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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운와 처사 정공 유사장(贈童蒙敎官朝奉大夫雲窩處士鄭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08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운와 처사 정공 유사장
아, 호남에 사는 우리 종족은 그 숫자가 적지 않지만, 문망(門望)과 가운(家運)이 영락(零落)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었다.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로 알려지고 인망이 있으면서 근세에 훌륭한 자는 오직 운와(雲窩)주 40) 처사일 것이다. 공의 휘(諱)는 홍규(弘規), 자는 사건(士建)이다. 정씨는 계통이 광주(光州)에서 나왔고, 고려 찬성(贊成) 휘 신호(臣扈)주 41)를 비조(鼻祖 시조(始祖))로 삼는다. 대대로 높은 벼슬과 문학으로 이름난 사람이 있었다. 국조(國朝) 중엽에 이르러서 휘 질(晊)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휘 응종(應鍾)주 42)은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휘 서(犀)주 43)는 지평(持平)을 지냈고, 휘 인녕(仁寧)주 44)은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휘 만근(萬謹)은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으니, 이들은 공의 5대 이상이다. 고조 휘 금(錦)은 참의(參議)에 추증되었고, 증조 휘 득생(得生)은 벼슬이 별제(別提)이고 참판(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시익(時益)은 수직(壽職)주 45)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고, 부친 휘 광훈(光勳)은 호가 남당(南堂)인데 은덕(隱德)이 있어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모친 숙부인(淑夫人)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김세위(金世緯)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고, 모친 숙부인 천안 전씨(天安全氏)는 전익겸(全益謙)의 따님으로 온화하고 인자하며 고요하고 아름다워 규문(閨門)의 법도를 잘 갖추었으니 영종(英宗) 계유년(1753) 12월 26일에 나주의 거평리(居平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7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전씨가 하종(下從)주 46)을 결의(決意)하여 전혀 음식을 드시지 않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간하여 마침내 정성으로 감동시켜 모친의 마음을 돌렸다. 평소에 시봉(侍奉)할 때 정성과 삼감을 모두 다하였고, 앉고 먹으며 나아가고 물러날 때 명령하지 않으면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하루는 모친에게 묻기를 "선고(先考)께서 살아 있을 때 무슨 일을 업으로 삼았습니까?"라고 하니, 모친이 "서책을 읽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 사람들이 훌륭한 선비라고 칭송하였다."라고 하였다. 공이 이를 듣고 눈물을 떨구며 "소자가 마땅히 선업(先業 선대의 기업(基業))을 계승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스승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이고 게을리하지 않아 성동(成童 15세가 된 사내아이)에 이르러 경사(經史)를 모두 통달하고 사조(詞藻 시가(詩歌)나 문장)가 문채나고 아름다웠다. 관례를 올린 뒤에는 원근의 훌륭한 명망이 있는 사우(士友)들과 종유하여 연마하고 담금질하여 더욱 확충시켜 나아갔다. 유학(遊學)하여 밖에 있더라도 반드시 열흘에 한 번은 모친을 찾아뵈었는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고,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반드시 이를 저장해두었다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드렸다. 부모를 위해 과거에 응시했으나 득실(得失)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 정문(程文)주 47)을 급선무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고인(古人)의 학문하는 차례에 따라 가르쳤다. 모친상을 당했을 때 불훼(不毁)의 나이로 극도로 몸을 훼손하는 데에 잘못하였고,주 48) 생강과 계피주 49)를 입에 넣지 않았고, 최마복(衰麻服)주 50)을 몸에서 벗지 않았으며, 곡읍(哭泣)하는 소리가 여막(廬幕)에서 끊어지지 않았는데 3년을 하루처럼 하였다.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애통해하는 것이 조괄(祖括)주 51)하는 때와 다름이 없었고, 아침마다 사당에 참배하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분묘(墳墓)에 전배(展拜)하였으며, 중월(仲月)주 52)에는 시제(時祭)를 행하였고, 제사를 지낸 뒤에 자손들에게는 《소학》과 《대학》을, 부녀(婦女)들에게는 〈내칙(內則)〉과 《열녀전(列女傳)》을 강하였으니, 내외가 엄격하여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말년에 한 구역에 서사(書社)를 지어 '운와(雲窩)'라고 편액하고 이곳에서 쉬기도 하고 유유자적하기도 하였으니, 앞으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는 것도 알지 못했다. 글 36편을 지어 '《운와경필(雲窩警筆)》'이라 하였는데, 그 수신(修身), 제가(齊家)의 도와 사람과 사물에 대응하는 방법은 성현이 남긴 경전을 보좌하여 이 세상을 도와 보탬이 될 수 있으니, 공의 포부와 조예도 이러한 데에서 그 대략적인 줄거리를 대강 짐작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헌종(憲宗) 병신년(1836) 11월 28일에 고종명(考終命)하였으니 향년 84세이고, 백룡산(白龍山) 서쪽 기슭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35년 뒤 경오년(1870) 봄에 도내의 유생 조철호(趙喆浩) 등이 조정에 공을 천거하는 내용으로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고, 가을에 정려(旌閭)를 명하였으며, 노사(蘆沙)주 53) 기 선생(奇先生)이 이에 대한 기문(記文)주 54)을 지었다. 부인 영인(令人)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양엽(李陽燁)의 따님이니 2남 2녀를 낳았고, 계배(系配) 영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는 이희조(李希祚)의 따님이다. 장남은 정운보(鄭運普)이고 다음은 정운호(鄭運昊)인데 효우(孝友)로 세상에 알려져 지평(持平)에 추증되었으며, 장녀는 수원(水原) 최광발(崔光發)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언양(彦陽) 김원택(金元澤)에게 출가했으며, 손자와 증손 이하 약간 명이 있다. 아, 출중하고 비상한 재능으로 일찍 스스로 깨달아 독서를 궁리하고 격물[窮格]하는 문으로 삼고, 경을 주로 하는[主敬] 것을 지수(持守)의 근본으로 삼았다. 궁격(窮格)을 오래 함에 조리와 두서가 모두 두루 미치고, 지수를 익숙히 함에 법도가 굳게 안정되었으며, 이를 가정에 시행함에 효제(孝悌)가 일어나 행해지고, 이를 고을과 나라에 미루어 감에 신의(信義)가 드러났다. 그런데도 광휘(光輝)를 감추고 천진한 성품대로 분수를 지켜 구림(邱林)의 한적한 물가에서 한가로이 이리저리 거닐면서 인간 세상에 천사만종(千駟萬鐘)주 55)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 훌륭한 운치와 뛰어난 자취는 우리 가문 일대(一代)의 명석(名碩)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남쪽 지방에서 백 년 동안 유림(儒林)의 모범이 될 만하다. 신축년(1901) 봄에 현손 정위석(鄭暐錫)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나를 찾아와 인하여 한마디 부탁하는 말을 하였다. 내가 공경히 받아 삼가 보고 일어나서 "기 선생(奇先生)이 이미 저술한 것이 있고, 여력재(餘力齋)주 56) 장 선생(張先生)이 또 그 유서(遺書)에 발문(跋文)을 지었으니, 천만세(千萬世) 영원한 공안(公案 관공서의 문안(文案))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어찌 가문 안의 보잘것없는 한 후생(後生)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현자를 사모하고 덕을 좋아하는 것이 다른 사람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한 가문에서 철식(綴食 배향(配享))하는 상황에 있는 자에게는 어떠하겠는가. 공에게는 진실로 족히 만분의 일도 기릴 것이 못 되지만, 보잘것없는 여생(餘生)의 입장에서는 말광(末光)에 의지할 것을 사모하는 마음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40)운와(雲窩)
정홍규(鄭弘規, 1753∼1836)의 호이다. 7세에 부친을 잃고 모친에게 효도를 극진히 하면서 학업에 열중했다. 그는 서사(書社)를 지어 '운와'라 이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사후에 고종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동몽교관을 증직했다. 문집으로 《운와유고(雲窩遺稿)》가 있다.
주석 41)정신호(鄭臣扈)
광주 정씨(光州鄭氏)의 시조로, 고려말 충선왕(忠宣王)과 충숙왕조(忠肅王朝)에 걸쳐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봉은사 진전직(奉恩寺眞殿直)으로 삼중대광 문하찬성사(三重大匡 門下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추봉되었다.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을 광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주석 42)정응종(鄭應鍾)
?~? 자는 자행(子行), 호는 퇴은재(退隱齋)이다. 부친은 참봉(參奉), 병조정랑(兵曹正郞) 정질(鄭晊)이다. 연산군(燕山君) 때 경연(經筵)에서 시폐(時弊)를 아뢰었고 정란(政亂)을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시주(詩酒)를 즐기며 유연자적(悠然自適)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주석 43)정서(鄭犀)
?~? 자는 비연(斐然)이다. 중종(中宗) 11년(151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주석 44)정인녕(鄭仁寧)
1519~? 중종 39년(1544) 갑진(甲辰) 별시(別試)에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주석 45)수직(壽職)
해마다 정월에 80세 이상의 관원과 90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이다.
주석 46)하종(下從)
아내가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47)정문(程文)
과거 볼 때 쓰는 일정한 법식의 문장이다.
주석 48)불훼(不毁)의……잘못하여
이는 거상(居喪)하는 예절을 말한 것으로,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에 "50세가 되면 몸을 극도로 훼손하지 말고, 60세가 되면 몸을 훼손하지 말며, 70세가 되면 몸에 최마(衰麻)의 상복(喪服)을 입을 뿐,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집 안에서 거처한다.〔五十不致毁, 六十不毁, 七十唯衰麻在身, 飮酒食肉, 處於內.〕"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49)생강과 계피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들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되 반드시 초목의 양념도 있어야 한다.'라고 했으니, 생강과 계피를 말한 것이다.〔曾子曰: '喪有疾, 食肉飮酒, 必有草木之滋焉,' 以爲薑桂之謂也.〕"라고 한 말이 나온다.
주석 50)최마복(衰麻服)
부모의 상을 당한 상주가 입는 거친 베로 만든 상복이다.
주석 51)조괄(祖括)
초상을 치르는 법도이다.
주석 52)중월(仲月)
각 계절의 가운데 달로, 음력 2월, 5월, 8월, 11월을 이른다.
주석 53)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호이다. 이학 6대가의 한 사람이며,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였다. 본관은 행주이고, 자는 대중(大中)이다. 저서로는 《납량사의(納凉私義)》·《노사문집(蘆沙文集)》 등이 전한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석 54)기문(記文)
《노사집(蘆沙集)》 권22에 〈효자 운와 정공 정려기(孝子雲窩鄭公旌閭記)〉가 실려 있다.
주석 55)천사 만종(千駟萬鐘)
4천 마리의 말과 1만 종의 많은 녹(祿)이란 뜻으로, 부귀함을 뜻한다.
주석 56)여력재(餘力齋)
장헌주(張憲周, 1777~1867)의 호이다. 자는 유장(幼長)이다. 1777년(정조1) 9월 27일 나주  다시면 송촌리(松村里)의 구제(舊第)에서 태어났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에게 수학했다.
贈童蒙敎官朝奉大夫雲窩處士鄭公遺事狀。
嗚呼。吾宗之居在湖南者。其麗不尠。而門望家韻之零替不振。垂二百餘年于茲矣。若其文學行義之有聞有望。而偉然於近世者。貴惟雲窩處士乎。公諱弘規。字士䢖。鄭氏系出光州。以高麗贊成諱臣扈爲鼻祖。簪纓文學。世有聞人逮至國朝中葉。贈左賛成諱晊。判書諱應鍾。地平諱犀。掌令諱仁寧。贈掌樂院正諱萬謹。寔公五世以上。高祖諱錦贈參議曾祖諱得生官別提贈參判。祖諱時益壽資憲。考諱光勳號南堂。有隱德。贈承旨。妣淑夫人光山金氏世緯女。無育。妣淑夫人天安全氏益謙女。溫仁靜嘉。閨範甚備。以英宗癸酉十二月二十六日。生公于羅之居平里第。七歲遭外艱。全氏決意下從。絶不進飮食。涕泣苦諫。卒以感回親意。平居侍奉。備盡誠謹。坐食進退。不命不敢。一日問于母氏曰。先考在。世所業何事。母氏曰。讀書勅行。人稱善士。公聞之泫然曰。小子當繼述先秦。自是就博受學。刻苦不懈至成童。淹貫經史。詞藻斐蔚。旣冠追從遠近士友有雅望者。磨礱浸淬。以益展拓。遊學在外。必十日一覲。風雨不廢。遇美味。必儲而藏之。待歸而供焉。爲親應擧。不以得失經心。敎生徒。亦不以程文爲急。必依古人爲學之序而授之。遭內艱也。以不毁之年。而過於致毁。薑桂之滋。不入於口。衰麻之服。不釋於身。哭泣之聲。不絶於次。三年如一日。遇忌日。哀痛無異祖括時。每朝謁廟。朔望展墳。仲月行時祭。祭後講子孫以小大學。講婦女以內則列女傳。內外斬斬無有間言。晩築書社一區。扁以雲窩。遊焉息焉。不如年數之不足。著者三十六編。名曰雲窩警筆。其修身齊家之道。酬人應物之方。可以羽翼乎遺經。而裨補乎斯世。公之抱負造詣。亦可卽此而領略其梗槩矣。以憲宗丙申十一月二十八日考終。享年八十四。葬于白龍山西麓甲坐原。後三十五年庚午春道內儒生趙喆浩等剡聞于朝贈童蒙敎官。秋命旋閭。蘆沙奇先生撰其記。配令人陽城李氏陽燁女。擧二男二女。系配令人咸平李氏希祚女。男長運普。次運昊。孝友聞世。贈持平。女長適水原崔先發。次適彦陽金元澤。孫曾以下若干。嗚呼。以若出類不常之才。早自覺悟。以讀書爲窮格之門。以主敬爲持守之本。窮格之久而條緖該浹。持守之熟而規秬堅定。施之家庭而孝悌興行。推之鄕邦而信義著聞。潛光蘊輝。任眞推分。婆娑徜徉於邱林閑寂之濱。而不知入間世有千駟萬鍾之樂也。其偉韻遐躅。不惟爲吾門一代之名碩。而亦可爲南土百年間儒林之標範也。歲辛丑春。玄孫暐錫奉家狀過余。因有一言之託。余祇受而謹閱之。作而曰。奇先生旣有所述。餘力齋張先生又跋其遺書矣。千萬世不朽之公案。無過於此。何待乎門內渺藐一後生之言哉。雖然慕賢好德。他人猶然。況在一門綴食之地。而爲何如耶。在公固不足爲揄揚之萬一。而在區區餘生。思附末光之情。有不能自己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