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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유인 박씨전(孺人朴氏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08
유인 박씨전
유인 박씨(孺人朴)는 본관이 밀양(密陽)으로, 임진왜란 때 충신인 지수(枝樹)의 후손이다. 고조는 경옥(慶沃)이며, 증조는 문환(文煥)으로 진사를 지냈다. 조부는 재두(在斗)로 절충 장군(折衝將軍)에 올랐으며, 아버지는 영진(英鎭)으로 온화하고 자혜로웠다. 어려서부터 효행(孝行)이 있고 유순(柔順)하여 부모에게 사랑을 받았다. 19세에 사인(士人) 이승우(李承愚)에게 시집갔는데, 남편을 섬기고 시부모를 봉양함에 반드시 정성스럽고 공경하여 부덕이 두루 지극하였다. 남편 집안은 대대로 문학을 일삼아 매우 청빈하였으므로 유인이 집안일을 맡아 다스림에 부지런하고 살림을 꾸려감에 검소하여 새벽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잠시도 한가할 겨를이 없었다. 이 때문에 집안의 형세가 점차 펴져서 어버이에게 올리는 좋은 음식이 모자람이 없었다. 하루는 그 시어머니의 옷상자를 모르게 열어보고는 마침내 자신이 시집올 때 보관해둔 화려한 옷을 꺼내어 빨아서 바꿔 넣었다. 시부모의 물건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또 이처럼 하였다. 만년에 집안이 횡액(橫厄)을 당한 것은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유인(孺人)은 조금도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평소에 수숙(嫂叔)주 172) 사이에도 공경이 쇠하지 않았고, 동서 간에 화목함을 잃지 않았으며 어린 조카아이들에게 자애로움이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형제가 한솥밥을 먹으며 떨어져 산 적이 없었다. 늘그막에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겨우 6살이 되었을 때 유인이 세상을 떠났다. 군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미한 선비의 아내와 약한 나라의 신하는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라 여겼으니, 사람을 보는 데 있어서 쉬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지 말고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유인의 행실과 도덕 같은 경우는 옛날의 정숙한 여인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시경(詩經)》에,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로다.'주 173)하였으니, 지금 남겨진 아들이 어찌 장래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그 어머니의 어짊을 드러내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주석 172)수숙(嫂叔)
형제와 형제의 아내들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주석 173)시경(詩經)에……준다
《시경》은 대아(大雅)의 〈기취(旣醉)〉편을 이른다. 이 시에,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써 따르게 하리로다.[其僕維何? 釐爾女士. 釐爾女士, 從以孫子.]" 하였는데, 주자는 《집전》에서 '釐' 자를 '주다'라는 의미의 '予'로 풀이하였다.
孺人朴氏傳
孺人朴氏。貫密陽。壬辰忠臣枝樹后。高祖慶沃。曾祖文煥進士。祖在斗折衝。考英鎭。溫仁慈惠。自幼以孝順。鍾愛於父母。十九歸士人李承愚。事君子奉舅姑。必誠必敬。婦德周至。夫家世業文學。淸貧殊甚。孺人勤於幹理。儉於調度。夙興夜處。暫不暇逸。是以家力稍紓。而親旨不匱。一日密啓其姑衣篋。遂出己于歸時所貯華服。澣替其色納之。待乏又如之。晩年家遭橫厄。人所不堪。而孺人少無幾微色。平日敬不衰於嫂叔。和不失於娣姒。慈不替於兒姪。是以終孺人之身。兄弟共爨。未有分離。晩得一子。甫六歲。而孺人謝世。君子曰。寒士之妻。弱國之臣。自古以爲難。觀人不於其所易。而於其所難。若孺人之行之德。視諸古之貞女淑媛。可以無愧矣。詩曰。釐爾女士。從以孫子。今所遺子。安知不將來立揚以顯其母氏之賢也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