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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성균관 대사성 신재 조공 유사장(成均館大司成愼齋趙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05
성균관 대사성 신재 조공 유사장
공의 성은 조씨(趙氏), 휘는 림(琳), 자는 백원(伯瑗), 호는 신재(愼齋)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고려 평장사 휘 조정(趙鼎)주 21)이 족보에 오른 시조가 된다. 덕곡 선생(德谷先生) 휘 승숙(承肅)이 그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종례(從禮), 호가 율정(栗亭)으로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조부는 휘 염(琰)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경서에 밝고 행실이 조촐하여 세상에 추중을 받았다. 아버지는 휘가 계조(繼祖)이며, 세상에 풍암처사(楓庵處士)라고 불리었고 힘써 배우고 독실히 행하며 은거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공이 태어난 간지(干支)는 산일(散佚)되어 전하지 않는다. 빼어나고 맑으며 총명한 자질로 시례(詩禮)가 있고 법도로 보필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조예가 있고 자라서는 덕이 있어 우뚝하게 자신을 세움이 뭇사람들과 크게 달랐다. 성화(成化) 병오년(1486, 성종17)에 진사가 되고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8)에 병과(丙科)에 뽑혀 양덕(陽德)·흥해(興海)·무주(茂朱)의 현감을 지냈으며 재차 청성(靑城)을 맡았고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관직에 임하여서는 집안일처럼 처리하였고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하였다. 청렴하고 근신함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청송(靑松)의 백성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만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한가로이 지냈다. 일찍이 시(詩)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바위 곁의 초가 정자 신령한 골짜기에 있는데 (巖上茅亭洞壑靈)
정자에 올라보니 비와도 좋고 개어도 좋아라 (登臨宜雨又宜晴)
고향의 형승은 노년을 보낼만하니 (故國形勝堪終老)
부질없이 홍진 속을 달려 온 이내 몸 우습구나 (浪走紅鹿笑此生)

라고 하였다. 하서(河西) 김선생(金先生, 김인후(金麟厚))과 도의의 교분을 맺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강론하고 연마하기를 계속해서 끊이지 않았다. 갑오년 11월 13일에 세상을 떠나 남원 견소곡(見所谷) 풍산(楓山)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제주 고씨(濟州高氏) 정랑(正郞) 명손(命孫)의 따님이다. 계배(系配)는 동복 오씨(同福吳氏) 원동(元童)의 따님으로 4남을 낳았는데, 아들 희광(希匡)은 참봉을 지냈으며 이름이 문행록(文行錄)에 실렸고, 희정(希鼎)은 승사랑(承仕郞)을 지냈다. 희문(希文)은 교리를 지냈고 호가 월계(月溪)이며, 희무(希武)는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덕곡의 학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에서 연원하였는데, 도덕과 절의가 우뚝하고 밝아서 끼친 교화와 남긴 공렬이 공에게까지 끊이지 않았다. 공은 풍암처사(楓庵處士)가 아버지가 되고 하서 선생이 벗이 되며, 아들로는 월계공(月溪公) 사형제(四兄弟)가 있는데, 어질었다. 그 성대한 만남과 계술(繼述)의 아름다움이 백세(百世)에 전해졌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손이 영락(零落)하여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행실이 모두 세상에 전해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5대손 익제(翼濟)가 가장을 받들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해 주길 청하니 굳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석 21)조정(趙鼎)
함안 조씨 시조로, 자(字)는 우보(禹寶)이며, 호는 모당(慕唐)이다. 본래 당나라 사람이었는데, 신라 경애왕(924~927) 때 두 아우인 부(釜)와 당(鐺)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권행(權幸)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며, 왕건(王建)을 도와 합천(陜川)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931년(태조14)에 고창성(古昌城)에서 후백제 진훤군을 대파하여 동경주현(東京州縣)을 공략하여 장악하였으며 고려 통일에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함안(咸安)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成均館大司成愼齋趙公遺事狀,
公姓趙氏。諱琳。字伯瑗。號愼齋。貫咸安。高麗平章事諱鼎。爲登講之祖。德谷先生諱承肅。其高祖也。曾祖諱從禮號栗亭直提學。祖諱琰參奉。明經潔行。爲世推重。考諱繼祖。世稱楓庵處士。力學篤行。隱居不仕。公寅降干支。逸而不傳。以秀爽穎悟之資。生於詩禮法拂之家。幼而有造。長而有德。靳然樹立。大異衆人。成化丙午進士。正德癸酉擢丙科。歷宰陽德興海茂朱。再莅靑城。至成均館大司成。處官如家。視民如子。淸謹廉眞。蔚有聲績。靑松民立詞享之。晩年致仕還鄕。杜門養閒。嘗有詩曰。巖上茅亭洞堅靈。登臨宜雨。又宜晴。故國形勝堪終老。浪走紅塵笑此生。可以見其志矣。與河西金先生爲道義交。往復講磨。源源。不絶。甲午十一月十三日卒。葬南原見所谷楓山癸坐原。配濟州高氏正郞命孫女。系配同福吳氏元童女。四男。希匡參奉。名載文行錄。希鼎承仕郞。希文校理號月溪。希武從仕郞。孫以下不錄。嗚呼德谷之學。淵源圃隱。而道德節義。磊落光明。遺風餘烈至於公而未斬矣。公以楓庵處士爲父。河西先生爲友。在子而有月溪公四昆季之賢。會遇之盛。繼述之美。流傳百世。曷不偉然。子孫零替。其嘉言善行。不盡傳於世。是爲可慨也。已十五代孫翼濟奉家狀。託以不朽。牢辭不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