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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계은 오공 유사장(溪隱吳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04
계은 오공 유사장
공의 성은 오씨(吳氏), 휘는 치상(致祥), 자는 성로(聖老), 호는 계은(溪隱)이며, 그 선조는 보성사람이다. 고려조 문양공(文襄公) 휘 연총(延寵)이 그의 시조이다. 6대가 지나 휘 현필(賢弼)은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고, 휘 안주(安宙)는 호가 봉은재(鳳隱齋)로 율곡 이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 분이 낳은 휘 방한(邦翰, 1574~1593)은 죽천(竹川) 박선생(朴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임진년 전란에 진주(晉州)에서 용맹을 떨쳐주 15)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정려(旌閭)를 명받았다. 공에게 7대조가 된다. 고조 휘 진찰(震札)은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휘 후유(厚有)는 호가 석계(石溪)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석영(錫永)은 호가 죽호(竹湖)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장원(章元)의 따님이다. 생부(生父)는 휘 석윤(錫胤)이며, 생모는 함양 박씨(咸陽朴氏) 필연(必鍊)의 따님으로 순조 기사년(1809, 순조9) 11월 8일에 능주 칠송리(七松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기량이 크고 넓으며 어려서부터 지극한 성품을 지녀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다. 9세에 생가의 모친상을 당하자 슬픔이 지나쳐 거의 목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는데, 그 대인(大人)이 생명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매번 위로하여 억누르니, 이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곡을 하지 못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공이 몸소 집안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여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고 여가에 글공부에 힘써 정해놓은 과정(課程)을 폐하지 않았다. 소후모(所後母, 후사로 들어간 집의 양어머니) 김씨는 성품이 준엄하여 화합하기 어려웠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받들어 순종하니 마침내 기뻐하는 데주 16)에 이르렀다. 백씨(伯氏) 지상(志祥)과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책을 물려받아 공부하였으며주 17) 서로 우애함이 매우 돈독하여 재산과 집물(什物, 집안 살림의 온갖 세간)이 있으나 없으나 공유하였다. 매부(妹夫) 김씨 집안이 공포(公逋)주 18)가 너무 많았으므로 공은 어버이께 근심을 끼칠까 두려워하여 남몰래 자기 땅을 팔아 그 체납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 밭과 집을 마련해주어 그들이 생업에 안심하고 종사하도록 하고 함께 이웃하여 살았다. 두 집안에 화재(火災)를 당한 자가 있거든 공이 물력(物力)을 내어 집을 지어주고 흩어져 사는 일이 없게 하였다. 남에게 돈을 내어주었다가 여러 해 동안 받지 못한 것은 공이 대인(大人)에게 아뢰어 그 문서를 불태웠다. 전후로 상을 당하자 애훼(哀毁)함이 예제(禮制)에 지나쳐 정리(情理)로나 예법(禮法)으로나 모두 지극하였다. 글을 읽다가 격언과 중요한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치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못하면 곧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평소에 몸가짐이 법도가 있고 집안을 다스림에 예가 있으며, 사람을 접함에 의(儀)가 있고, 일을 처리함에 방도가 있어 모든 것을 시행함에 환하게 조리를 갖추었다.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고 깊이 스스로 숨어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으며 권문(權門)에 출입하지도 않았다. 오직 경서를 궁리하고 이치를 연구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행실을 닦는 것을 자신과 집안을 위한 계책으로 삼았다. 부춘(富春)의 칠송리(七松里)에 집을 짓고 계은(溪隱)이라 자호(自號)하고는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연하에 유유자적하면서 초연히 세상을 벗어날 기상이 있었다. 일찍이 고산 임공(鼓山任公)주 19)의 문하에 한 번 찾아가서 여러 날을 강론하고 토론하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다. 장수(長壽)로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곧이어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했다. 무인년 8월 16일에 생을 마쳤으며, 단양면(丹陽面) 다년부(多年富)주 20) 마을 뒤 기슭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합봉하였다. 부인 풍산 홍씨(豐山洪氏)는 경우(警禹)의 따님으로 부인의 도리에 매우 맞게 하였다. 5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수태(壽泰)·수화(壽華)·수형(壽衡)·수영(壽泳)·수기(壽奇)이며, 딸은 대구 배달진(裴達鎭)과 파평 윤씨(坡平尹氏) 자성(滋城)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몽섭(蒙燮)이고, 둘째 집의 손자는 장섭(長燮)과 덕섭(德燮)이며, 셋째 집의 손자는 명섭(命燮)과 경섭(景燮)이고, 넷째 집의 손자는 문섭(文燮)과 인섭(仁燮)이며, 다섯째 집의 손자는 원섭(元燮)이다. 증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효우(孝友)의 행실과 삼가고 성실한 풍도가 향리 인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송(傳誦)되었으니 지금 장섭(長燮)의 청을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주석 15)용맹을 떨쳤고
원문의 '입근(立慬)'은 절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주석 16)기뻐하는 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순 임금이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다하자 고수가 기뻐하게 되었고,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가 교화되었으며, 고수가 기뻐하게 되자 천하의 부자의 도가 정해졌으니, 이것을 일러 대효라고 하는 것이다.[舜盡事親之道而瞽瞍底豫, 瞽瞍底豫而天下化, 瞽瞍底豫而天下之爲父子者定, 此之謂大孝.]"라고 하였다.
주석 17)같은……공부하였으며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안씨가훈(顔氏家訓)》 〈형제(兄弟)〉에 "자식들이 어릴 적에, 부모는 왼쪽에서 손잡고 오른쪽에서 끌며, 앞으로는 품에 안고 뒤로는 소매를 잡는다. 밥은 같은 밥상에서 먹고, 옷은 물려 입으며, 공부는 형이 보던 책을 그대로 쓰고, 놀 때는 같은 방소로 함께 간다.[方其幼也, 父母左提右挈, 前襟後裾. 食則同案, 衣則傳服, 學則連業, 遊則共方.]"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18)공포(公逋)
국가에 빚을 지거나 또는 국가의 돈을 축내는 것을 말한다.
주석 19)고산 임공(鼓山任公)
임헌회(任憲晦, 1811~1876)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명로(明老)ㆍ중명(仲明), 호는 고산(鼓山)ㆍ전재(全齋)ㆍ희양재(希陽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경학과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낙론(洛論)의 대가로서 이이(李珥)ㆍ송시열(宋時烈)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의 제자인 전우(田愚)에게 전수하였다. 학자로서 이름이 알려지자 1858년(철종9)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74년(고종11) 대사헌이 되고 이어 좨주(祭酒)가 되었다. 천주학을 극력 배격했다. 저서에는 《고산문집(鼓山文集)》ㆍ《속고산집(續鼓山集)》 등이 있다.
주석 20)단양면(丹陽面) 다년부(多年富)
단양마을은 원래 템부라 부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다년부(多年富)라고 했으며 한편으로 점촌이라 하였는데 단양마을의 원래의 뜻은 도자기를 굽던곳을 불무골 또는 불무실이라 하는데 바로 불무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불무 = 붉다 = 단(丹)」, 「골, 또는 실자는 마을을 의미하는 양(陽)자를 각각 취하여 단양이라 한 것이다. 마을을 세분하면 우데미, 아래데미로 구분된다. 1896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전라남도 능주군 단양면이었으나, 1913년 능주군의 폐지로 화순군 단양면,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변경에 의해 화순군 춘양면(春陽面) 양곡리(陽谷里)(장곡리, 단양리, 해하리)로 편입되었다.
溪隱吳公遺事狀
公姓吳氏。諱致祥。字聖老。號溪隱。其先寶城人。麗朝文襄公諱延寵。其始祖也。六傳而諱賢弼。封寶城君。諱安宙號鳳隱齋。受學于栗谷李先生之門。贈吏曹參判。是生諱邦翰。受學于竹川朴先生之門壬辰之後。立憧晉州。贈兵曹參判。命旌閭。於公爲七世高祖。諱震花。贈戶曹參議。祖諱垕有號石溪僉樞。贈戶曹參判。考諱錫永號竹湖。贈戶曹參判。妣光山金氏章元女。生考諱錫。妣咸陽朴氏必煉女。純祖己巳十一月八日。生公于綾之七松里。姿相粹美。器量寬弘。幼有至性。事親克孝。九歲遭生庭內艱。擗踊幾絶。其大人慮其傷生。每慰抑之。是以不敢任情號哭。家甚貧。公躬幹凡務。以供甘旨。餘力讀書。不廢課程。所後母金氏。性峻難諧.至誠承順。竟底豫。與伯氏志祥。同案連業。友愛甚篤。財産什物。有無共之。妹夫金氏家。公逋甚多。公恐貽親憂。潛賣已土以脫其逋。又備給田廬。使之安業同隣。二家有被火災者。公出力營構。俾無離散。出錢於人而積年未捧者。公稟於大人。焚其券。遭前後艱。哀毁過制。情文兩至。讀書至有格言要誨。擊節嗟賞曰。若不如此。便不成人。平居持身有法。治家有禮。接人有儀。處事有方。以至凡百施爲。莫不粲然有條。杜門斂迹。深自鞱晦。不見要人。不到要門。惟以窮經硏理。修身勅行。爲身家究竟計。築室於富春之七松。自號溪隱。逍遙文酒。徜徉煙霞。超然有遺世之象。嘗一造鼓山任公之門。講討數日而歸。以壽除僉樞。尋陞同知。戊寅八月十六日考終。契丹陽面多年富村後麓巽坐原。合封。配豐山洪氏警禹女。甚得婦道。生五男二女。男壽泰壽華壽衡壽泳壽奇。女適大邱裴達。鎭坡平尹滋城。長房孫蒙燮。二房孫長燮德燮。三房孫命燮。景燮四房孫文燮仁燮。五房孫元燮。曾孫以下不盡錄。嗚呼。公孝友之行。謹慤之風。爲鄕里人士所傳誦。今於長燮之請。有不敢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