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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증 통정대부 좌승지 매곡 정공 유사장(贈通政大夫左承旨梅谷鄭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03
증 통정대부 좌승지 매곡 정공 유사장
정복현(鄭福鉉) 군이 그 부형(父兄)의 명으로 그 증대부(曾大父, 촌수가 먼 증조 항렬의 남자) 매곡(梅谷)공의 유적을 받들고 와서 행장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군(君)은 나와 종유하였으니 그 말을 참으로 모른 척 할 수가 없었고, 공은 우리 고을의 선배인지라 그 유풍과 여운이 귀에 익숙하고 마음으로 사모한 지 오래 되었으니, 어찌 감히 내가 행장을 짓는 데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겠는가. 공의 휘는 원상(元相)이고, 자는 현직(賢直)이며, 매곡(梅谷)은 그의 호이다. 정씨의 계파는 하동(河東)에서 나왔으며, 밀직사(密直司)를 지낸 휘가 국룡(國龍)을 비조로 삼았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 휘가 인귀(仁貴)라는 분이 호조 참판을 지냈고, 이분이 참봉을 지낸 휘 주유(由周)를 낳았으며, 휘 주유가 현감을 지낸 휘 지영(之英)을 낳았다. 휘 지영이 호가 둔재(遯齋)인 휘 여해(汝諧)를 낳았는데, 점필재(佔畢齋)주 8)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정일두(鄭一蠹)주 9)와 김한훤(金寒暄)주 10)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4대를 지나서 호가 송암(松庵)인 휘 흘(忔)이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켰으며, 판윤(判尹)에 추증되었으니 공에게 5대가 된다. 고조는 휘 문규(文奎)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으며, 증조는 복채(復釆)이다. 조부는 탁(鐸)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아버지는 양엽(陽曄)으로 대대로 문행이 있었다. 어머니는 선산 정씨(先山鄭氏) 내광(來光)의 따님으로, 정조 신축년(1781, 정조5)에 능주 신산리(莘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순실하고 명민한 자질로 시례(詩禮)가 있고 법도로 보필하는 명가(名家)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가르치고 기르는 데 갖은 방법을 다 하였는데, 하나하나 그대로 따르면서 어긋나는 경우가 없었다. 8세에 《소학》을 배우다가 7세에 남녀가 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는 글에 이르러서 이에 말하기를, "나는 지금 8세인데 7세의 가르침을 알지 못했구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녀의 예를 분별하고 잡스러운 놀이를 하지 않았으며 비루하고 속된 말을 하지 않았고 날마다 부모를 곁에서 모시며 응대하기를 조심스럽게 하였다. 어버이가 병환이 있으시면 마음으로도 근심하고 얼굴빛으로도 근심하여 한데서 기도를 올리고 약을 지으며 옷에서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비록 특이한 산물이거나 구하기 힘든 약재라도 병에 이롭다는 것은 정성과 힘을 다해 구하여 얻지 못한 것이 없었다. 혼인하여 부인을 맞이함에 부모가 분가시키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형제가 분가하는 것도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하물며 부모가 살아계신데 분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부모가 기특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상례(喪禮)를 치르면서 매우 슬퍼하여 거의 생명을 손상하기에 이르렀고, 장례의 모든 도구를 한결같이 예제(禮制)를 따라 유감이 없게 하였다. 기일을 당하여서는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고, 엄숙히 재계하고 깨끗하게 하여 마치 살아계신 듯이 여기는 정성을 다하였다. 평소에 말과 웃음이 적었고, 출입을 간소히 하였다. 재주는 문학에 뛰어났으나 부귀영달을 꾀함이 없었으며, 집이 본래 가난하였으나 봉록의 이로움에 뜻이 없었다. 오직 몸을 검칙(檢飭)하고 행실을 닦는 것으로 구경(究竟)주 11)의 계책을 삼았으니, 이 때문에 자손이 그 가르침을 따르고 향리에서 그 의리에 감복하여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간에 군자다운 어른이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철종 계축년(1853, 철종4) 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신산(莘山) 건너 대방(大坊) 곤좌(坤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뒤에 자손이 장수하고 귀하게 되어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숙부인 청도 김씨(淸道金氏) 복헌(復憲)의 따님으로 4남을 낳았는데, 범환(範煥)·영환(英煥)·수환(壽煥)·달환(達煥)이다. 손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선을 쌓는 집안에 남은 경사가 있다."주 12)라고 하였다. 자손에게 남은 경사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선조가 선을 쌓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종사(螽斯)주 13)와 초료(椒聊)주 14)처럼 자손이 더욱 번성하였고, 효우와 문학의 기풍이 계속해서 실추되지 않았으니, 어찌 유래한 바가 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주석 8)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호이다. 자는 계온(季昷) 혹은 효관(孝盥)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453년(단종1)에 진사가 되고, 1459년(대조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함양 군수,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에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등 많은 제자를 길렀다. 사후인 1498년(연산군4),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중종(中宗)이 즉위한 후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佔畢齋集)》, 편서에 《동문수(東文粹)》 등이 있다.
주석 9)정일두(鄭一蠧)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자가 백욱(伯勗), 본관이 하동이며, 일두는 그의 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다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490년(성종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로 종성(鍾城)에 유배되고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었다. 광해군 때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주석 10)김한훤(金寒暄)
김굉필(金宏弼, 1454~1504)로,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본관은 서흥(瑞興),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하였다. 무오사화로 유배되자 강학에 전념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스승이 되었는데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하였다.
주석 11)궁극(窮極)
구경은 불가(佛家)의 용어로, 궁극에 이르는, 철저하게 체득하는, 완성에 이르는, 최후의 목적 등의 뜻을 갖는바, 여기에서는 최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 혹은 최고의 원리(原理)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자전서(朱子全書)》 권1 학일(學一) 〈소학(小學)〉에 "세간의 온갖 일은 잠깐 사이에 변화하여 없어지는 것인 만큼 모두 가슴속에 담아 둘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오직 궁리하고 수신하는 것이야말로 구경법이라고 하겠다.[世間萬事, 須臾變滅, 皆不足置胸中. 惟有窮理修身, 爲究竟法耳.]"라고 하였다.
주석 12)선을……있다
조상의 적선(積善)에 대한 보답으로 후손이 경사(慶事)를 받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이르기를,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 하였다.
주석 13)종사(螽斯)
메뚜기로, 자손들이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시경(詩經)》 〈주남(周南) 종사(螽斯)〉에 "수많은 메뚜기들이 화목하게 모여드니, 의당 네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리라.〔螽斯羽, 詵詵兮, 宜爾子孫, 振振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14)초료(椒聊)
산초나무로, 열매가 많이 달리기 때문에 자손이 많은 것을 비유한다. 《시경》 〈당풍(唐風) 초료(椒聊)〉에 "초료의 열매 번성하여 되에 가득하네. [椒聊之實, 蕃衍盈升.]" 하였다.
贈通政大夫左承旨梅谷鄭公遺事狀
鄭君福鉉。以其父兄命。奉其曾大父梅谷公遺蹟。來謁狀行之文。君從余遊。其言固難恝。公吾鄕先進也。其遺風餘韻。慣於耳而慕於心久矣。豈敢以非其人辭。公諱元相。字賢直梅谷其號也。鄭氏系出河東。以密直諱國龍爲臭祖入。我朝。有諱仁貴戶曹參判。是生諱由周參奉。是生諱之英縣監。是生諱汝諧號遯齋受。業于佔畢齋門。與鄭一蠹 金寒暄爲道義交。四傳諱忔號松庵丙子擧義。贈判尹。於公爲五世。高祖諱文奎嘉善。曾祖諱復釆。祖諱鐸。贈司僕寺正。考諱陽曄。世有文行。妣先山鄭氏來光女。以正宗辛丑生公于綾州莘山里。公以醇實開爽之姿。生於詩禮法拂之家。有以早敎豫養者。無所不至。而一一遵循。未嘗有違。八歲授小學。至七年男女不同席之文。乃曰我今八歲而不知七歲之敎乎。自此別於男女之禮。不作戱雜之遊。不出鄙褻之語。日侍親側應對惟謹親有疾。心憂色沮。露禱合藥。衣不解帶。雖異產僻材。可利於病者。殫誠竭力。求無不得。及成昏納婦。父母欲爲之分炊。公曰兄弟分炊。本非美事。況父母在而可乎。父母奇而聽之。執喪甚哀。幾至傷生。送終凡具。一違禮制。俾無餘憾。遇忌辰悽愴怵惕以寓終身之慕。齊肅明潔以盡如在之誠。平居寡言笑。簡出入才優文學而無摹乎榮貴。家素貧窶而無意乎祿利。惟以勅身修行爲究竟計。是以子孫遵其敎。鄕里服其義。知不知。無不以君子長者稱之。哲宗癸丑二月十八日卒。葬莘山越大坊坤坐原。後以孫壽貴。贈左承旨。 配淑夫人淸道金氏復憲女。生四男。範煥英煥壽煥達煥。孫以下不錄。易曰。積善之家。必有餘慶。觀子孫之有餘慶。而其祖先之有積善可知也。今距公之世久矣。而螽斯椒聊。愈爲蕃衍。而孝友文學之風。繼繼不墜此豈無所自而然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