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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호덕재 문공전(好德齋文公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09
호덕재 문공전
호덕재(好德齋) 문공의 휘는 영국(永國), 자는 사랑(士良)으로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이 현조가 된다. 휘가 자수(自修)이며 호가 면수재(勉修齋)라는 분은 고을 사람들이 사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고조는 세휘(世輝)로 진사를 지냈고, 증조는 명오(命吾)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조부는 희맹(喜孟)으로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는 필진(弼鎭)으로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정부인(鄭夫人)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골격이 준수한 어떤 어르신이 엄숙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와서 스스로를 '분양거사(汾陽居士)'주 174)라 말하였는데, 얼마 뒤에 공을 낳았다. 또 하루는 기어가다가 우물에 떨어진 것을 집안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는데, 까치떼가 우물을 둘러싸고 지저귀니 부인이 가서 보고 건져냈다고 한다. 3세에 참판공이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다하여 울부짖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으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머니를 섬김에 기쁘고 화한 안색으로 효도를 다하였는데, 집안이 본래 가난하여 봉양할 것이 없는 것을 가슴 아파하며 고기 잡고 나무하고 밭 갈고 심어 온갖 필요로 하는 것은 몸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흉년을 당하여서 백리 밖에서 쌀을 짊어지고 올 때에 무뢰배들이 도적을 방비하고 막는다고 하면서 빼앗고자 하자 한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이분은 백암(白巖)의 문효자이시다." 라고 하니 마침내 보호하여 보내주었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몸이 상할 정도로 너무 슬퍼한 탓에 거의 목숨을 잃을주 175) 뻔하였고, 염습하는 도구와 매장하는 절차, 궤전의 의례는 반드시 정성스럽고 미덥게 하였다. 중년 이후로 집안의 형편이 조금 펴지고, 아래로 자제(子弟)의 봉양이 있었다. 자로(子路)가 진수성찬을 먹고 호화롭게 생활하면서도 직접 쌀을 져 올 수 없다고 탄식했던 말주 176)을 욀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백중(伯仲)을 섬김에 공경하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여 나가고 들어오는 것과 나아오고 물러가는 것을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생활이 빈곤하여 백방으로 집안 일을 맡아서주 177)하였는데, 매번 한가한 날이면 형제들이 모여 마주하고 경전을 토론하였다. 하루는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책장사가 지나가자 마침내 밭가는 소를 책과 바꿔 글방을 열어 책을 쌓아두고 널리 어진 사우(士友)를 맞이하여 여러 자손들이 학업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왔다. 평생 태만한 모습이 없었고, 빨리 말하거나 바쁜 기색이 없었다. 실질에 힘쓰고 형식적인 화려함을 제거하였으며, 의를 귀히 여기고 재물을 가벼이 여겼다. 무릇 오랜 벗과 친척 중에 궁핍한 사람이 있으면 힘이 닿는 대로 돌보지 않음이 없었다. 가난해서 장사하지 못한 자를 장사지내주었으며, 그 시집가고 장가들지 못한 자를 시집 장가 보내주었다. 일찍이 자손을 경계하기를, "궁핍하게 홀로 사는 이를 업신여기지 말고, 화려하고 사치함을 따르지 말며, 술과 고기를 즐기지 말고, 장기와 바둑을 가까이 하지 말며, 선비든 농부든 간에 각자 자기의 생업에 부지런히 힘쓰고 부귀와 문장을 능사로 삼지 말고, 다만 대대로 부지런하고 삼가는 자손을 두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라고 하였다. 부인 광산 김씨는 정숙하고 온유하여 시부모 봉양하기를 효도로써 하였고, 남편 섬기기를 공경으로써 하였으며, 집안사람들 대하기를 화목함으로 하였다. 부부가 동갑으로 오래도록 해로하다가 회근례(回巹禮)주 178)를 행하였다. 공의 나이 95세일 때에 정상원(鄭相元, 1678~1754) 부객(府客)이 듣고 이를 가상히 여겨 천거하니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고, 곧이어 숭정대부지중추부사(崇政大夫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대개 이는 우로(優老)의 특별한 은전(恩典)주 179)이었다.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고을의 후생 정의림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고(上古)시대에는 질박함이 흩어지지 않은데다가 성왕(聖王)이 계속 일어나 표준을 세우고 복록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인민(人民)이 번성하고 집안이 평안하여 온 세상을 태평성대의 세상주 180)에서 살게 하였다. 그러나 말세(末世)로 내려와서는 풍속이 경박하여 재앙의 징조가 늘 있는 듯하였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일찍 요절하거나 번뇌주 181)에 시달리며 의지할 곳이 없이 외롭거나 노쇠한 곤액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 오복 중의 한두 개를 얻을 수 있는 자는 몇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일을 살펴보니, 인가(人家)의 흥망성쇠를 겪는 것이 많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그 순전한 길복과 완전한 아름다움은 공의 집만한 곳이 없었다. 집에는 재물을 쌓는 두터움이 있고, 가정에는 후사를 잇는 번성함이 있었으며, 몸은 백수를 누려 지위가 높은 품계에 올랐으며, 강녕하여 아무 탈이 없고 고상하고 아름답게 일생을 마쳐주 182) 자손 백여 명이 모두 박아하고 두터워 각각 한 가지 기예에 통달하였으니, 옛사람들이 이른바 제일가(第一家)라는 것에 못지않을 것이다. 아, 감천(甘泉)은 반드시 예천(醴泉)주 183)의 근원에서 시작하고, 찬란한 옥찬(玉瓚)은 반드시 황류(黃流)를 기다려야 하니,주 184) 만일 덕과 인을 쌓아 하늘을 감동시켜 화기(和氣)를 부른 자가 아니라면, 세상의 수준이 점차 낮아지는 날에 어찌 하늘이 주신 복을 이처럼 두텁게 누릴 수 있었겠는가. 동생(董生)주 185)의 행의(行義)는 본래 천옹(天翁, 하늘)이 굽어 살피심이 있어서였고, 최씨(崔氏) 가문이 창대함은 실로 당씨(唐氏)의 효경(孝敬)에 힘입은 것이로다.주 186)
주석 174)분양거사(汾陽居士)
당(唐) 현종(玄宗) 때의 장수 곽자의(郭子義)로,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기 때문에 흔히 곽분양(郭汾陽)이라 부른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功)을 세웠다. 아들 여덟에 사위 일곱 명이 모두 조정에서 귀현(貴顯)하였고, 손자 수십 명은 다 알아보지 못하여 문안 때면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역사상 가장 팔자 좋은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 인신(人臣)으로서의 영화와 자손의 번성함을 이야기할 때 흔히 예로 드는 인물이다.
주석 175)목숨을 잃을
원문의 '멸성(滅性)'은 부모의 상을 당해 너무 슬퍼한 나머지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한다. 《예기》 〈상복사제(喪服四制)〉에 "사흘이 지나면 죽을 먹고, 석 달이 지나면 머리를 감고, 일 년이 지나면 연제(練祭) 이후의 상복으로 갈아입는다. 몸이 수척해질 정도로 지극히 애통해하더라도 자기의 생명만은 해치지 말아서, 어버이의 죽음 때문에 자기의 생명까지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三日而食, 三月而沐, 期而練, 毁不滅性, 不以死傷生也.]"라고 하였다.
주석 176)자로(子路)가……말
자로가 일찍이 공자(孔子)를 뵙고서 "예전에 제가 두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항상 명아주와 콩잎만 먹는 형편이었으므로, 어버이를 위하여 100리 밖에서 쌀을 져다가 봉양하곤 했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로 남쪽으로 초나라에 노닐 적에 따르는 수레가 100여 대요, 만종의 곡식을 쌓아 두고 요를 여러 겹으로 깔고 앉아서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먹으면서는 다시 명아주 콩잎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져 오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昔者由也事二親之時, 常食藜藿之實, 爲親負米百里之外. 親沒之後, 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茵而坐, 列鼎而食, 願欲食藜藿, 爲親負米, 不可復得也.〕"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孔子家語 致思》
주석 177)가업(家業)을 계승
원문의 '간고(幹蠱)'는 간부지고(幹父之蠱)의 준말로, 자식이 아버지의 뜻을 잘 계승하여 아버지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사업을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고괘(蠱卦) 초육(初六)〉에 "초육은 아버지의 일을 주관함이니, 자식이 있으면 돌아간 아버지가 허물이 없게 된다.[初六, 幹父之蠱, 有子, 考无咎.]"라고 하였다.
주석 178)회근례(回巹禮)
혼인(婚姻)한 지 60주년(週年)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회혼례(回婚禮)라고도 한다.
주석 179)우로(優老)의 특별한 은전(恩典)
나라에서 노인을 공경하는 뜻으로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관직(官職)을 내리는 은전을 말한다.
주석 180)태평성대의 세상
원문의 '수역(壽域)'은 인수지역(仁壽之域)의 준말로, 천수(天壽)를 다하며 살 수 있는 태평성대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권22 〈예악지(禮樂志)〉의 "한 세상의 백성들을 몰아서 인수의 지역으로 인도한다면 풍속이 어찌 성강 때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수명이 어찌 고종 때처럼 되지 않겠는가.[驅一世之民 濟之仁壽之域 則俗何以不若成康 壽何以不若高宗]"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석 181)번뇌
원문의 '결루(缺漏)'는 불교 용어로 번뇌를 말한다. 번뇌는 심신을 얽매므로 결(缺)이라 하고, 눈 귀 등의 6근으로부터 밤낮으로 누설하기 때문에 누(漏)라고 한다.
주석 182)고상하고……마쳐
훌륭한 행실로 유종의 미를 거두며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시경》 〈기취(旣醉)〉 3장에 "광명정대함이 환히 빛나니 고명(高明)하여 마침을 잘 하리라. 마침을 잘하는 데 시작이 있으니, 제사의 시동(尸童)이 좋은 말을 고하도다.〔昭明有融 高朗令終 令終有俶 公尸嘉告〕"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주석 183)예천(醴泉)
감미로운 물이 솟아난다는 신비한 샘인데, 훌륭한 자손이 나는 가문에 그 조상의 근원이 있음을 말한다. 옛말에 "신령한 지초와 단맛의 샘물은 반드시 뿌리와 근원이 있다." 하였다.
주석 184)찬란한……하니
옥찬(玉瓚)은 옥 손잡이에 바닥은 금으로 된 국자로 강신제 때 쓰며, 황류(黃流)는 종묘의 제사에 쓰기 위하여 울금향을 넣어 만든 술이다. 울금의 뿌리를 넣으면 술빛이 황색으로 변하므로 황류라고 한 것인데, 모두 귀한 인재를 뜻한다. 《시경》〈대아(大雅) 한록(旱麓)〉에 "아름다운 저 옥 술잔에 황류가 담겨 있도다.[瑟彼玉瓚, 黃流在中.]"라고 하였다.
주석 185)동생(董生)
동생은 중국 당(唐)나라의 동소남(董召南)을 말한다. 동소남(董邵南)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소남은 진사과에 낙방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주경야독하면서 살림을 잘 꾸려 부모를 편안하게 모시고, 처자식이 근심이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동소남의 모습을 그와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한유가 〈차재동생행(嗟哉董生行)〉이라는 고시를 지어 "아, 동생이여, 아침엔 들에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엔 돌아와서 옛사람의 글을 읽네. 하루 종일 쉬지를 않으며,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물에 가서 고기도 잡네. 주방에는 맛난 음식 갖춰져 있고, 대청에선 평안한지 물어본다네. 부모님은 근심을 아니하시고, 처자식은 탄식을 아니 한다네.[嗟哉董生朝出耕, 夜歸讀古人書. 盡日不得息, 或山而樵, 或水而漁. 入廚具甘旨, 上堂問起居. 父母不戚戚, 妻子不咨咨.]"라고 칭찬하였다.《韓愈集 卷2 古詩》
주석 186)최씨(崔氏)……것이로다
최씨 가문에 시집온 당부인(唐夫人)이 효경(孝敬)으로 최씨 집안을 창대하게 하였다는 말로, 김씨 부인을 칭찬한 표현이다. 당(唐)나라 때 산남서도 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를 지낸 최관(崔琯)의 증조모 장손 부인(長孫夫人)이 나이가 많아 치아(齒牙)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자, 최관의 조모 당부인이 수년 동안 시어머니인 장손 부인에게 젖을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손 부인은 죽을 때 집안 식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며느리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며느리의 자손들이 모두 며느리처럼 효도하고 공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최씨의 가문이 어찌 창대(昌大)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新唐書 卷182 崔琯列傳》
好德齋文公傳
好德齋文公諱永國。字士良。江城君益漸爲顯祖。有諱自修號勉修齋。鄕人祭于社。高祖世輝進士。曾祖命吾贈掌樂院正。祖喜孟贈戶曹參議。考弼鎭贈戶曹參判。妣鄭夫人嘗夢。有一丈人。風骨俊偉。儼然入室。自稱汾陽居士。己而産公。一日匍匐而落於井。家人不知也。有羣鵲擁井而噪。夫人往視而拯救之。三歲參判公違背。索呼孺啼。晝夜不輟。見者無不釀涕。事慈幃。極其怡愉。家素貧。傷無以養。漁樵耕稼。凡百所須。無不身親爲之。遇飢歲。負米百里之外。無賴輩稱以防禁。欲攘奪之。有一人知之曰。此白巖文孝子。遂護送之。遭艱。致哀毁。幾滅性。襲斂之具。掩厝之節。饋奠之儀。必誠必信。中年以後。家力稍紓。下有子弟之奉。每誦子路列鼎累茵。歎不得爲親負米之語。而不覺嗚咽沾衿。事伯仲。敬之如嚴父。出入進退。必稟而行早孤貧。幹蠱百端。而每於暇日。兄弟聚對。討論經籍。一日出耕于野。有冊商過之。遂以耕牛易之。開塾儲書。廣延賢士友。以資諸子孫肄業。平生無怠慢之容。無疾遽之色。務實而祛華。貴義而輕財。凡知舊族戚有窮乏者。無不隨力存恤葬其不能葬者。嫁娶其不能嫁娶者。嘗戒子孫不侮窮獨。不服華靡。勿嗜酒炙。勿近博奕。於士於農。各勤其業。不以富貴文章爲能事。但世世有勤勅子孫。是吾願也。齊光山金氏。貞靜柔嘉。奉舅姑以孝。事君子以敬。待家衆以和。同庚偕老。行回巹禮。公年九十有五。鄭相元府客聞而嘉賞薦。除五衛將。尋拜崇政大夫知中樞府事。蓋優老別恩典也。後三年而終。鄕里後生鄭義林曰。上古大樸未散。加以聖王繼作。建極錫福。是以生齒繁庶。家用平康。躋四海於壽域。降及叔季。俗澆數薄。咎徵恒若。人之生於其間多夭札缺漏煢獨殘悴之厄。而得有其五福之一二者。無幾人矣。余自省事。閱人家興替。不啻多矣。而其純吉全美。未有若公家也。家有居積之厚。庭有似續之蕃。身享百壽。位躋崇品。康寧無恙。高朗令終。子孫百餘人。皆博雅長厚。各通一藝。古人所謂第一家者。不爲專美矣。嗚乎。甘泉必自醴源。瑟瓚必待黃流。如非積德累仁感召和氣者。則在世級浸降之日。而豈能享此天餉若是其厚耶。董生行義自有天翁之降監。崔門昌大。實賴唐氏之孝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