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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계암 박공 유사장(溪庵朴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09
계암 박공 유사장
호남은 문헌(文獻)의 땅으로 유현들이 배출되었으니, 고(故) 왕자 사부(王子師傳) 문강공(文康公) 죽천(竹川)주 57) 박 선생은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다. 선생의 후손 휘 형덕(馨德) 은 호가 완이당(玩易堂)인데 선생이 가정에서 전한 것을 얻어 산양(山陽)의 서쪽에서 도를 강하자, 사방의 학자들이 그 문하에 나아가 자신의 학업을 마친 자가 많았으니, 근고(近故)의 계암(溪庵) 박공도 그중 한 사람이다. 공의 휘는 재무(載茂)이고 자는 내실(乃實)이니, 바로 죽천 선생의 8세손이고 완이당에게는 족질이 된다. 정조 정유년(1777) 9월 19일에 관산(冠山) 삼수리(三水里)에서 태어났는데, 타고난 자품이 총명하고 재기(才器)가 민첩하고 풍부하였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배울 때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공령(功令 과거에 사용하는 시문)과 시격(時格) 및 문장의 각 체에 이르러서는 모두 그 정밀함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자, 사원(詞垣)에서 으뜸으로 추앙하여 훌륭한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다. 어느 날 개연(慨然)히 탄식하며 "유문(儒門)의 사업은 따로 있는데 문사(文詞)를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완이당 선생을 가서 찾아뵙고 학문하는 절도를 들었다. 이때부터 마음을 비워 뜻을 겸손하게 하였고, 전심으로 노력을 다하여 의리(義理)의 깊은 뜻에 침잠하고 본원(本原)의 요점을 잡고 보존하였으며, 연마하고 무젖으며 쌓고 확충시켜 나아가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할 때와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할 때에도 법도를 따라 일찍이 허물이 있지 않았다. 부모를 섬길 때에 충심으로 극진히 봉양하였고 집상(執喪)할 때에 애훼(哀毁)주 58)가 매우 지나쳤으며, 3명의 아우와 화락하고 즐겁게 지내면서 있고 없는 것을 함께하였다. 평소에 옷깃을 바로 하고 바르게 앉아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공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비록 아이들과 비천한 무리일지라도 따뜻한 말로 자상하게 타일러 성난 목소리를 가하지 않았다. 생도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치지(致知)와 거경(居敬)으로서 체험하고 실천하여 차근차근 잘 이끌어 주었으니 분명한 성규(成規)가 있었다. 을미년(1835) 3월 6일에 고종명(考終命)하여 살았었던 마을 오른쪽 학송산(鶴松山)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본관은 진원(珍原)이니, 직제학 위남 선생(葦南先生) 휘 희중(熙中)주 59)은 바로 국초(國初)에 세상에 이름이 높이 드러난 선조이다. 선비와 고관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고, 6대를 전해 내려와 휘 광전(光前)에 이르렀으니, 바로 죽천 선생이다. 참봉 만하(萬廈)·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된 무석(武鍚)·좌승지에 추증된 수원(守遠)·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장근(章根)은 바로 고조 이하 4대의 휘함(諱銜)이다. 모친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장세준(張世浚)의 따님이고, 계비(系妣) 인천 이씨(仁川李氏)는 이진계(李震啓)의 따님이며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으니, 공은 바로 장씨의 소생이다. 공의 부인 보성 선씨(寶城宣氏)는 선정덕(宣廷德)의 따님이고 2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중흥(重興)과 중회(重會)이고 딸은 관산(冠山) 임채환(任采煥)·진주(晉州) 정방형(鄭邦亨)·진주 정순충(鄭淳忠)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길현(吉鉉)과 명현(命鉉)이며, 증손은 태경(泰敬)·태정(泰禎)·태업(泰業)·태과(泰科)이다. 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사람이 된 까닭은 과연 무슨 일이겠는가. 이는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죽고 난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 성함과 쇠함, 빈궁과 영달에 이르러서는 시운(時運)에 따라 우연히 오는 것이니, 그 사람을 논하는 방도가 아니다. 공은 덕망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라서 일찍 스스로 스승을 만나 문로(門路)가 바르고 분명하였으며, 출입하면서 몸에 배어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훌륭하게 이처럼 수립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최고의 사업이고 생순사안(生順死安)주 60)한 곳이다. 비록 바닷가 궁벽한 마을에 묻혀 살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나에게 있는 것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남긴 여운과 남은 향기가 전해져 사람들에게 있으니, 백세토록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할만하다.
주석 57)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호이다.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568년(선조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주석 58)애훼(哀毁)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몹시 슬퍼해서 몸이 허약해진 것을 말한다.
주석 59)박희중(朴熙中)
1364~1446. 본관은 진원(珍原), 초명은 박희종(朴熙宗), 자는 자인(子仁), 호는 위남(葦南)이다. 1406년(태종6) 군자감승(軍資監丞)으로 전라도경차관(全羅道敬差官)에 임명됐고, 이어 세자부(世子傅)·좌정자(左正字), 이듬해에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왕으로부터 사명(賜名)의 은전을 입었다.
주석 60)생순사안(生順死安)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살아서는 내가 천리에 따라 순하고, 죽어서는 내가 편안하리라.〔存吾順事, 沒吾寧也.〕"라고 나온다.
溪庵朴公遺事狀
湖南文獻之地。儒賢軰出。故王子師傅文康公竹川朴先生。卽其一世。先生後孫。諱馨德號玩易堂。得先生家庭之傳。講道于山陽之西。四方學者。多就其門。而卒其業者。近故溪庵朴公。亦其一也。公諱載茂。字乃實。卽竹川先生八世孫。在玩易堂爲族姪也。正宗丁酉九月十九日。生于冠山之三水里。天姿穎悟。才器敏贍。就傳上學。文理日進。至於功令時格。筆翰各體。無不俱極其精。詞垣推先。聲華藉甚。一日慨然歎曰。儒門事業。自有所在。文詞奚爲。遂往謁玩易堂先生。得聞爲學節度。自是虛心遜志。專意致力。沈潛乎義理之藴。操存乎本原之要。磨礱浸灌。積累展拓。一動一靜一。語一默。遵循規矩。未嘗有過。事父母。忠養備至。執喪哀毁過甚。與弟三人。怡怡湛樂。有無共之平居正衿危坐。不見有怠慢之容。平心率物。不見有暴戾之色。雖在兒侄卑賤軰。溫言諄諄。不以厲聲加之。訓進生徒。必以致知居敬。體驗踐履。循循提誘。的有成規。乙未三月六日考終。葬所居村右鶴松山子坐原。公本珍原人。直提學葦南先生諱熙中。卽國初顯祖也。衿紳簪纓。奕世不絶。六傳至諱光前。卽竹川先生也。參奉萬廈。贈司僕寺正武鍚。贈左承旨守遠。贈戶曺參判章根。卽高祖以下四世諱御也。妣興德張氏世浚女。系妣仁川李氏震啓女。皆贈貞夫人。公卽張氏出也。公配寶城宣氏廷德女。生二南三女。曰重興重會。冠山任采煥晉州鄭邦亨晉州鄭涼忠也。孫曰吉鉉命鉉。曾孫曰泰敬泰禎泰業泰科也。嗚呼。人生斯世。其所以爲人者。果何事耶。此是風夜勉勉。死而後已者也.至於陞沈窮通。時爾適爾。非所以論其人也。公生長德門。早自得師。門路端的。出入擩染以至文學行誼偉然樹立如此。此是太上事業。生順死安處。雖沈溣海曲。世不見知。而何損於我之有哉。遺韻餘芬。傳之在人。足令百世起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