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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열부 양씨전(烈婦梁氏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07
열부 양씨전
열부 양씨(梁氏)는 제주 사람으로 아버지는 상룡(相龍), 조부는 주진(柱震), 증조는 홍우(鴻友)이다. 기묘명현 혜강공(惠康公) 양팽손(梁彭孫)주 167)의 12세손으로, 순조 계사년(1833, 순조33)에 능주 초방리(草坊里)에서 태어났다. 정숙하고 유순하여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고, 《열녀전》과 《소학》 등의 책을 읽고 대략 그 대의를 깨우쳤다. 부모를 섬김에 온화한 말과 공손한 낯빛으로 말을 듣고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다. 18세에 사인(士人) 박서진(朴瑞鎭)에게 시집갔는데, 박씨의 본관은 밀양(密陽)으로 임진왜란 때 충신인 좌승지에 추증된 박지수(朴枝樹)주 168)의 후손이다.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 서진이 병으로 위독하자 열부(烈婦)가 단지(斷指)하여주 169) 소생시켰으나 조금 있다 다시 숨이 끊어졌다. 열부는 남편을 따라 죽을 것이라고 맹서하고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는데, 시부모와 집안사람들이 매우 간절히 타이르고 힘써 막으니 열부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혼수로 해온 장신구와 복식(服飾), 금비녀와 옥반지 등을 헐값으로 팔아 상례와 장례의 비용을 마련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전(祭奠)주 170)은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삼갔으며, 비린 고기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시부모를 곁에 모시면서 슬퍼하는 마음이 얼굴과 말에 나타나지 않게 하였으며, 맛있고 부드러운 음식을 마음을 다해 힘써 장만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 힘썼다. 종자(從子, 조카) 준옥(準珏)을 후사로 삼고 가르치고 기름에 법도가 있어 마침내 이름난 선비가 되게 하였다. 하루는 병이 깊어지자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서 그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일찍 남편을 잃었는데 지금까지 죽지 못한 것은 다만 너를 가르치고 성취시켜 너의 아버지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 할 일은 이미 다하였으니 죽은들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다만 너에게 바라는 것은 내가 너에게 기대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 침상에 드러누워 영면하였다. 고을에서 그 열효(烈孝)를 아름답게 여겨 추천하여 상사(上司, 상급 관청)에 보고함이 전후로 끊이지 않았다. 고을 사람인 정의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일찍이 노사 선생을 모시고 문문산(文文山)주 171)이 죽지 않는 것에 대해 물었더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충신과 열부는 그 뜻이 하나다. 부인이 그 남편을 잃었을 적에는 그 궤전을 받들고 그 장례를 경영해야 하며, 자식이 있으면 양육하고 자식이 없으면 이어야 하며, 가르치고 성취시켜 그 후손을 전하고 그 집안을 보존해야 하니, 어찌 다만 남편을 따라 죽는 것만을 열(烈)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셨다. 아, 내가 일찍이 그 말을 들었는데, 이제야 그러한 사람을 보았도다. 훗날 삼강의 붓을 잡은 자가 마땅히 높은 행실과 훌륭한 여인의 자리에 편입한다면 그들의 아름다운 행적에 필적할 것이다.
주석 167)양팽손(梁彭孫)
1488~1545.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이다. 중종조에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는 독서로 소일하였다. 그 후 김안로(金安老)가 사사(賜死)된 뒤에 용담 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나아갔지만, 곧 사임하고 다음 해에 죽었다.
주석 168)박지수(朴枝樹)
1552~159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무중(茂仲), 호는 모봉(茅峰)으로,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임진왜란 때 특명으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호위하여 북도로 피난 도중 적병 수천 명을 만나 삼일간의 접전 끝에 온몸에 상처를 입어 회령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노복이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오자 부인 노씨가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고, 이 광경을 지켜본 노비 근춘(斤春) 역시 자결하였는데 이에 일문삼절(一門三節)이 배출되었다고 회자되며 이들의 충절이 높이 평가되었다 한다.
주석 169)단지(斷指)하여
원문의 '혈지(血指)'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리는 것인데, 효자가 생명이 위독한 부모에게 자신의 피를 먹여 살리기 위해 하는 행동이다.
주석 170)제전(祭奠)
원문의 '궤전(饋奠)'은 매장하기 전까지 제사 형식을 갖추지 않고 음식을 올리는 예를 말하나, 일반적으로 제물을 갖추어 제사지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석 171)문문산(文文山)
문산(文山)은 남송(南宋)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2)의 호이다. 그는 송 이종(宋理宗) 때 우승상(右丞相)으로 화의(和議)하러 원(元)의 궁중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밤에 도망쳐서 온주(溫州)로 돌아왔다. 익왕(益王)이 즉위하여 그를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하고 강서(江西)의 도독(都督)으로 삼았으나 또 원군에게 패전하였다. 위왕(衛王)이 즉위하여서는 신국공(信國公)의 봉(封)을 받고 조양(潮陽)에 주둔하였다가 원장(元將) 장홍범(張弘範)에게 패전하여 포로가 되어 연경에 3년 동안 억류(抑留)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신의 충절(忠節)을 나타내고 죽었다.
烈婦梁氏傳
烈婦梁氏。濟州人。考相龍。祖柱震。曾祖鴻友。己卯名賢惠康公彭孫十二世孫也。以純廟癸巳生于綾之草坊里。貞靜柔嘉。婦德純備。列女傳小學等書。略曉大義。事父母。溫言恭色。聽從女流。十八歸士人朴瑞鎭。朴氏貫密陽。壬辰忠臣贈左承旨枝樹后。歸未幾瑞鎭得劇疾。烈婦血指得蘇。俄而復絶。烈婦誓下從。絶不飮食。舅姑及家人。諭之甚懇。防之甚力。烈婦不得已而起。斥賣資裝服飾金釵玉環等物。以爲治喪營葬之費。朝夕饋奠。必誠必愼。腥臊之味。不入於口。在舅姑側。悲慘之意。不形於色辭。甘毳之供。極意營辦。務悅其心。以從子準珏爲後。敎養有法。遂成名士。一日沈疾。沐浴着新衣。招其子語曰。早失所天。而至今未亡。只爲汝敎養成就。使汝父不至乏祀也。吾事已畢。死復何恨。只願汝無負吾期汝之意也。言訖就枕而逝。鄕里嘉其烈孝。剡報上司。前後續續。鄕里人鄭義林曰。余嘗侍蘆沙先生。問文文山不死。先生曰。忠臣烈婦其義一也。婦人之喪其夫也。奉其饋奠。營其窆葬。有子則養育之。無子則繼續之。敎誨成就。以傳其後。以存其家。豈只以從夫死爲烈哉。嗚乎。余嘗聞其語而今見其人矣。後之秉三綱之筆者。宜其編入於高行令女之次。與之匹美而齊休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