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도정 박창현전(朴都正昌鉉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12
도정 박창현전
도정(都正) 박창현(朴昌鉉)은 자가 영화(永化)이고, 밀양(密陽) 사람으로 강진현(康津縣)에 살았으며, 도정은 그의 직함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칭송이 일찍 드러났다. 아버지의 병환에 단지(斷指)하여 3일 동안 목숨을 연장시켰다. 어머니 김씨가 풍비(風痺)를 앓아 앉거나 누울 때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자, 사방을 다니면서 훌륭한 의원을 두루 구하였고, 온갖 초목(草木)의 자미(滋味)주 196)와 침과 뜸의 방법을 시험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끝내 낫지를 못했다. 이에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행한 것이 몇 개월이 되었지만 또한 낫지를 않았다. 그래서 낭주(朗州, 전남 영암의 옛 지명)의 소금강(小金剛, 월출산을 가리킴)으로 들어가 산신령에게 기도하였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빙설이 뒤덮혀도 매달의 상례로 삼았는데, 어느 하루 저녁 꿈에는 다른 징조가 있어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김씨 또한 이날 밤에 꿈속에 어떤 한 노인이 두 개의 흰 대나무로 아픈 곳을 세 번 쳤는데, 이때부터 병세가 점차 줄어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산을 내려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부르며 들어가자 김씨가 놀랍고 기쁜 마음에 갑자기 일어났는데, 걸음걸이가 평상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한 소치라 여겼다.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지기가 우뚝하여 일찍이 개연(慨然)히 절의(節義)로 자부하기를, "내가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 있는 세상으로 회복하는 것에는주 197) 기필할 수 없지만 절의를 위하여 죽는 일이라면 어찌 남에게 양보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임진왜란의 삼장사(三壯士)주 198)를 논하여 말하기를, "그 절개는 높고 아름답지만, 다만 곧장 앞으로 나아가 적을 참수하지 못하고, 먼저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은 것이 한스러운 뿐이다."라고 하였다. 중년 이후로는 문을 닫고 《삼략(三略)》과 《육도(六韜)》주 199), 《병학지남(兵學指南)》주 200)과 《연기신편(演機新篇)》주 201) 등의 책 읽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았고, 포진(布陣)과 행군(行軍), 진퇴(進退)와 합변(合變)하는 방도주 202)에 대해 연구하여 자세히 익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갑오년에 동학 교도(東學敎徒)들이 맹렬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분이 북받쳐 가서 절도사(節度使)를 만나 소탕할 계책을 진달하고 마침내 옆 고을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민병(民兵) 700명을 얻어 나주 영장(羅州營將)과 합병(合兵)하여 전주(全州)로 향하다가 옥과(果果)의 경계에 이르러 군대를 해산하라는 전지를 받고 돌아왔다. 적들이 전주를 함락시킨 이후로부터 곳곳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날로 더욱 불어나더니, 6월에는 적 수천 명이 장흥(長興)에서 강진(康津)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공이 절도사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저에게 포군(砲軍) 백 명을 빌려주면 가서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지만 따라주지 않자 공은 혀를 차며주 203) 집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적들은 공을 매우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다. 사람들이 혹 피하기를 권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삼척의 대환도(大環刀)주 204)가 있어 적들을 감당할 수 있는데, 어찌 머리와 꼬리를 감추어 구구하게 비겁한 모습을 보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적들은 평소에 그 위엄과 명망을 두려워하여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12월에 적이 장흥과 강진 등 여러 고을을 함락하고 병영을 침범하려고 하여 10리 떨어진 곳에서 묵었는데, 절도사가 급히 공을 불러 의논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는 모두 한민(閒民,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고 저들도 오합지졸이니 우리가 먼저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달아날 것이고, 저들이 먼저 공격하면 우리가 반드시 무너지리라는 것은 참으로 알기 쉬운 형세입니다. 오늘 밤 민병들만으로 성을 지키게 하고 포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습격한다면 썩은 것을 부러뜨리는 형세와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위험한 계획이라 여겨 쓰지 않았다. 단지 본면(本面)의 민병들만 거느리고 성 밖의 채책(寨柵)주 205)을 지켰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적들이 일자(一字)로 포진하여 오자, 공이 말하기를, "벌건 대낮 큰 길에서 행렬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만약 선봉을 패배시킨다면 뒤에 비록 10만의 군사가 이어 온다 하더라도 형세상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 중도의 요해지에서 습격하십시오."라고 하였는데, 또 따르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적들이 이르자 채책을 지키던 자들은 모두 달아났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채책은 비록 온전하나 적들이 다른 채책을 따라 들어온 지 오래되었으니, 홀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성으로 들어가 성 안의 중군과 힘을 합쳐 성을 지키는 것이 낫겠구나."라고 하고는 마침내 성을 들어갔는데, 성 안의 군사들은 한 사람도 남아있는 이가 없고, 적들의 선두 기병이 이미 이따금씩 떼를 지어 거리를 휘젓고 다니니, 공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가 만나는 적들마다 베었다. 얼마 안 있어 많은 무리가 이르렀다. 공이 멀리서 바라보고 군대를 지휘하여 나가 크게 함성을 지르면서 충돌하다 갑자기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적이 죽었다고 여겨 아무 걱정 없이 왔는데, 가까이 이르자 갑자기 몸을 일으켜 적의 수급 몇 명을 참수하고 죽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절도영(節度營, 절도사가 있는 본영)은 바로 한 도(道) 관방(關防)주 206)의 요해처이며, 절도사는 바로 한 도 도독(都督)의 중대한 직임이다. 성지(城池)가 천험(天險)하고 병갑(兵甲)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5백 리를 호령하고, 기고(旗鼓)와, 부월(鈇鉞)주 207)이 그 손아귀에 있어 60주(州)를 조발(調發, 군사를 불러 모음)한다면 기계(器械)와 추속(芻粟, 병마(兵馬)의 군량)이 어찌 모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반란군주 208)과 유랑민, 좀도둑주 209)들이 쳐들어오자 넋이 나가 허둥지둥 달아나 숨어서 성지(城池)를 지키지 못하고 국위(國威)를 진작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아, 사람을 얻으면 10만의 적병(敵兵)이라도 많지 않으며, 사람을 잃으면 천리의 관방(關防)이라도 웅대하지 않는 법이다. 당시에 절도영 아래에 오직 박도정 한 사람만이 있었는데, 쓰지 않았으니 패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이를 수밖에 없는 형세였다. 이뿐만 아니라 만약 그의 계책이 일찌감치 행해지고 의병을 모집한 군대가 전주(全州)에 도달하였다면 비류(匪類)의 난이 필시 흉포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나라의 상황이 또한 오늘날과 같은 지경에도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한 도의 성을 지킴에 만전을 기하는 계책에만 그칠 뿐이겠는가.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이 관계된 바가 이와 같으니, 어찌 천고 지사(志士)의 무궁한 한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창 적이 드셀 때에는 술과 고기를 갖추고 북치고 피리 불며 분주하게 보내고 맞이하는 자가 길에서 끊이지 않다가, 매우 두려워져서는 성을 버리고 고을을 떠나 몸을 빼내 구차하게 살려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아, 이러한 때에 이러한 사람이 없었다면 호남 지역이 어찌 한 사람도 의로운 선비가 없다는 책임을 면할 수 있겠는가. 훌륭한 기품과 곧은 절개가 백세토록 칭송하기에 충분하니 뜻을 펴지 못하고 공을 성취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석 196)초목(草木)의 자미(滋味)
입맛을 돋우기 위해 생강과 계피 등의 양념을 넣어서 만든 음식을 이른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증자가 말하기를, '상중에 병이 있으면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반드시 초목의 자미를 먹는다.'라고 하였으니, 생강과 계피 등을 말한 것이다.[曾子曰:喪有疾, 食肉飮酒, 必有草木之滋焉. 以爲薑桂之謂也.]"라고 하였다.
주석 197)난세를……것에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애공(哀公) 14년조에, "난세를 다스려 그것을 정도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은 춘추(春秋)보다 좋은 책은 없다.[撥亂世, 反諸正, 莫近於春秋.]"라고 하였다.
주석 198)삼장사(三壯士)
임진왜란 때 진주의 촉석루에 올라가 당면한 국가의 장래를 통탄(痛歎)하며 죽기로 맹세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세 장사를 말한다. 삼장사는 영남 삼장사, 호남 삼장사로 나누어 말하는데, 여기서는 호남 삼장사인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고종후(高從厚)를 가리킨다. 영남 삼장사는 김성일(金誠一)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를 가리킨다. 《鶴峯集 註》,
주석 199)삼략과 육도(六韜)
《삼략》은 중국 한(漢)나라 황석공(黃石公)이 지어 장량(張良)에게 주었다는 상ㆍ중ㆍ하 3권의 병서(兵書)로 조선 시대 무과 시험 과목인 무경 칠서(武經七書)의 하나이다. 《육도》는 중국 주(周)나라의 태공망(太公望)이 지었다고 하는 병서(兵書)로, 문도(文韜)ㆍ무도(武韜)ㆍ용도(龍韜)ㆍ호도(虎韜)ㆍ표도(豹韜)ㆍ견도(犬韜)의 6권으로 되어 있다.
주석 200)병학지남(兵學指南)
명(明) 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기효신서(紀效新書)》 중에서 조련법(操鍊法)을 간추려 편찬한 책이다. 원래 선조(宣祖) 때에 간행되어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군사 훈련 교범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정조(正祖) 때 왕명에 의해 이상정(李象鼎)이 수정하고 주석을 첨부하여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를 만들었다.
주석 201)연기신편(演機新篇)
조선 중기 안명로(安命老, 1620~?)가 편찬한 병서이다. 1660년(현종1) 진법(陣法)의 비조라 일컫는 풍후(風後)·악기(握奇)의 법에 따라 진법을 논하고, 여기에 척계광(戚繼光)의 병제를 개선하여 음양가(陰陽家)의 제법(諸法)을 덧붙여 《연기신편》 3권 3책을 엮었다. 1664년 안명로가 양산군수로 있을 때 《연기신편》을 조정에 보내어 병제의 개편을 요청하였으나 채택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후 다른 병서들과 함께 병사훈련에 중요한 지침서가 되었다.
주석 202)합변(合變)하는 방법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변통하는 병법(兵法)을 말한다.
주석 203)혀를 차며
원문의 '돌돌(咄咄)'은 속마음은 걱정스러우면서도 밖으로는 표출하지 않는 것으로, 혀 차는 소리를 나타낸다. 진(晉)나라 때 은호(殷浩)가 중군장군(中軍將軍)으로 있다가 모함을 입어 신안(信安)으로 쫓겨났는데, 밖으로는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나 하루 종일 손가락으로 허공에다 무슨 글자를 썼다. 이에 사람들이 엿보니 '쯧쯧 괴이한 일이로다'란 뜻인 '돌돌괴사(咄咄怪事)' 넉 자였다고 한다. 《世說新語 黜免》
주석 204)대환도(大環刀)
조선시대에는 긴 외날을 가진 칼을 대부분 환도라고 했다. 길이에 따른 분류로 소환도(小環刀), 중환도(中環刀), 대환도(大環刀) 등으로 나누었다. 환도류 무기 중에서도 크기가 큰 대환도는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주석 205)채책(寨柵)
사방에 울타리를 친 방어진지를 말한다.
주석 206)관방(關防)
좁고 막힌 험애(險隘)한 곳에 관소(關所)를 설치하여 군사를 주둔시켜 방어하는 것, 또 그러한 곳을 말한다.
주석 207)기고(旗鼓)와 부월(斧鉞)
기고는 전장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명령을 전달하는 데에 쓰이고, 부월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작은 도끼와 큰 도끼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출정하는 장군이나 큰 임무를 띤 장수에게 정벌과 생사여탈권을 인정하는 의미로 주었다. 여기서는 절도영의 지휘를 맡은 절도사를 가리킨다.
주석 208)반란군
원문의 '황지(潢池)'는 외지고 좁은 땅이란 뜻으로 반역이 일어난 지역을 가리킨다. 곧 임금의 어진 정치가 미치지 못하는 외진 곳에 사는 백성들이 지방 관리들의 폭정으로 인해 반역을 일으키게 된 것을 비유한다. 한나라 공수(龔遂)가 선제(宣帝)의 하문을 받고 "백성은 기한에 시달리건만 관리들이 돌보아 주지 않자, 폐하의 적자들이 폐하의 병기를 훔쳐 황지 가운데서 장난을 쳐 본 것뿐입니다.[其民困于飢寒, 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 盜弄陛下之兵于潢池中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漢書 卷89 龔遂傳》
주석 209)좀도둑
원문의 '서절구투(鼠竊狗偸)'는 쥐와 개처럼 몰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인데, 조선 시대에 변경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야인(野人)이나 왜적(倭敵)을 일컫던 말이다.
朴都正昌鉉傳
朴郁正昌鉉。字永化。密陽人。居康津縣。都正其官啣也。天性至孝。稱譽夙著。考病血指。延三日命。妣金氏患風痺。坐臥須人。行四方。遍求良醫。凡草木之滋。針炙之方。無所不試。而竟不愈。於是乃沐浴齊潔。致誠行禱者數月。而亦不愈。於是入朗州之小金岡。禱於山靈。冒風雨藉氷雪。月以爲常。一夕夢有異徵。心竊喜之。金氏亦於是夕。夢有一老人。以兩紈竹。三撾痛處。自是病勢漸減。後數日。下山歸家。呼母而入。金氏驚喜忽起。因以行步如常。人以爲孝感致然。膂力過人。志氣磊落。嘗慨然以節義自許曰。吾於撥亂反正。則有不可必。若伏節死義。則豈讓於人乎哉。又論壬辰之三壯士曰。其節則高矣美矣。但恨不能直前斬賊而先自投死也。中年以來閉門讀三略六韜兵學指南演機新篇等書。晝夜不輟。於布陣行軍進退合變之方。無不硏究而詳熟焉。甲午見東匪大熾。不勝忿憤。往見節度使。陳勦滅之策。遂傳檄傍郡。得民兵七百人。與羅州營將合兵。向全州。至玉果界。得罷兵之旨而還。賊自陷全州以來。在在屯據。日益滋蔓。六月賊數千。自長興將入康津。公請於節度使曰。假我砲軍百人。可以往擒。不從公咄咄歸家。是以賊疾公甚。欲殺之。人或勸之避。公曰。我有三尺大環刀。可以當之。何藏頭隱尾作區區懦夫樣耶。賊素畏其威望。不敢犯之。十二月賊陷長康諸邑。將犯兵營。宿於距十里之地。節度使急邀公議之。公曰。我軍皆閒民彼亦烏合。我先之彼必走。彼先之我必潰此固易知之勢也今夜只以民兵守城。用砲軍。分兩路襲擊。則勢若拉朽矣。衆以爲危計而不用。只得率本面民兵。守城外寨柵。翌朝賊以一字延互而來。公曰。白畫坦路。行不成列。若敗其先鋒。後雖有十萬繼來者。勢何能相及哉。請及其未至而邀擊於中路要險之地。又不從。俄而賊至。守寨者皆遁。公曰我寨雖完賊從他寨入久矣。獨守此何爲。不如入城中軍。合力守城遂入城。城中軍無一人留者。賊先騎。已往往作隊。橫行街路。公奮劒馳逐。逢則斬之。已而大羣至。公望見之。麾軍而出。大呼衝突。忽中丸而仆。賊以爲死。無慮而來。及近。忽起身。斬數賊而死。外史氏曰。節度營是一路關防要害之地。節度使是一路都督重大之任也。城池天險。兵甲山積。號令五百里。旗鼓鈇鉞。在其掌握。調發六十州。器械芻粟。何恨不集。乃於潢池流亡鼠竊狗偸之來。魂飛魄散。蒼黃奔竄。使城池不守。國威不振。其故何哉。嗚呼。得人則十萬敵兵。不足爲衆。失人則千里關防。不足爲壯。當時節度營下。惟有一朴都正而不爲用焉。則其所取敗。勢所必至。非惟此也。若使其計。早見得行。而募義之兵。達於全州。則匪類之亂。必不至鴟張。而國家爻象。亦不至如今日也。豈止爲一路城守萬全之計而已哉。人之用舍。所係如此。詎不爲千古志士無窮之恨乎。然方賊之倔强也。具牛酒張鼓吹。奔走送迎者。絡繹於道。及其甚恐。則棄城亡郡。脫身偸生者。項背相望。噫。此時焉而不有此人焉。則全湖之地。烏得免無一人義士之責乎。偉韻直節。足以有辭於百世。不可以志之未伸功之未就議之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