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은곡 처사 배공 유사장(隱谷處士裴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11
은곡 처사 배공 유사장
공의 휘는 상섭(相涉), 자는 군방(君邦), 호는 은곡(隱谷)이니, 배씨는 문양공(文讓公) 휘 지타(祗沱)를 시조로 삼는다. 고려조에 휘 현경(玄慶)은 개국 원훈(開國元勳)으로서 벼슬은 태사(太師)이고 시호는 무열(武㤠)이다. 휘 운룡(雲龍)은 상국(上國)에 사신으로 가서 해동 군자(海東君子)로 일컬어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으니, 자손들이 이로 인해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휘 정지(廷芝)주 68)는 합단적(哈丹賊 원의 반란군)을 쳐서 물리쳤고, 탐라(耽羅)를 쳐서 평정했으며, 벼슬은 호부 상서(戶部尙書)와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지냈고, 원우(院宇)주 69)에 배향(配享)되었다. 휘 성경(成慶)은 벼슬이 통판(通判)인데, 아들 광유(光裕)와 함께 모두 홍의적(紅衣賊)과 싸우다 목숨을 바쳤고, 휘 문우(文祐)는 벼슬이 흥위위(興威衛)이고 호는 회은(晦隱)인데, 고려말에 망복(罔僕)주 70)하였다. 휘 두유(斗有)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찰방(察訪)이고 호는 우재(寓齋)인데, 단종(端宗) 말에 능성(綾城)에 은둔하였으며, 휘 상경(尙絅)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냈는데, 연산조(燕山朝)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휘 윤덕(允德)은 호가 빙연(冰淵)인데, 효행으로 천거되어 어필 서명(御筆書名)의 포상(褒賞)이 있었고 재랑(齋郞)에 제수되었으며, 휘 경생(慶生)은 진사(進士)로 호가 후송(後松)인데, 인조 갑자년(1624)에 의병을 일으켰으니, 공에게 8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종영(宗泳), 증조의 휘는 득효(得孝), 조부의 휘는 이현(以絢)이고 부친의 휘는 정채(廷綵)이다. 모친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이찬지(李贊之)의 따님으로 규문의 법도를 잘 갖추었고, 순조 경인년(1830) 윤4월 20일에 능주(綾州) 대곡리(大谷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얼굴빛이 좋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온량(溫良)하고 화락(和樂)하여 온화한 기운이 사람을 감화시켰다. 어려서부터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공을 사랑하는 한 이웃 노인이 공에게 희롱하는 말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어린아이에게 항상 속이지 않는 것을 보여야 하는데, 어찌 어른으로서 어린아이를 속인단 말입니까."라고 하자, 이웃 노인이 부끄러워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지만 온화한 얼굴빛으로 봉양하는 것[色養]을 모두 지극히 하였고, 집상(執喪)할 때 애훼(哀毁)하고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준행했으며, 제삿날이 돌아오면 치재(致齊)주 71)하고 산재(散齊)주 72)하여 살아계시듯이 대하는 정성을 다하였다. 형제 3인 가운데 공이 둘째인데, 위로 공손하고 아래로 우애하여 화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중년에 수동(壽洞)으로 옮겨가서 살았는데, 두문불출하여 자취를 감추고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깊이 감췄으며, 식구 수를 계산하여 밭을 경작하고 옷 입을 사람을 헤아려 누에를 쳤으며, 한가한 날에는 시가를 읊고 서적을 스스로 즐겼다. 겸손하고 온화함으로 몸가짐을 하고 근검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며, 친척을 구하여 도와주고 친구를 찾아가 안부 전하는 것을 제때에 빠뜨림이 없었다. 자손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올바른 도리로 하였고, 시문(時文)주 73)을 지어 벼슬을 구하려는 계획은 하지 않았다. 후생 가운데 초학자들을 보면 매번 묻기를 "《대학》은 읽었느냐? 이는 학문하는 전지(田地)이고 수신(修身)의 본령이니, 읽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맹자》의 '잡으면 보존된다.주 74)'라는 일구(一句)는 성현(聖賢)이 열어 보인 긴요한 말이니, 세상에서 무슨 일이건 마음이 보존되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라고 하였다. 평소에 무당을 쓰지 않았고 장기와 바둑을 대하지 않았으며,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고 권귀(權貴)를 만나보지 않았으며, 함께 종유(從遊)한 자들은 모두 향리(鄕里)에 사는 약간의 가난한 벗이었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대학》 및 《논어》 몇 편 읽기를 마치고, 집안사람들을 불러 면전에서 경계하고 가르쳤다. 그리고 또 손자들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사람답게 되는 도가 있으니 그 도를 잃으면 사람이 아니고, 선비에게는 선비답게 되는 업이 있으니 그 업을 잃으면 선비가 아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주 75)'라고 하였고, 또 '군자는 밥 한 끼를 먹는 사이에도 인(仁)을 떠나서는 안 된다.주 76)'라고 하였으니, 이 말을 너희들은 마음에 잘 새겨 평생의 생활신조로 삼아라."라고 하였다. 날이 밝아오려 할 때 갑자기 병에 걸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부축하여 베개에 누웠는데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무술년(1898) 9월 13일이다. 장사를 지냈다가 한천면(寒泉面) 산음(山陰) 증봉(甑峯) 아래 간좌(艮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인 남평 문씨(南平文氏)는 문익충(文益忠)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2남 5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경묵(慶黙)과 흥묵(興黙)이고, 딸은 문재황(文載璜)·정석규(鄭錫圭)·이계환(李桂煥)·이병채(李秉采)·임노성(林魯成)에게 출가했다. 아, 내가 동향(同鄕)에 있었기에 외람되이 알게 되어 끊임없이 서로 어울리면서 마음을 터놓고 속마음을 이야기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매번 그 용모는 조용하고 편안하며 그 말은 자상한 것을 보았고, 남에게 이익을 주고 사물에 은택을 끼치는 뜻은 성대하여 존경할 만하였다. 천진한 성품에 맡겨 분수를 지켜 담박하게 영위(營爲)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의리(義理)의 소재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탐하고 사모하며 욕심내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듯이 하였다. 이해득실을 따질 때에 묵묵히 분변하는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일의 실정에 익숙하고 세상일을 잘 알고 있었기에 원용(援用)하여 헤아려 의논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때와 어긋나 자신의 포부를 시험한 적이 없고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종신토록 빛을 감추었으니, 공의 입장에서야 본래 유감이 없겠지만 식자(識者)의 한은 어떠하겠는가. 공의 손자 규덕(奎悳)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불후(不朽)의 글을 부탁하였는데, 고금의 감회가 깊은 나머지 적임자가 아니다 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주석 68)배정지(裵廷芝)
1259~1322. 본관은 대구(大邱), 초명은 배공윤(裵公允), 자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이다. 1291년(충렬왕17)에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따라 합단적(哈丹賊)을 충청도 연기(燕岐)에서 크게 무찔렀다. 1318년(충숙왕5)에 상호군(上護軍)으로서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가 되어, 목사와 왕자를 추방하고 반란을 일으킨 제주민(濟州民) 사용(使用)·김성(金成)·엄복(嚴卜) 등을 토벌하고, 돌아와 밀직부사가 되었다. 나주의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
주석 69)원우(院宇)
고려 중기 이후, 서원(書院), 사우(祠宇), 정사(精舍), 영당(影堂) 등을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주석 70)망복(罔僕)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는 절조를 말한다. 《서경》 〈미자(微子)〉에 은(殷)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때 기자(箕子)가 "은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석 71)치재(致齊)
산재에 이어 안에서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72)산재(散齊)
제사 며칠 전에 밖의 일에 근신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73)시문(時文)
과거 답안에 쓰던 문체로, 팔고문(八股文)을 이르는 말이다.
주석 74)잡으면 보존된다
마음을 잘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잡으면 보존되고 놓아 버리면 없어지며,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일정한 때가 없고, 어디로 향할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이른 것이다.〔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75)아침에……좋다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주석 76)군자는……된다
《논어》 〈이인〉에 나온다.
隱谷處士裴公遺事狀
公諱相涉。字君邦。號隱谷。裴氏以文讓公諱祇沱爲始祖。麗朝有諱玄慶。以開國元勳。官太師諡武㤠。諱雲龍聘上國。稱海東君子。封達城君。子孫仍貫焉。諱廷芝。擊却哈舟。討平耽羅。官戶部尙書密直副使。配食院宇。諱成慶官通判。與子光裕。並殉於紅衣賊。諱文祐官興威衛號晦隱。麗季罔僕。諱斗有文科察訪號寓濟。莊陵末。遯居綾城。諱尙絅文科定州牧使。燕山朝。觧印歸鄕。諱允德號冰淵。以孝薦剡。至有御筆書名之褒。除齋郞。諱慶生進士號後松。仁廟甲子擧義旅。於公爲八世祖也。高祖諱宗泳。曾祖諱得孝。祖諱以絢。考諱廷綵。妣完山李氏贊之女。閫範甚備。純廟庚寅閠四月二十日。生公于州之大谷里第。好容顔。美鬚髥。溫良愷悌。和氣薫人。自幼不好戱狎。有隣老愛之。有戱語。公曰。幼子常視無誑。豈長者而誑幼子乎。隣老慚之。家貧躬耕。色養備至。執喪哀毁。一遵禮制。遇忌日。致齊散齊以致如在之誠。兄弟三人。公居其中。上恭下友。未嘗失和。中年移寓壽洞。杜門斂迹。深自韜晦。計口而田。度身而蚕。暇日諷詠書籍以自娛。持身謙和。御家勤儉。親戚賙恤。知舊問訊。隨時無闕。敎子孫必以義方。不爲做時文干祿計。見後生初學。輒問讀大學否。此是爲學田地。修身本領。不可不讀也。又曰。孟子操則存一句。是聖賢開示切要之言。曾見世間甚事有心不存而可爲者乎。平居不用巫覡。不對博奕。不入店肆。不見要貴。所與遊從。皆鄕里多少寒友生也.一日未明而起。讀大學及論語數篇訖。招家人而面戒喩。又招孫兒軰曰。人有爲人之道。失其道則非人也。士有爲士之業。失其業則非士也。孔子曰。朝聞道夕死可矣。又曰。君子無終食之間違仁。此言爾其服膺爲平生家計也。日將明。忽遘疾。左右扶之。就枕而逝。時戊戌九月十三日也。葬而移窆于寒泉面山陰甑峯下艮坐原。配南平文氏益忠女。有婦德。二男五女。慶黙興黙。文載璜鄭錫圭李桂煥李秉釆林魯成。嗚呼。余在同鄕。猥荷辱知。源源相尋。開懷話心。積有年所。每見其容也溫溫。其言也諄諄。利人澤物之意藹然可掬。任眞守分。澹然若無所營爲。而至有義理所在。則耽慕嗜欲。如恐不及。利害得失之際。默然若無所分辨。而練熟事情。曉解世故。所以援引而擬議者。皆鑿鑿有據。入與時違。未有所試。而婆娑林下。潛光沒齒。在公固無憾焉。而識者之恨爲何如哉。奎悳公之抱孫也。持家狀。託以不朽之文。緬古感仐。不敢以非其人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