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동중추 고공 유사장(同中樞高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12
동중추 고공 유사장
공의 성은 고씨(高氏), 휘는 시련(時連), 자는 학천(學天), 호는 침암(沈庵)으로 계통은 장택(長澤 장흥(長興))에서 나왔으니, 제봉(霽峯) 충렬공(忠烈公) 휘 경명(敬命)주 77)은 공의 8대조이다. 증조 휘 한대(漢大)는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냈는데, 광주(光州)에서 남평(南平) 국사봉(國師峯) 아래 침동(沈洞)으로 우거(寓居)했고, 조부 휘 폭(曝)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정흔(廷欣)은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모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지린(金之麟)의 딸이니, 순조 갑자년(1804) 4월 2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골격이 훌륭하고 신체는 매우 크며, 총명하고 민첩하며 영리하여 범상(凡常)한 사람과 크게 달랐다. 6세에 입학하여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고, 7, 8세에 연달아 부모상을 당하여 가슴을 치고 발을 굴러 뛰며 울부짖어 거의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자, 본 자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부모를 잃고 의지하여 믿을 데가 없이주 78) 외롭고 쓸쓸하게 되자, 남의 집에 몸을 의탁하여 품팔이하면서 먹고 살았다. 어느 날 마을 아이들과 무리 지어 땔나무하고 가축을 먹였는데, 장난치며 노는 것을 하지 않고 가요(歌謠)의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비린내 나는 물건은 입에 넣지 않고 따뜻하고 두꺼운 옷을 몸에 걸치지 않았다. 한겨울 심한 추위에 알몸과 맨발로 품팔이를 갔는데, 어떤 사람이 불쌍히 여겨 두꺼운 명주로 만든 솜옷 하나를 주었는데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부모님의 체백(體魄 시신(屍身))이 아직 천토(淺土 임시로 매장한 무덤)에 있는데, 제가 어찌 차마 스스로 몸을 편안히 하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굳게 사양하여 받지 않자, 마을의 장로들이 모두 찬탄해 마지않고 서로 다투어 의연금을 내어 장례(葬禮)를 맡아서 해주었다. 제삿날이 돌아와 제사 지낼 집이 없자 제수(祭需)를 갖추어 산소 앞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밤새도록 울부짖고 곡하기를 한결같이 처음 상사(喪事)를 당했을 때처럼 하였고주 79), 곁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를 위해 보호하고 따라가서 밤을 꼬박 새웠다. 가정을 이루자 또 내규(內規)를 두었고, 힘써 부지런히 일하여 사력(事力 사세(事勢)와 물력(物力))이 조금 넉넉해졌다. 일찍이 여러 자식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 고아가 되어 어버이를 하루도 봉양한 적이 없다가, 이제 조상의 음덕에 힘입어 조금이나마 그런대로 의식을 댈 것이 있는데 봉양할 계책이 없으니, 이는 평생의 한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는 뒤늦게 봉양할 수 없고, 미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제사 지낼 때 그 정성을 다하는 것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사판(祀板)을 추조(追造)하고 사당을 세워 봉안(奉安)하여, 초하루와 보름, 봄과 가을, 비 오고 이슬 내리며, 서리 내리고 눈 올 때, 두려워하고 슬퍼하여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회갑 생일날이 돌아와 여러 자식이 헌수(獻壽)의 잔치를 베풀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마땅히 비통함이 배가 된다주 80)는 것은 옛사람의 가르침이 아니냐. 내가 일찍 고아가 되어 죽지 않고 오늘을 보니, 그 비통함이 어찌 다만 마땅히 배가 될 뿐이겠는가."라고 하고 굳게 만류하였다. 향리(鄕里)에서 그의 효에 감동하여 관사(官司)에 알리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실상 없는 이름으로 남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면, 이는 나의 불효를 무겁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힘써 저지하였다. 항상 일찍 고아가 되어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서당을 열고 서책을 쌓아 두었으며, 여러 자손을 가르칠 때에 과정(課程)의 법을 두었고, 안팎의 족척(族戚)은 화목으로 풍습을 이루었으며, 원근의 친구들은 신의(信義)로 행실이 드러났고, 우환으로 병든 친척은 구휼(救恤)하기를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때와 절기, 춥고 더울 때 변함없이 안부를 물었고, 혼인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매번 혼인에 필요한 물건을 갖추어 도와주었으며, 매장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매번 관곽(棺槨)을 갖추어 부의(賻儀)를 보내주었다. 늘그막에 능주 서쪽 봉학동(鳳䳽洞)에 터를 잡고 집을 지은 것은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사랑하여 한가롭게 지내면서 노년을 마치기 위해서였다. 수직(壽職)으로 동중추(同中樞)에 올랐고, 임오년(1882) 4월 8일에 세상을 떠나 국사봉 좌측 기슭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김동유(金裕女)의 따님이고 진사(進士) 김사직(金思直)의 손녀로 4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필진(弼鎭)·국진(國鎭)·영진(永鎭)·봉진(鳳鎭)이고, 딸은 정신규(鄭信奎)·문원보(文元保)·조사민(趙士玟)·구모(具某)·이규헌(李圭憲)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제운(濟雲)과 홍우환(洪佑煥)에게 출가한 손녀는 큰아들이 낳았고, 제방(濟邦)은 둘째 아들이 낳았으며, 제형(濟珩)과 제일(濟日)은 셋째 아들이 낳았고, 제신(濟紳)은 넷째 아들이 낳았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은 훼치(毀齒)주 81)의 나이로 부모를 모두 잃어 외롭고 고달프며 어리고 약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정경(情景)은 표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험난하고 질색(窒塞 막힘)한 곳에서 스스로 벗어나 능히 가계(家計)를 수립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계승했다. 이에 집안에는 자손의 번성함이 있었고 자신은 장수와 건강의 복을 누렸으며, 노인을 우대하는 은총과 영광이 하늘에서 떨어져 높은 관직과 높은 품계로 마을을 빛냈으니, 그 심력(心力)의 규범(規範)이 남보다 뛰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는가. 이는 하늘이 효성스럽고 유순한 사람을 도왔고, 신이 화락한 군자를 위로해주었기에 만년(晩年)의 복록이 이처럼 흘러넘친 것이다. 증손 익주(翊柱)는 넷째 아들이 낳은 손자로 나와 종유(從遊)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어느 날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공의 덕행을 후세에 영원히 전할 계획을 세웠다.
주석 77)고경명(高敬命)
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고, 금산에서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저서로는 《제봉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주석 78)부모를……없이
대본의 시(恃)와 호(怙)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믿는다는 뜻으로, 《시경》 〈육아(蓼莪)〉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겠는가.〔無父何怙? 無母何恃?〕"라고 하는 데서 나왔다.
주석 79)처음……하였고
대본에 '단괄(袒括)'이라고 되어 있는데, 단(袒)은 한쪽 어깨의 옷을 벗는 것이고, 괄(括)은 머리를 묶는 것이다. 이는 처음 부모의 상(喪)을 당했을 때 하던 예법으로,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주인이 소렴을 마치고 한쪽 어깨의 옷을 벗고 머리를 묶는다.〔主人旣小斂, 袒括髮.〕"라고 하였다.
주석 80)마땅히……된다
《이정유서(二程遺書)》 권6에 "부모가 살아계시지 않는 사람은 생일에 마땅히 비통함이 배가 되는데, 다시 어찌 차마 술상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만약 부모가 모두 살아 계신다면 그렇게 해도 괜찮다.〔人無父母, 生日當倍悲痛, 更安忍置酒張樂以爲樂? 若具慶者可矣.〕"라고 한 데서 나왔다.
주석 81)훼치(毀齒)
젖니가 빠지는 7, 8세쯤을 이르는 말이다.
同中樞高公遺事狀
公姓高氏。諱時連。字學天。號沈庵。系出長澤。霽峯忠烈公諱敬命。其八世祖。曾祖諱漢大司僕寺正。自光州寓居南平國師峯下沈洞。祖諱曝贈左承旨。考諱廷欣贈戶曹參判。皆以公貴也。妣贈貞夫人光山金氏之麟女。以純祖甲子四月二十三日生。公骨骼埈茂。身體碩大。聰敏潁悟。大異凡常。六歲入學。文理日就。七八歲連遭內外艱。擗踊啼呼。幾絶復甦。見者莫不濳涕。靡怙靡恃煢煢孤孑。遂托身人家。賣傭資食。日與村兒樵牧爲群。而不作嬉戱之遊。不聽歌謠之聲。腥躁之物。不入於口。溫厚之衣。不着於身。隆冬盛寒。裸跣行傭。有人憐之。賜一綈袍。公泣曰。二親體魄。尙在淺土。吾何忍爲自身安便計乎。固辭不受。里中長老。皆嘖嘖歎賞。競相出義。以營其葬。遇忌諱之辰。無室屋可以行祭。具祭品。尊於墓前。終夜號哭。一如袒括。傍人多爲之護行以守其夜。及其有室。又有內規。辛勤拮据。事力稍饒。嘗謂諸子曰。吾早孤。未有一日之養。今賴先蔭。粗有衣食之資。而逮養無計。此是終天之恨也。又曰。已沒之親。不可追養。所可追者。惟祭盡其誠而已。遂追造祀板。立廟以安之朔望春秋。雨露霜雪。怵惕悽愴以盡如在之誠。遇回甲晬日。諸子欲設獻壽之宴。公曰。富倍悲痛。非古人之訓乎。余早孤不死。得見今日。其爲悲痛。豈但當倍而已乎。固止之。鄕里感其孝。將聞于官司。公曰。以無實之名。欺人欺君。是重吾不孝也。遂力沮之。常恨早孤失學。開塾儲書。敎諸子孫。克有課法。內外族戚。雍睦成風。遠近知舊。信義著行。憂患疾戚。周恤備至。時節寒暄。問訊不替。有不能婚娶者。輒具資粧以助之。有不能葬埋者。輒其棺槨而賻之。晩年卜築于綾西之鳳䳽洞。愛其山高谷邃。爲養閒終老計。以壽陞同中樞。壬午四月八日考終。葬國師峰左麓艮坐之原。齊慶州金氏東裕女。進士思直孫也。擧四男五女。男弼鎭國鎭永鎭鳳鎭。女鄭信奎文元保趙士玟具某李圭憲。孫男濟雲。女洪佑煥。長房出。濟邦二房出。濟珩濟日三房出。濟紳四房出。曾孫以下不盡錄。嗚呼。公以毁齒之年。俱違怙恃。孤苦稚弱。情景難狀。而自拔於險難窒塞之中。能樹立家計。紹述世業。家有嗣續之蕃。身享壽康之福。優老恩榮。有隕自天。而嵬秩崇品。光輝閭里。其心力規範。非有以過人。何以致此。此所以天相孝順。神勞愷悌。而晩祿之津津有如是矣。曾孫翊柱四房孫也。從余遊有年。一日以其家狀過余。爲不朽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