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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경묵재 문공전(敬默齋文公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04
경묵재 문공전
문공의 휘는 영찬(永瓚), 자는 사규(士圭), 경묵(敬默)은 그이 서재 이름이다. 계파는 남평(南平)에서 나왔으며, 중엽(中葉)에 단성(丹城)으로부터 능주(綾州)로 옮겨와 머물러서 대대로 유림(儒林)의 명가(名家)가 되었다. 증조는 휘 명오(命吾)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으며, 조부는 휘 희맹(喜孟)으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고, 아버지는 휘 필진(弼鎭)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흥양 이씨(興陽李氏) 형구(馨久)의 따님으로 영조 기묘년(1759, 영조35)에 능주 백암리(白巖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4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프고 그리운 마음에주 142) 지나치게 애통해하니 이웃 사람들도 이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집안이 평소 매우 가난하여 부지런히 일해 봉양하고 입에 맞는 음식이나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계모(繼母) 정씨(鄭氏)를 섬김에 그 순순히 받들기를 지극히 하니 조금도 흠잡는 말이 없었다. 무신년(1788, 정조12)에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3년 동안 바람과 비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상기(喪期)를 마치자, 여막을 이용해 서실을 지어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드러내니 무덤 아래 마을 사람들이 그 뜻에 감동하여 온 산 하나를 문씨의 땅이라고 하고 서로 경계하며 침범하지 말도록 하였다. 아우 2명은 영권(永權)과 영국(永國)이며,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말 한 마디도 화순함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공이 문묘(文廟)에 예기(禮器)가 부서진 것을 보고 이에 법제를 강구해서 중수하여 한껏 새롭게 하였다. 능주의 북쪽에 개와 평전(蓋瓦坪田) 수천 이랑이 있었는데, 예부터 도랑에 물을 댈 수가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가뭄으로 인한 피해를 당한 적이 많았다. 그러므로 공이 형세를 헤아려 둑을 쌓고 도랑을 통하게 하였으니 이에 땅이 비옥하게 되고 풍년이 들었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물을 건너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공이 돌을 운반하여 다리를 놓아 옷을 입거나 걷고 건너는주 143) 근심을 없게 하였다. 갑술년(1754, 영조30)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죽는 이가 많았는데, 공이 의연금을 내고 진대(賑貸, 진휼(賑恤)하여 빌려 주던 일)하여 살아난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 자상하고 화락하며 넓고 단아하고 후덕하여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고 사물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 마음을 쏟은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일가친척들로부터 효성스럽다는 칭찬을 받고 향당으로부터 공손하다는 칭찬을 받았으며, 붕우(朋友)는 그 믿음을 칭찬하고 사림(士林)은 그의 현명함을 칭찬하여 아녀자와 종들까지도 군자다운 사람으로 그를 지목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을해년(1815, 순조15) 2월 10일 정침(正寢, 평소에 거처하던 곳)에서 향년 57세로 생을 마쳤다. 선영 축좌(丑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후생 정의림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공이 세상을 떠난 지가 100년 안팎이 되었다. 우리 조정의 문명(文明)이 전성(全盛)한 운세가 공의 대에 와서는 해가 중천에 뜰 정도일 뿐만이 아니었다. 매번 당시의 공경대부 및 향리 사족들을 볼 때마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있으며, 풍류가 돈후하고 기상이 드높아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 왕왕 이와 같았으니, 이는 열성(列聖)께서 배양하심이 깊고 선정(先正)이 찬조(贊助)한 두터운 덕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나는 일찍이 문묘(文廟)에 들어가 제사 돕는 일을 맡은 적이 여러 번이었으며, 개와평(蓋瓦坪)을 지나 백암교(白巖橋)를 건넌 것도 또한 여러 번이었지만, 아직껏 뇌준(罍樽)주 144)과 변두(籩豆)주 145)를 수리하고, 관개(灌漑)와 제도(濟渡)를 설행한 것이 일찍이 공에게 있었음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 이목(耳目)의 고루함이 어쩌면 이 정도란 말인가. 아, 백성들 일상생활의 중대한 일들이 그의 공로에 힘입었는데도 그 공로를 알지 못하고, 그의 덕을 누리고도 그 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다만 이 한 가지일 뿐이겠는가. 불행히 문명이 전성한 날에 태어나지 못하고, 또 불행히 선진(先進)주 146)이 계시던 100년 전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여 그 글을 읽고 그 풍성을 칭송함에 한갓 사람으로 하여금 통탄스럽고 더욱 그리워하게 할뿐이다. 이에 감히 용렬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전을 짓는다.
주석 142)슬프고 그리운 마음에
원문의 '유모(孺慕)'는 어린아이가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듯 깊이 사모함을 말한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유약(有若)이 자유(子游)와 함께 어린애처럼 사모하는 자를 보고 자유에게 말하기를 "나는 상중에 발을 구르는 의미를 전혀 몰라서 없애고자 한 지가 오래였는데, 슬퍼하는 정이 이 발 구르는 데에 있음을 이제야 알겠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석 143)옷을……건너는
원문의 '게려(揭厲)'는 《시경》〈패풍(邶風) 포유고엽(匏有苦葉)〉에 "깊거든 옷 입은 대로 건너고, 얕거든 옷을 걷고 건널 것이다.[深則厲 淺則揭]"를 요약해서 인용한 것이다. 《시경》 주(註)에 "옷 입은 채로 건너는 것을 여, 옷을 걷고 건너는 것을 게라 한다.[以衣而涉曰厲 蹇衣而涉曰揭]"라고 하였다.
주석 144)뇌준(罍樽)
청동으로 만든 호형(壺形)의 술 단지이다. 양효왕에게는 뇌준이 하나 있었는데, 그 값이 천금이나 나가는 것이었다. 양효왕이 죽을 적에 많은 재산과 보물이 있었는데도 유독 이 뇌준을 아끼어 "이 뇌준을 잘 보전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마라."하였다. 그 뒤에 이 뇌준을 차지하기 위하여 친족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史記 卷58 梁孝王世家》
주석 145)변두(籩豆)
변(籩)은 과일이나 포(脯)를 담기 위하여 대를 엮어서 만든 그릇이고, 두(豆)는 식해나 김치 등을 담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그릇이다. 흔히 제기(祭器)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석 146)선진(先進)
학문이나 지위가 남보다 앞서거나, 어떤 분야에서 연령, 지위, 기량 등이 앞서는 사람, 즉 선배와 같은 뜻이다. 공자가 "선진이 예악에 야인이요, 후진이 예악에 군자라고 하나니, 만일 예악을 쓴다면 나는 선진의 것을 쓰리라.[先進於禮樂野人也, 後進於禮樂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
敬默齋文公傳
文公諱永瓚。字士圭。敬默其齋號也。系出南平。中葉自丹城寓綾州。世爲儒林名家。曾祖諱命吾贈掌樂院正。祖諱喜孟贈戶曹參議。考諱弼鎭贈戶曹參判。妣興陽李氏馨久女。以英宗己卯。生公于州之白巖里。幼而岐嶷。異於凡兒。四歲遭內艱。孺慕過哀。隣里釀涕。家素貧甚。服勞就養。適口便身。無不周備。事繼母鄭氏。極其承順。了無間言。戊申丁外艱。廬墓三年。風雨不廢。服闋。因廬爲齋。以寓終身之慕。墓下村人感其義。環一山爲文氏地。相戒勿侵焉。弟二人。曰永權永國。友愛甚篤。自幼至老。未有一言違和也。公見文廟禮器殘缺。乃講求法制。重修而一新之。州之北。有蓋瓦坪田。可數千頃。古無溝洫可漑。民多見旱。公相度形便。築堤通渠。於是土沃而歲熟。所居濱江。人常病涉。公運石成橋。俾無揭厲之患。甲戌大無。民多餓殍。公出義賑貸。所活爲數百人。其慈祥愷悌。博雅長厚。眷眷於利人澤物者。皆此類也。宗族稱孝焉。鄕黨稱悌焉。朋友稱其信。士林稱其賢。以至婦孺輿儓。莫不以君子人目之。乙亥二月十日。考終于正寢。享年五十七。葬于親塋丑坐之原。後生鄭義林曰。今去公之世爲一百內外年矣。我朝文明全盛之運。至公之世。不啻爲日中之昃。而每見當時公卿大夫及鄕里士族。治家有法。行己有恥。風流篤厚。氣像藹蔚。可以爲後世模範。往往如此。列聖培養之深。先正贊助之厚。可以推矣。余嘗入文廟而執助祭之役者累矣。過蓋瓦坪。渡白巖橋者。亦數矣。而尙未知罍樽籩豆之修。灌漑濟渡之設。曾在於公。其耳目固陋。一至於是耶嗚乎。民生日用大小大事。賴其功而不知其功。食其德而不知其德者。豈但此一事也。不幸而不生於文明全盛之日。又不幸而不生於先進百年之世。讀其書誦其風。徒使人痛歎而增懷也。玆不敢以昧劣辭。謹爲立傳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