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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 증 병조 참판 행 부산 첨사 오공 유사장(贈兵曹參判行釜山僉使吳公遺事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20 / 유사(遺事(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20.0001.TXT.0001
증 병조 참판 행 부산 첨사 오공 유사장
예로부터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 있으면, 위로는 국사(國史)에 밝게 실려 있고 아래로는 야사(野史)에 흩어져 나오거나 혹은 쇠와 돌에 새겨져 후대에 전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붓을 들어 쓴 말은 부회(附會)한 것을 답습하기도 하고 혹 아부하는 것에 가깝다. 금석(金石)이 아무리 견고하다 하더라도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하면 연기나 구름처럼 사라져 봄날의 새와 가을날의 곤충처럼 아득하여 소리가 없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성대한 덕과 지극한 인(仁)은 세상을 두루 덮어준 것이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아래로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동이 필부필부(匹夫匹婦)의 마음에 부합하여 여항의 궁벽한 곳에 자자하니, 이것이야말로 믿을 만한 사승(史乘,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이며, 오래 갈 수 있는 금석(金石)인 것이다. 우리 고을에, 옛날 오공이란 분이 있었는데 휘가 방한(邦翰)이고 자는 원중(元仲)이며, 보성(寶城) 사람이다. 묘년(妙年, 스물 안짝의 나이)에 죽천 선생(竹川先生) 박공(朴公) 광전(光前)주 1)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무과에 급제주 2)하여 벼슬이 개운 만호(開雲萬戶)를 지내고 부산 첨사(釜山僉使)로 옮겼다. 임진왜란 때에 정예병(精銳兵) 수백 명을 모아 행재소(行在所)주 3)로 달려갔는데, 임금이 위로의 말을 해 주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시며 영남을 방비하게 하니 공이 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주로 들어갔다. 그때에 같은 고을의 진사 문홍헌(文弘獻)이 최경회(崔慶會)의 종사관으로 있었는데, 공을 추천하여 막좌(幕佐)로 삼고 항상 전략을 세우는데 참여하게 했다. 성이 함락되자 공이 성에 올라가 크게 소리치며 쏘아 죽인 적들이 매우 많았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자 문홍원과 같은 날 순절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계사년(1593, 선조26) 6월 29일이었다. 그 강개(慷慨)한 절개와 충렬(忠烈)의 의리는 함께 순절한 여러 공들과 그 자취가 같았는데, 다만 명성과 지위가 드러나지 못하고 후손들이 쇠락하여 오랜 세월이 흐름으로 인해 묻혀서 을사년의 녹훈(錄勳)을 받지 못하고 진주(晉州)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되지 못하였다. 공조(公朝)의 사첩(史牒)과 초야의 기문(記聞)에는 모두 전해지지 않았고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만 적막하게 몇 마디 말에 그쳤을 뿐이니 어찌 유감스럽지 않겠는가. 다만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전하여 당일의 일들을 말해줌에 눈으로 직접 보는 듯 역력하기에 부녀자나 아이들, 하인이라도 감개(感慨)하여 기뻐하지 않은 이들이 없고 입이 닳도록 칭찬하였다. 아, 당일의 의로운 처신이 만약 명백하고 직절(直截)하지 않으면서 유전(流傳)되고 부회(附會)하여 제동 야인(齊東野人)주 4)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찌 오래될수록 이처럼 절실하게 되었겠는가. 사승(史乘)은 더러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부로(父老)와 부유(婦孺)는 기망(欺罔)할 수 없고, 금석(金石)도 때로 사그라지는 때가 있지만 병이(秉彝)와 호덕(好德)주 5)의 본성은 실추시킬 수 없으니, 그 믿을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는 것이 어찌 사승, 금석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을유년(1885, 고종22)에는 정려(旌閭)를 명하고 아울러 병조 참판에 추증하였으니, 또한 공의 여러 사람의 칭찬이 민멸하지 않고 덕을 좋아하는 본성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살아서는 한 세상의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죽어서는 장홍(臧洪)의 무리들주 6)과 지하에서 노니니 어찌 장쾌하지 않겠는가. 나는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에 보고 들어서 추앙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였고, 또 명보(名寶)의 구분에 우연히 느낀 바가 있어 삼가 이와 같이 기록한다.
주석 1)박공(朴公) 광전(光前)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의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이다.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이항(李恒)·유희춘과 함께 호남5현의 한 사람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이 되어 싸웠다. 학문에 있어서 지행의 어느 하나만을 내세울 수는 없으며, 그 둘은 서로 의지하여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지행호진의 관계를 강조했다. 저서로 《죽천집》이 있으며, 퇴계 이황과 학문적 교류를 보여주는 《상퇴계선생문목(上退溪先生問目)》은 그의 깊은 성리학적 식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보성 용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이다.
주석 2)무과에 급제
오방한은 무예가 뛰어나 경인년(1590, 선조23)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주석 3)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무슨 일로 인하여 대궐을 떠나 있을 경우, 임금이 머물고 있는 곳을 말한다. 여기서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한 곳을 말한다.
주석 4)제동 야인(齊東野人)
제 나라 동쪽 시골 사람들의 말로, 그 말은 근거가 없는 황당한 이야기여서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에 "이는 군자의 말이 아니다. 제나라 동쪽 시골 사람의 말이다.[此非君子之言, 齊東野人之語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석 5)병이(秉彝)와 호덕(好德)
병이는 하늘이 부여한 떳떳한 본성을 말한다. 호덕은 사람이면 모두 천성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다. 《시경》 〈증민(烝民)〉에 "사람이 떳떳한 본성을 가진지라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民之秉彝, 好是懿德.]" 하였다.
주석 6)장홍(臧洪)의 무리들
함께 죽은 이들을 뜻한다. 장홍은 삼국 시대 사람으로 자가 자원(子源)이다. 그가 원소(袁紹)에게 생포되어 죽을 때 평소 장홍과 동향(同鄕) 사람으로 장홍을 흠모하던 진용(陳容)이 원소에게 장홍을 죽이는 것에 대해 항의하였다. 이에 좌우의 사람들이 진용을 끌어내면서 "그대는 장홍의 무리도 아닌데 공연히 이와 같은 말을 하는가." 하니, 진용이 "대저 인의(仁義)란 어찌 일정한 기준이 있겠는가. 이를 실천하면 군자요 이를 저버리면 소인이다. 오늘 차라리 장홍과 같은 날 죽을지언정 장군과 같은 날 살지는 않겠소."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臧洪傳》
贈兵曹參判行釜山僉使吳公遺事狀
自古人物有聞於世者。上焉則昭載國乘。下焉則散出野史。或刻之金勒之石。以壽其傳。然載筆之言。或襲附會。或沙阿好。金石雖固。而時移世變。烟消雲空。如春鳥秋蟲。漠然無聲也。惟其盛德至仁。徧覆宇宙者尙矣。下至一言一行。合乎匹夫匹婦之心。而藉藉於委巷窮曲之間者。此是可信之史乘。可久之金石也。吾鄕古有吳公諱邦翰。字元仲。 寶城人。妙年受學于竹川先生朴公。光前之門。 登武科。 官開雲萬戶。 移釜山僉使。壬辰之變募精兵數百。赴行在。上慰論之。賜弓矢。使備嶺南公拜命南下。入晉州。時同郡文進士弘獻爲崔公慶會從事官。薦公爲幕佐。常參謀畵。及城陷。公登城大呼。射殺甚多。及矢盡力窮。與文弘獻同日殉節卽。癸巳六月二十九日也。其慷慨之節。精烈之義。與同殉諸公同軌一轍。而但名位不揚。雲仍零替。時久歲移。因以堙沒。未蒙乙巳之錄勳。未配晉州之彰烈。至公朝史牒。草野記聞。皆無傳焉。而於湖南節義錄。止寂寞數語耳。豈不可憾。但鄕父老相傳。說當日事。歷歷如目擊。雖婦孺隷儓。未嘗不感慨歡仰。嘖嘖不容口。嗚呼。當日處義。若不明白直截。而流傳附會。出於齋東野人之口。則豈愈久而愈不忘。至於若是之切耶。史乘或不能盡信。而父老婦孺不可以欺罔。金石或有時銷泐。而秉彛好德。不可以失墜。其可信可久。豈史乘與金石之比耶。及夫乙酉。命旌閭。兼有兵參之。贈。亦可以見其公誦詩之不泯而好德之攸在也。生而扶一世之綱常。死而與臧洪輩遊於地下。豈不快哉。余以鄕里後生。平日瞻聞。偏切追仰之誠。又於名寶之分。偶有所感。謹述之如此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