하여 양성하는 데에 방도가 있었다. 이때문에 비록 위태롭고 떠돌아다니는 상황에 있었지만 향상하는 일념(一念)은 단(丹)과 같이 환하였고, 자신이 끓는 물과 뜨거운 불 속으로 달려가는 데에 이르러서도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熊掌)을 취하여주 93) 백세(百世)의 강상(綱常)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다만 후손들이 영락(零落)하여 아직도 포증(褒贈)의 은전을 받지 못했으니, 그 식자들의 한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8세손 종순(鍾純)이 흰 머리에 늙은 나이로 고생스럽게 멀리서 건너와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삼가 가장(家狀)에 근거하여 수정하고 윤색하였다.
주석 82)구례마(俱禮馬)
신라 시대에 육촌(六村) 중의 하나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을 말한다. 대본에는 구례(俱禮)로 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용례에 근거하여 바로잡았다.
주석 83)시조……명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사로국(斯盧國)에는 원래 6촌이 있었는데, 그중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인 구례마가 처음에 이산(伊山)에 하강하여 점량부(漸梁部, 혹은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주석 84)손비장(孫比長)
?~? 자는 영숙(永叔), 부안 출신이다. 1469년(예종1) 예문관 수찬으로 있으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세조실록(世祖實錄)》 및 《예종실록(睿宗實錄)》을 편찬하였다. 1485년(성종16)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하고 이어 공조참의·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에 이르렀다.
주석 85)손홍적(孫弘績)
1510~1549. 자는 언선(彦善), 부안 출신이다. 1540년(중종35)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뒤 1543년(중종3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대교·승정원 주서 등을 지냈다.
주석 86)안명세(安名世)
1518~1548.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경응(景應 혹은 慶應)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4년(중종 3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예문관 검열 등을 지냈다.
주석 87)을사년(1545)에……졸하였다
1548년(명종3)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기(李芑) 등의 무고에 의하여 안명세사초사건(安名世史草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평안도 위원(渭原)에 유배당한 일이 있었다. 안명세는 1545년(인종1)에 이기·정순붕(鄭順朋)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많은 현신(賢臣)들을 숙청하자, 자세한 전말을 춘추필법에 따라 직필(直筆)한 시정기(時政記)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1548년(명종3) 이기 등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정순붕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인종실록(仁宗實錄)》·《명종실록(明宗實錄)》
주석 88)일재(一齋)
이항(李恒, 1499~1576)의 호이다.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항지(恒之)이다.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당시의 대학자인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질을 높였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주석 89)경기전(慶基殿)
대본에는 '肇慶廟'로 되어 있는데, 태조의 어진은 경기전에 있었으므로 바로 잡아 번역하였다.
주석 90)조중봉(趙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다.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이고 중봉은 그의 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700명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주석 91)묘소
대본의 '衣履之藏'은 시신을 거두지 못했을 때, 초혼장(招魂葬)을 하고 의복 등의 유품으로 장례을 치르는 것으로, 유골은 없다는 뜻이다.
주석 92)법불(法拂)
'법가불사(法家拂士)'의 줄임말로, 법도가 있는 세신(世臣)과 보필하는 현사(賢士)를 말한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들어가면 법도 있는 세신과 보필하는 현사가 없고, 나오면 적국과 외환이 없는 자는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라고 한 말이 나온다.
주석 93)물고기를……취하여
초은 손공이 정유재란 때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했다는 뜻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맹자가 "물고기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웅장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라고 한 말이 나온다.
楚隱孫公遺事狀
公姓孫。諱承憬。字士悟。號楚隱。糸出密陽。姓祖諱俱禮。卽牟梁六部大人之一也。自羅至麗。名公鉅卿。煒燁相承。入我朝。有諱策牧使。是生諱季敬。隱德不仕。是生諱義和縣監。是生諱敏縣監。是生諱比長號笠巖。文科重試副提學。卽公之高祖也。曾祖諱世基德陵參奉。祖諱重老忠順衛。考諱弘績號道峯翰林陞待敎。乙巳與安公名世在史局。以眞書時事。見忤群壬。竄渭原卒。宣祖三年庚午。伸枉復職。享扶安甕井院。妣恭人紆州黃氏進士彦珪女。貞靜柔嘉。壺儀甚備。嘉靖庚子生公于扶安之蓼村。天稟甚高。才局志槩穎脫不群。弱冠與從叔寒溪公。受業于一齋李先生之門。先生以遠器期之。史禍後。深懷痛恨。奉母夫人。隱居楚山之東。漁樵耕稼以奉其旨。未嘗出身世路以有干進之心。宣祖朝。以參奉屢微。不就。壬辰之亂。聞賊酋將犯全州。與寒溪公及勿齋安公義奉肇慶廟御眞。移安于井邑內藏山龍窟庵。聞趙重峯錦山被害。不勝憤激。丁酉賊勢更熾。公謂寒溪勿齋曰。御眞奉安。吾將委之於公。公其勉之。募義旅數千人。行至陽城。遇賊力戰。不屈而死。家僮車曲石李惡金等。見公殉節。皆赴賊而死。卽九月五日也。衣屨之藏。在井邑龍虎洞前麓巽坐原。有碣配羅州羅氏參奉應箕女。系配光山金氏益精女。一男振宗。女適吳忠甲金地英。振宗五男。永燁永煜通訓。永煥永炯永煒。永燁一男。處裕武科宣傳官。永煜二男。世裕參議。泰裕。永煥系子必裕。永炯二男。必裕後裕。永煒三男。繼裕聖裕惠裕。四世孫鳳文。五世孫縯。六世孫景曄。七世孫哲宇鍚亮。命以孝行聞。旋閭。此非公之貽謨攸及耶。公生於詩禮法拂之家。遊於道德淵源之門。擩染有素。充養有方。是以雖在顚沛流離之地。而向上一念。炳然如舟。至於身赴湯火。會魚取熊。使百世綱常。不墜於地。曷不偉哉。但雲仍零替。尙未蒙褒贈之典。其爲識者之恨何如哉。八世孫鍾純。白首頹齡。艱關遠涉。托以不朽之文。辭不獲已。謹據家狀。爲之修潤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