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열녀 설씨전(烈婦薛氏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11
열녀 설씨전
설씨(薛氏)의 본관은 순창(淳昌)으로 진사 응룡(應龍)의 딸이며, 참판 옥천군(玉川君) 훈현(勳玄)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온화하고 정숙하였으며, 부인의 덕행을 일찍 성취하였다. 19세에 첨정(僉正) 정진(鄭縉)주 191)에게 시집갔는데, 정진은 본래 나주 사람으로 문정공(文靖公) 가신(可臣)의 후손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현(士賢)의 아들이다. 설씨는 시부모를 섬기고 남편을 받들 적에 내칙을 준수하여 종족에게 칭찬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 첨정공(僉正公)이 재종숙인 정응(鄭鷹)·정홍(鄭鴻) 두 사람과 의병을 일으켜 충렬공 고경명의 막하에 나아갔다. 한달 여 만에 금산에서 패배하였다는 소식이 이르자 설씨가 말하기를, "패하였다고 하니 부군도 필시 화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고는 갑자기 자결하고자 하니 집안사람들이 힘써 만류하였다. 그날 저녁에 남몰래 후원(後園)으로 들어가 또 스스로 목을 매려고 하자 시어머니 김씨가 뒤를 밟아 구원하여 풀어주고 말하기를, "네 남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니,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라고 하였다. 며칠 뒤에 첨정공이 과연 이르렀는데, 마침 일 때문에 밖에 있어서 죽지 않았던 것이다. 정유재란에는 첨정공과 김억추(金億秋) 등 여러 공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켜 대동강을 방어하고 지켰다. 이때에 설씨는 늙은 시어머니 및 재종숙모 정씨와 김씨를 모시고 산골짜기로 피난하고, 여종 몽란(夢蘭)이 따라왔다. 하루는 적이 갑자기 이르러 먼저 그 시어머니를 해치고 또 설씨에게 향하자 설씨가 높은 바위 벼랑에 앉아 큰 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비록 견양(犬羊)과 같은 오랑캐이지만 어찌 조선의 예의의 풍속을 모른단 말이냐."하고는 마침내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었다. 정씨와 김씨도 모두 가까운 곳에 있다가 또 따라 몸을 던져 죽었다. 몽란이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하다가 이어 돌에 부딪혀 죽었다. 그때에 첨정공은 서북 길에서 이리저리 옮겨가며 싸우다가 남쪽으로 내려와 이 충무공의 막하에 속하였는데, 노량의 전투에서 재종숙 두 사람과 동시에 순절하였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보(天寶)의 난주 192)에 의사(義士)는 오직 안노공(顔魯公)주 193) 한 사람뿐이었으며, 오계(五季)주 194)의 말엽에 정녀(貞女)는 오직 왕응(王凝)의 처 이씨(李氏)주 195) 한 사람 뿐이었다. 충렬(忠烈)의 어려움이 예로부터 이미 그러한데, 정씨 일문에 충신과 열부가 성대하여 끊이지 않았으며, 그 크나큰 기강과 절개, 유풍과 여운이 환하게 사람의 이목을 비추었으니 아, 공경할 만하도다. 다만 구중궁궐은 깊고도 멀어 정려(旌閭)하고 포장(褒獎)하는 일이 적막하여 비록 유감스러운 것 같지만, 만고의 강상(綱常)에 공이 있는 자는 응당 만고의 강상과 시작과 끝을 함께할 것이니, 어찌 한 때에 드러나고 묻힌 것으로 낮다 높다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주석 191)정진(鄭縉)
미상~1598.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자의(子儀)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삼종형제인 정응(鄭鷹)·정홍(鄭鴻)과 함께 고경명(高敬命)의 의진(義陣)에 합세하였다. 고경명의 의병군이 금산전투에서 패배하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묘막에 잠시 피하였다가, 정부에서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진(陣)에 보내는 문서를 전달하는 데 공을 세워 훈련원첨정에 임명되었다. 그 뒤 1598년 노량해전에 참가하였다가 순절하였다.
주석 192)천보(天寶)의 난
천보는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이다. 즉 당시에 일어난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가리킨다.
주석 193)안노공(顔魯公)
노군공(魯郡公)에 봉해진 당나라의 안진경(顔眞卿, 709~785)을 이른다. 자가 청신(淸臣)으로,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으면서 의병을 모아 혁혁한 공을 세우자, 현종(玄宗)이 하북 초토사(河北招討使)로 삼아 북방 일대의 의병(義兵)을 이끌게 하였다. 난이 끝난 뒤에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제수되고 대종(代宗) 때에 노군공에 봉해졌다. 덕종(德宗) 때에 태자 태사(太子太師)가 되었으며, 이희열(李希烈)이 반란을 일으키자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초유(招諭)하러 갔다가 구금되어 3년간 온갖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거절하고 살해되었다.
주석 194)오계(五季)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일어나기까지의 다섯 나라를 말하는데, 후량(後梁)ㆍ후당(後唐)ㆍ후진(後晉)ㆍ후한(後漢)ㆍ후주(後周) 등이다.
주석 195)왕응(王凝)의 처 이씨(李氏)
왕응은 당(唐)나라 때 학자로, 지방의 관찰사(觀察使)가 되었을 때 왕선지(王仙芝)의 반란을 만나 끝까지 성(城)을 지켰다. 왕응이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병으로 죽게 되자 그의 아내 이씨(李氏)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의 유해(遺骸)를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개봉(開封)에 들러 숙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여관 주인이 그녀를 보고 수상하게 여겨 숙박을 거절하며 팔을 잡아당겨 끌어내자, 이씨가 하늘을 보고 통곡하며 "내가 여자가 되어 수절하지도 못하고 다른 남자에게 손이 잡혔으니, 이 손 때문에 내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고는 도끼를 가져다 팔을 잘라 버렸던 고사(故事)가 있다. 《新五代史 卷54 雜傳》
烈婦薛氏傳
薛氏貫淳昌。進士應龍女。參判玉川君勳玄孫。自幼溫仁貞靖。婦行夙就。十九歸僉正鄭縉。縉本羅州人。文靖公可臣后。嘉善士賢子。薛氏事舅姑。奉君子。克遵內則。見稱宗族。壬辰之亂。僉正公與再從叔二人鷹鴻倡義。赴忠烈公幕。月餘錦山敗報至。薛氏曰。一陳敗北。夫君亦必不免。遽欲自處。家衆挽之甚力。其夕潛入後園。又欲自經。姑金氏跟至救解曰。汝夫生死不可知。未晩也。居數日。僉正公果至。適以事在外而得不死也。丁酉再亂。僉正公與金億秋諸公。復起義旅。防守大同江。是時薛氏奉老姑及再從叔母鄭氏金氏。逃難于山峽。婢夢蘭隨之。一日賊猝至。先害其姑。又向薛氏。薛氏據危巖而坐。大聲責之曰。汝雖犬羊。豈不知朝鮮禮義之俗乎。遂投巖下而死。鄭氏金氏俱在傍近。又從而投死。夢蘭抱尸痛哭。因觸石而死。時僉正公自西北路。轉戰南下。隸李忠武幕。露梁之戰與再從叔二人。同時殉節。外史氏曰。天寶之亂。義士惟顔魯公一人。五季之衰。貞女惟王凝妻一人。忠烈之難。自古已然。鄭氏一門。忠臣烈婦。磊落相望。而其宏綱大節。遺風餘韻。炳炳然照人耳目。吁可敬也。但九閽深遠。旌褒寥寥。雖若可憾。然有功於萬古綱常者。當與萬古綱常同其始終。豈一時顯晦所能低昂也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