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양한당 윤공 유사장(養閒堂尹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10
양한당 윤공 유사장
공의 휘는 방형(邦衡), 자는 완여(完汝), 계통은 파평(坡平)에서 나왔으니, 소정공(昭靖公) 휘 곤(坤)주 61)의 후손이다. 증조 동정(東貞)은 문학과 효우가 있어 세상에서 남호 처사(藍湖處士)라고 불렀고, 조부는 인탁(仁坼), 부친은 면은(勉殷)이고 호는 학암(學庵)이며, 생부는 중은(重殷)으로 정조 정사년(1797) 6월 1일에 남평(南平) 남석리(藍石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빼어난 외모에 총명하였고 타고난 자품은 뛰어났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모를 봉양할 때 지물(志物)주 62)을 모두 지극히 하였으며, 남은 힘으로 글을 배웠는데 이치를 연구함이 날로 향상되었다. 능주(綾州 화순(和順))로 장가가서 이로 인해 처가살이한 것은 외로이 형제가 적어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었다. 외로이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났지만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분명히 정해진 계획이 있었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려고 애쓰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집안일이 절로 안정되어 일과 재력이 점점 풀렸다. 고난 속에서 형통하고 우환(憂患) 속에서 살아 만년(晩年)에 먹고 쓸 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그 규모와 경영을 모두 본받을 만하다. 금오산(金鰲山) 아래 집을 지었는데, 삼경(三逕)주 63)에는 꽃과 대나무를 심고 네 벽엔 책을 가득 쌓아놓았으며, 날마다 평상복을 입고 그 사이를 소요하였다. 학규(學規)를 세워 마을의 수재들을 가르치고, 동약(洞約)을 세워 이웃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으로부터 상서(庠序)와 학교에 이르기까지 출입하는 풍의(風儀)와 좌우에서 지시하는 것은 고을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매번 여러 유생을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이 아니면 사람이 될 수 없고, 학문의 도는 다만 사람이 일상 생활하면서 마땅히 행하는 것이지만, 학문을 하지 않으면 그 이치의 소재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대학》의 8조목주 64)에서 격물(格物)과 치지(致知)가 처음이고, 《논어》의 사교(四敎)주 65)에서 문(文)과 행(行)이 우선한다."라고 하였다. 고을 원님 윤규석(尹奎錫) 공이 그 집을 '양한(養閒)'이라고 명명하였으니, 대개 그 뜻을 기록하여 칭찬한 것이다. 계유년(1873) 8월 13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여 고을 동쪽 부춘면(富春面) 대억동(大億洞) 병좌(丙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 풍산 홍씨는 홍일우(洪一禹)의 따님이고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의진(誼鎭)이고 딸은 송규진(宋奎鎭)에게 출가했다. 의진은 8촌 의진(儀鎭)의 아들 자영(滋英)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고, 딸은 양성종(梁性鍾)에게 출가했다. 자영은 4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상의(相義)·상석(相奭)·상호(相浩)·상연(相淵)이고, 딸은 홍돈희(洪敦憙)에게 출가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아, 나의 선인 3명의 형제가 건복(巾服 옷과 갓)과 장구(杖屨 지팡이와 신) 차림으로 서로 왕래할 때마다 먹고 마시며 웃고 담소하면서 지극히 정겨웠는데, 어찌 상해(桑海)주 66)의 광경이 갑자기 눈앞에 있게 되며 쓸쓸한 여생도 또 몽범(濛氾)주 67) 시절에 이를 줄을 알았겠는가. 예와 지금을 돌아봄에 슬픈 감회를 견디지 못하여 이에 상의의 요청에 끝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61)윤곤(尹坤)
?~1422. 젊어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아우 윤향(尹珦)과 함께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세종은 윤곤이 학덕이 높은 것을 알고 침전에서 환송연을 베풀어주는 등 크게 총애하였다.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주석 62)지물(志物)
지(志)는 양지(養志)로 부모의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해드리는 것을, 물(物)은 의복과 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63)삼경(三逕)
은사(隱士)의 뜨락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은사 장후(蔣詡)가 뜨락에 송(松)·국(菊) 죽(竹)을 심은 뒤에 오솔길 세 개[三逕]를 만들어 놓고 오직 양중(羊仲)과 구중(求仲) 두 사람과 교유하며 노닐었다는 고사가 있다. 《三輔決錄 逃名》
주석 64)8조목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주석 65)사교(四敎)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는 네 가지로 가르쳤으니, 문(文), 행(行), 충(忠), 신(信)이다.〔子以四敎, 文行忠信.〕"라고 하였다.
주석 66)상해(桑海)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준말로,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될 정도로 세상이 몰라보게 바뀌었다는 뜻이다.
주석 67)몽범(濛氾)
만년(晩年)을 말한다. 몽범은 해가 지는 곳으로, 《초사(楚辭)》 〈천문(天問)〉에 "해가 양곡(暘谷)에서 나와 몽범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養閒堂尹公遺事狀
公諱邦衡。字完汝。系出坡平。昭靖公諱坤后。曾祖東貞。文學孝友。世稱藍湖處士。祖人坼。考勉殷號學庵。生考重殷。正宗丁巳六月一日。生公于南平藍石里。秀爽穎悟。天姿不群。居貧養親。志物俱至。餘力學文。硏理日就。委禽于綾州地。因以贅寓。盖孤露終鮮。無以爲計也。煢煢漂泊。百苦拂亂。而凡百料理。的育成算。未嘗見其有後役之私。而家務自集。事力稍舒。其所以亨於險阻。生於憂患。爲晩景餉用之地者。其規模經紀。皆可爲法築室金鑿山下。三逕花竹。四壁圖書。日以便服。逍遙其間。立學規以課村秀。設洞約以和隣保。以至庠序學校之地。爲出入風儀。左右指晝者。未嘗不爲鄕人之倚重焉。每誨諸生曰。人生斯世。非學問。無以爲人。而學問之道。只是人生日用所當行者但不學問無以知其理之所在。故大學八條。格致爲始。論語四敎。文行在先。州倅尹公奎錫題其室曰養閒。盖志其意而嘉之也。癸酉八月十三日卒于正寢。葬州東富春面大億洞丙坐之原。配豐山洪氏一禹女。一男一女。男誼鎭。女適宋奎鎭。誼鎭取三從儀鎭子滋英爲後。女適梁性鍾。滋英四男二女。男相義相奭相浩相淵。女適洪敦憙。餘幼。嗚呼。我先人三昆季。巾服杖屨。每相經過。飮食笑語。極其款款。豈知桑海光景。遽在目前。而孤露餘生。又是濛氾時節耶。俯仰今古。不勝悲感之私。玆於相義之請。有不敢終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