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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취곡 조공전(翠谷曺公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05
취곡 조공전
공의 휘는 여흠(汝欽)이고, 자는 사명(士明)이며, 취곡(翠谷)은 그의 호이다. 조씨의 계파는 창녕(昌寧)에서 나왔는데 대악서(大樂署)를 지낸 승겸(承謙)이 그의 원조(遠祖, 고조 이전의 먼 조상)가 된다. 철야군(鐵冶君)을 지낸 정통(精通)과 충청감사(忠淸監司)를 지낸 경식(景湜)은 모두 중엽의 현조(顯祖)이다. 고조부 청(淸)은 문과 급제하고 청도 군수(淸道郡守)를 지냈으며, 증조부 효신(孝信)은 유일(遺逸)주 147)로 광양 현감(光陽縣監)에 제수되었다. 조부 걸(傑)은 호가 묵헌(默軒)이며 은덕(隱德)이 있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아버지 언인(彦仁)은 호가 만은(晩隱)으로 장예원(掌隷院)과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정(嘉靖) 기유년(1549, 명종4)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의젓하고 총명하며주 148) 재주가 영민하였다. 3세에 육갑(六甲)을 외우고, 4세에 《효경》을 배웠으며, 5세에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한번 보면 외웠다. 6~7세에 글을 짓고, 9세에 《대학》을 읽어 대의(大義)를 살폈다. 이때부터 사자 육경(四子六經)을 차례로 관통하였다. 한문공(韓文公)의 '눈물을 머금고 패수를 건넌다'[含淚渡灞]'는 구절주 149)을 읽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자신에게 있는 도리를 힘쓸 뿐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한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15세에 율곡 선생에게 폐백을 갖춰 찾아뵙자 선생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 칭찬하고 매우 아꼈다.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떨쳐버리고 오로지 심성(心性)을 보존하여 기르고 독실히 실천하는 것을 주로 삼았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 기쁜 얼굴빛과 부드러운 태도로 지물(志物)의 봉양주 150)에 빠뜨림이 없었다. 병환이 있으면 옷을 벗지 않고 간호하였으며,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한데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며 자신의 몸으로 어버이의 병을 대신하도록 빌었다. 정묘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니주 151) 대개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힌 것주 152)이었다. 용강(龍岡)의 기슭에 학당을 짓고서 두문불출하며 자취를 끊고 학문을 익히는 데에 마음을 다하니 원근의 사우들이 소문을 듣고 와서 모인 자가 매우 많았다. 은병학규(隱屛學規)주 153)에 의거하여 과정(課程)을 세우고 정성껏 인도하여 성취한 바가 많았다. 일찍이 사람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학문은 남보다 낫기를 힘쓰고 처신함은 항상 남에게 낮추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또 시문(時文, 과거시험을 위한 문체)을 일삼는 자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덕을 지닌 자는 훌륭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주 154) 성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끝내 문장의 오묘함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주 155), 지천(芷川) 김공희(金公喜)주 156),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주 157), 서곡(書谷) 임분(林賁, 1501~1556) 등 명가(名家)들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석천이 공에게 준 시는 다음과 같다.

호산의 비범한 기상에 규성이 내려와주 158) (湖山奇氣降奎躔)
젊은 나이주 159)에 남두주 160)의 향기로운 명성 떨쳤네 (南斗香名屬妙年)
문장의 이치 깨우침은 오히려 여사요 (文章契悟猶餘事)
집안에서 의를 행함은 천성대로 하는구나 (行義居家素性然)

만력 기묘년(1579, 선조12)에 생을 마쳤으니 향년 31세였다. 2남을 두었는데, 주부를 지낸 장일(長日)과 장두(長斗)이다. 외사씨(外史氏)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은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주 161) 학문을 연마하고 넓혀나간 것이 이처럼 성대하였지만, 멀고 외진 곳에서 재능을 감추고 수명도 또 길지 않아서, 나아가서는 그 의를 행하지 못하고 물러나서는 그 도를 전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과 사람이 서로 도모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아, 우리 조정의 명종(明宗)과 선조(宣祖)께서 다스리던 밝은 세상에 태어나 살았으며,주 162) 이 문성 선생(李文成先生, 이율곡)을 스승으로 삼아 수사낙민(洙泗洛閩)주 163)의 학문을 얻어 들었으니 좋은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고, 또한 훌륭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저 지위의 높고 낮음과 수명의 길고 짧음이 어찌 경중이 되겠는가.
주석 147)유일(遺逸)
숨은 인재, 즉 산림의 선비로서 학문이 높고 명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유일로 천거되면 왕이 불러서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다.
주석 148)의젓하고 총명하며
원문의 '기억(岐嶷)'은 《시경》 〈대아(大雅) 생민(生民)〉에 "실로 기어서 능히 숙성(夙成)하였다.[誕實匍匐, 克岐克嶷.]"고 한 데서 온 말로, 총명하고 조숙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형용할 때 쓰는 말이다.
주석 149)한문공(韓文公)의……구절
한유(韓愈)의 시 〈현재에서 생긴 감회[縣齋有懷]〉에 "서책을 품고 황도를 떠나, 눈물을 머금고 푸른 파수 건너네.[懷書出皇都, 銜淚渡淸灞.]"라고 읊은 구절이 있는데, 이 시는 한유가 정원(貞元) 11년 박학굉사시(博學宏詞試)에 급제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경사(京師)를 떠나 낙양(洛陽)으로 간 사실을 읊은 것이다. 《韓昌黎集 卷2 縣齋有懷》 이후 보편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거나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것을 '파수를 건넌다[渡灞]'라고 표현한다.
주석 150)지물(志物)의 봉양
지(志)는 양지(養志)로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하고, 물(物)은 의복ㆍ음식 등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151)정묘년에……합격하였으니
조여흠은 1567년(丁卯, 명종22) 당시 19세의 나이로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 47위로 합격하였다.
주석 152)어버이의……것
한(漢) 나라 모의(毛義)가, "태수 사령장을 받고 기뻐한 것은 늙은 부모를 위해서이다[奉檄而喜爲親屈也]." 라고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69 劉趙淳于江劉周趙列傳序》.
주석 153)은병학규(隱屛學規)
율곡 이이가 해주 석담천(石潭川)에 은거하면서, 주희(朱熹)가 무이산(武夷山)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살았던 것을 본떠서, 1576년(선조9)에 석담천 아홉 굽이의 다섯째 굽이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만든 규약을 말한다. 《輿地圖書 黃海道 海州》
주석 154)덕을……있고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이르기를,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합당한 말이 있지만, 말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고 하였다.
주석 155)임억령(林億齡)
1496~1568.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태수(太樹), 호는 석천이다. 을사사화 때 아우 임백령(林百齡)이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일파에 가담하는 것을 보고 해남(海南)에 은거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하였다. 저서에 《석천집》이 있다.
주석 156)김공희(金公喜)
1540~1604.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지명(之明)·지천(芝川)으로 조선전기 화순 출신의 문신이다. 1564년(명종19)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0년(선조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종사관(從事官), 영광 군수를 거쳐 남원 부사를 지냈다.
주석 157)백광훈(白光勳)
1537~1582.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峰)이다. 최경창,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이라 불리며 당풍의 시들을 남겼다. 28세인 156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과거를 포기, 정치에 참여할 뜻을 버리고 산수를 방랑하며 시와 서도를 즐겼다. 저서로 《옥봉집(玉峰集)》이 전한다.
주석 158)규성이 내려와
규전(奎躔)은 28수(宿)의 하나인 규성(奎星)의 자리로, 그 별자리의 모양이 문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하여, 문장(文章) 혹은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주석 159)젊은 나이
원문의 '묘년(妙年)'은 '묘령(妙齡)'과 같은 말로 20세 전후의 젊고 꽃다운 나이를 뜻한다.
주석 160)남두
이십팔수의 하나인 두수(斗宿)로, 남쪽 하늘에 여섯 별로 구성되었으며, 북두칠성같이 술구기 모양이어서 남두(南斗)라고 하였다.
주석 161)벼슬을 시작하여
원문의 '발인(發軔)'은 수레바퀴의 버팀목을 빼고 수레를 출발시킨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젊어서부터 청운의 벼슬길에 들어섰다는 말이다. 조여흠은 19세의 젊은 나이로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주석 162)명종(明宗)과……살아
조여흠은 기유년(1549, 명종4)에 태어나 기묘년(1579, 선조12)에 세상을 떠났으니 명종과 선조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주석 163)수사낙민(洙泗洛閩)
유학을 말한다. 수사는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 곡부 근처를 흐르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인데, 공자가 이곳에서 강학을 하였기 때문에 대개 공자와 그 학문을 뜻하는 말로 쓰였으며, 낙민은 송나라 때의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와 민중(閩中)의 주희(朱熹)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翠谷曺公傳
公諱汝欽。字士明。翠谷其號也。曺氏系出昌寧。以大樂署承謙爲遠祖。鐵冶君精通。忠淸監司景湜。皆其中葉顯祖也。高祖淸文科淸道郡守。曾祖孝信遺逸除光陽縣監。祖傑號默軒。隱德不仕。考彦仁號晩隱。以掌隷直長。歸老鄕里。以嘉靖己酉生。公體質岐嶷。才性穎悟。三歲誦六甲。四歲授孝經。五歲讀小學。一覽成誦。六七歲能綴文占句。九歲讀大學。究見大義。自是四子六經。次第淹貫。讀韓文公含淚渡灞之句。歎曰。君子自處。當勉其在我者而已。何必乃爾。成童贄謁栗谷先生。先生見而異之。稱許甚重。自是刊落擧業。專以存養踐履爲主。事親也怡色婉容。志物無闕。有疾則衣不解帶。夜不就枕。露禱稽顙。祈以身代丁卯中司馬。蓋爲親屈也。結塾於龍岡之麓。杜門絶迹。專心治學。遠近士友。聞風來集者甚衆。依隱屛學規以立課程。諄諄誘掖。多所成就。嘗戒人曰。學問則務勝於人。處己則常屈於人。又戒人之業時文者曰。有德者有言。全昧性理之學者。終不得文章之妙。與林石川金芷川白玉峯林書谷諸名勝爲道義交。石川贈公詩曰。湖山奇氣降奎纏。南斗香名屬妙年。文章契悟猶餘事。行義居家素性然。萬曆己卯終。享年三十一。二男。曰長日官主簿。曰長斗外史氏曰。公以英才偉器。早年發軔。琢磨展拓。若是其盛。而潛光遐隅。壽又不遐。使進不得行其義。退不得傳其道。豈天人之不相謀。有如是耶。嗚乎。生於我朝明宣日中之世。以李文成先生爲師而得聞洙泗洛閩之學。則不可謂不遇於世矣。亦不可謂不遇於人矣。彼位之崇卑。壽之長短。曷足爲軒輊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