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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증 병조참판 행 군자감 주부 백담 최공 유사장(贈兵曹參判行軍資監主簿柏潭崔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06
증 병조참판 행 군자감 주부 백담 최공 유사장
공의 성은 최(崔), 휘는 여호(汝箎), 자는 대숙(台叔), 호는 백담(柏潭)으로 낭주(朗州) 사람이다. 휘 지몽(知夢)이라는 분은 동래후(東萊侯)에 봉해지고 시호가 민휴(敏休)인데, 그의 비조이다. 휘 안우(安雨)는 우리 조정에 군기소감(軍器小監)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운(雲)은 호가 덕암(德庵)이며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여러 세대를 내려와 휘 추(湫)는 호가 난계(蘭溪)이며 호조 참판을 지냈고, 이분이 낳은 휘 치호(致湖)는 호가 상덕재(尙德齋)이며 좌승지를 지냈는데,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결(潔)로 참봉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 경남(慶男)으로 판관을 지냈고, 아버지 정언(廷彦)은 별제(別提)를 지냈다. 어머니는 장흥 위씨(長興魏氏) 형(衡)의 따님이다. 생부는 휘가 정준(廷俊)이며, 생모는 청주 한씨(淸州韓氏) 희열(希烈)의 따님이다. 사나운 호랑이가 뜰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공을 낳았으니 바로 만력(萬曆) 임진년(1592, 선조25) 1월 5일이다. 공은 풍골(風骨)이 빼어나고 지기(志氣)가 크고 넓어 어려서부터 아이들과 놀이를 할 때에 대열을 나누고 대오를 지어 포진(布陣)과 행군(行軍)의 의식을 행하였는데 뭇 아이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다. 서당에 나아가 글을 읽고 남은 날에는 병략(兵略)을 함께 익혔는데, 일찍이 《한서(漢書)》를 읽다가 '마혁과시(馬革裹尸)'주 22)에 이르러서는 책상을 치고 탄식하기를, "대장부라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붓을 던지고 무과에 합격하였다. 시험에 임하여 병서를 강론하고 책략을 변론하니 여러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정도였는데, 감독관이 높은 점수에 뽑아 두며 말하기를, "이번 시험에서 간성(干城)의 재목을 얻었구나."라고 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에 금나라 사람들이 의주를 함락하자 거가(車駕)가 강도(江都)로 거둥하였다. 공은 주부(主簿)로 원사(元師) 남이흥(南以興)주 23)을 따라 안주(安州)에 이르러 백상루(百祥樓)주 24) 아래에서 진을 치고 앞장서 공격하여 적을 무수히 살상하자 적들이 줄줄이 무너지며 물러났는데, 얼마 뒤 적들이 병력을 총동원해서 이르자, 공은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굴복하지 않고 전사(戰死)하였다. 다만 종과 말만이 그 집으로 돌아와서 지동(枝洞) 뒤 기슭 계좌(癸坐)의 언덕에 의리장(衣履葬)주 25)하였다. 공훈을 기록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일이 「정묘록(丁卯錄)」과 강화충절비(江華忠節碑)에 실렸다. 부인은 남원 여씨(南原盧氏) 사양(士良)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사 상률(尙嵂)과 참봉 상업(尙嶪), 문과 급제한 상헌(尙巘)과 생원 상억(尙嶷)이며, 딸은 이환(李晥)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한제(漢齊)이고, 둘째 집의 손자는 한우(漢宇), 한주(漢宙)이며, 셋째 집의 손자 한진(漢軫)은 효행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넷째 집의 손자는 참봉을 지낸 한익(漢翼)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금나라가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중국을 삼킬 뜻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먼저 병력을 동원한 것은 우리나라가 그 허점을 틈타 그 뒤를 밟게 될까 두려워서였다. 당시 의주(義州)의 전투에서 김완(金菀)의 순국이 없고, 안주의 전투에서 만약 공과 김준(金浚)주 26) 등 여러 현인들이 순절한 일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대한 치욕은 굳이 연장되어 병자년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주 27) 명실(明室)의 옥사(屋社)의 화(禍)주 28)는 굳이 갑신년주 29)에 멀리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이 성취한 바는 한 시대와 한 나라의 공이 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의리가 또한 백세(百世)에 찬란히 빛나 길이 전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후손이 영락하여 유적이 산일되었으니 이것이 개탄스럽다. 10세손 동민(東珉)과 동섭(東燮)이 가장을 가지고 와서 행장을 부탁하니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석 22)마혁과시(馬革裹尸)
'말가죽에 시체를 싼다'라는 뜻으로,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서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장군 마원(馬援)이 "남아는 마땅히 전장에 나가 싸우다가 죽어서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서 돌아와야지 어찌 아녀자의 손에 죽을쏘냐.[男兒當以馬革裹尸還葬 安可死於兒女手乎"한 데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54 馬援列傳》
주석 23)남이흥(南以興)
1576~1627.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이다. 안주 목사(安州牧使),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정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 나가 후금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때 후금의 주력부대 3만여 명이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이르렀다. 이에 목사 김준(金浚), 우후(虞候) 박명룡(朴命龍), 강계 부사 이상안(李尙安) 등을 독려하여 용전하다가 무기가 떨어져 성이 함락되자, 성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춘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주석 24)백상루(百祥樓)
평안도 안주(安州) 서북쪽에 청천강(淸川江)이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있는 누대로,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이다.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26년(615)에 건립되었다 한다.
주석 25)의리장(衣履藏)
유골이 없을 경우 옷이나 신발 등을 가지고 장례를 지내는 것을 의리장(衣履葬)이라고 한다.
주석 26)김준(金浚)
1582~1627. 본관 언양(彦陽)이며 자는 징언(澄彦)으로 정읍 정문(旌門) 출생이다. 1605년(선조38) 나이 24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거쳐 선전관(宣傳官)으로 선발되었고 승진되어 교동 현감(喬桐縣監)으로 나갔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인조반정 뒤에 여러 벼슬을 지냈다. 정묘호란 때에 안주 목사 겸 방어사를 지냈고, 안주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함께 분신 자결을 하였다.
주석 27)병자년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1636년(인조14)에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의 태종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같은 해 12월, 청나라는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공격한 병자호란을 말한다.
주석 28)명실(明室)의 옥사(屋社)의 화(禍)
옥사는 패망한 나라의 사직(社稷)에 지붕[屋]을 설치하여 햇볕을 막는 것으로, 나라가 망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1644년 3월에 이자성(李自成)의 농민 반란군이 명나라 수도인 연경(燕京)을 공격하여 함락시켜, 의종(毅宗)과 황후 주씨(周氏)가 목을 매어 자살한 사건을 말한다.
주석 29)갑신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완전히 멸망한 1644년(인조22)을 가리킨다.
贈兵曹參判行軍資監主簿柏潭崔公遺事狀
公姓崔。諱汝箎字台叔。號柏潭。朗州人有諱知夢封東萊侯謚敏休。其鼻祖也。至諱安雨。我朝軍器小監。生諱雲號德庵平安道觀察使。累傳諱湫號蘭溪戶曺參判。生諱致湖號尙德齋在左承旨。公之高祖也。曾祖諱潔參奉。祖諱慶男判官。考諱廷彦別提。妣長興魏氏衡女。生考諱廷俊。妣淸州韓氏希烈女。夢猛虎入庭而産公。卽萬曆壬辰正月五日也。風骨岐嶷。志氣磊落。幼與兒戱。分隊作伍。爲布陣行軍之儀。群兒莫敢違其令。就塾讀書。餘日兼習兵略。嘗讀漢史。至馬革裹尸。擊案而歎曰。大丈夫當如是。累擧不中。投筆登榜。臨試講兵書。辨論籌略。諸人莫及。考官擢置高第曰。今試得干城之才。甲子除訓鍊院奉事。丁卯金人陷義州。車駕幸江都。公以主簿從元師南以興至興安州。陳于百祥樓下。挺身奮擊。殺傷無數。賊披靡而退。己而賊悉衆而至。公力戰不屈而死。只有奴與馬歸其家。以衣履葬于枝洞後麓癸坐原。錄勳贈兵曹參判。事載丁卯錄及江華忠節碑。配南原盧氏士良女。生四男一女。尙嵂進士。尙嶪參奉。尙巘文科。尙嶷生員。女適李晥。長房孫漢齊。二房孫漢宇漢宙。三房孫漢軫。孝行著世。四房孫漢翼參奉。曾玄以下不錄。金氏之在瀋陽也。志在於中國而先加兵於我國者。恐我國之乘其虛而躡其後。當時義州之戰。者無金菀之立憧。安州之役。若無公及金浚諸賢之死節。則我國南漢之辱。不必延在丙子。明室屋社之禍。不必遠在甲申。然則公之所就。非止爲一時一國之功。其義又足以輝映百世而不朽也。雲仍零替。遺蹟散逸。是爲可慨也。十世孫東珉東燮持家狀。謁狀行之文。牢辭不獲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