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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대곡처사 김공 경범전(大谷處士金公景範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03
대곡처사 김공 경범전
공의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석귀(錫龜), 자는 경범(景範), 호는 대곡(大谷)이며, 계파는 가락(駕洛)에서 나왔다. 6대조 재록(載祿)이 남양(南陽)에서 남원(南原)으로 와 머물렀는데, 자손들이 그곳에 그대로 살았다. 증조는 정삼(鼎三), 조부는 재곤(再坤), 아버지는 낙현(洛賢)으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공은 헌종 을미년(1835, 헌종1)에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는데, 처음 학교에 나아가 동학(同學)들이 《소학》을 읽는 것을 보고 곁에서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더니, 앉을 때에 반드시 단정히 손을 모으고 행동할 때에 반드시 삼가고 찬찬히 하였으며, 쇄소(灑掃)와 정성(定省)주 128)을 하나하나 준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소학》을 수업 받기를 청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8세에 들어가는 《소학》은 지금은 행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책을 끼고 집으로 돌아가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고 강습함에 법도가 있었다. 그때에 곡성 땅에서 살고 있었는데, 같은 고을에 사는 이곤수(李崑壽)주 129)라는 분이 명망이 높은 선배 대학자로 행의가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그를 따랐다. 18세에 노사선생에게 폐백을 갖춰 찾아뵙고서 학문하는 방법을 듣고 가족을 이끌고 광주(光州)의 대곡(大谷)에 우거하였으니, 이는 대개 사문(師門)을 가까이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변변찮은 음식마저 자주 걸렀으며, 직접 밭을 갈고 손수 호미질하여 어버이의 음식을 장만하였다. 학당에 들어가 독서주 130)하며 생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곁에서 부지런히 시중들며 안팎으로 수응(酬應)하였다. 다시 여가의 시간이 나면 시를 수창하고 정서를 함양하여 성현의 뜻을 구하였으며, 면밀히 연구하고 생각을 펼쳐서 사물의 은미한 뜻을 끝까지 궁구하였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몸소 살펴 실천하는 실상을 다하였으며, 평온하고 조용하며 과묵하게 본원의 요체를 함양하였다. 그 일상생활의 절도는 정확한 규범이 있었으니, 마음을 세우는 것은 충신(忠信)을 위주로 삼아 비록 홀로 방구석주 131)의 깊고 은밀한 곳에 있을지라도 상제(上帝)를 대하듯 하였고,주 132) 몸가짐은 단정하고 엄숙함으로 근본을 삼아 비록 평소 사사로운 자리에서 다급한 때라도 언제나 우뚝하게 산처럼 서있었다. 스스로 기약함은 성인으로 기준을 삼아 털끝만큼이라도 미치지 않으면 문득 나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라 하였고, 스스로의 임무는 천하를 자신의 법도로 삼아 한 가지라도 빠짐이 있으면 반드시 나의 기운이 관여하지 못한 것이라 하였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 뜻을 바르게 하여 따지거나 피하려는 뜻이 없었고, 남을 대할 때에는 인(仁)을 드러내어주 133) 시기하거나 원망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청렴하고 절개가 있어 4,000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며,주 134) 기량(氣量)은 바다가 만곡(萬斛)을 실은 배를 포용하듯 그 끝을 볼 수 없었다. 문사(文辭)로 말하자면 숙속(菽粟)과 포백(布帛)처럼 실용적이어서주 135) 비록 그다지 귀하지는 않아도 일상생활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았고, 출처(出處)할 때에는 궁벽한 마을에서 늙어 죽더라도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는주 136)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바가 있었다. 태극(太極)과 성명(性命)에서부터 일용의 전례(典禮)에 이르기까지 깊이 연구하고 분석[勘覈]하여 조리가 서로 이어졌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자 자잘한 것이 완전히 이해되고 긍지(矜持)하던 것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마디 말과 행실에 이르러서는 안배(按排)하거나 조작(造作)한다든지 주저하거나 구차스러운 모양이 전혀 없었다. 노선생(老先生, 노사(蘆沙) 선생을 가리킴)의 초상 때 장례에 모인 수천 명이 공과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을 추대하여 상례(相禮)주 137)로 삼았으니, 제작(制作)의 근원을 미루어 근본하고, 손익(損益)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의절(儀節)을 정하여 행하였다.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늙어 집으로 물러나서는 스승의 도가 전해지지 못할까, 예전의 학업이 성취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노쇠하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조금도 자신에게 관대함이 없었다. 을유년(1885, 고종21) 8월 8일 묵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1세였다. 그의 벗 정의림(鄭義林)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대가 정주(程朱)로부터 멀어져 의론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후생(後生)이 늦게 진출하여 어디로 향해야 할 바를 모르지만, 그 대공지정(大公至正, 지극히 공변되고 올바름)하여 사람들을 모아 절충하여 정주(程朱)의 강토(疆土)를 예전처럼 깨끗할 수 있게138)138) 깨끗할 수 있게 : 원문의 '확청(廓淸)'은 부정(不正)ㆍ악습(惡習)ㆍ부패(腐敗) 등을 없애어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한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 그러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하에 만약 공과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천고에 전해지지 않는 비결(祕訣)에 대해 선생께서 한마음으로 홀로 터득한 신묘한 이치를 가슴속에 품어둔 채로 거의 누구에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천 년에 한 번 있을 특별한 지우(知遇)라고 할 만하고 세대를 뛰어넘어 마음으로 통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벗을 사귐에 그 뜻이 숭상하는 바를 살펴봄이 매우 많았다. 그 평생에 소소한 출사(出仕)가 없는 것을 보더라도 지적하여 논의할 수 있는데, 초연히 멀리 떠나와서 종시토록 얽매임이 없는 자는 누구이며, 갖은 고생 끝에 야유(揶揄, 남을 빈정대며 놀림)가 심한데도, 당당하게 어떠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학문을 널리 닦고 예(禮)로 자신을 검속하는 공부주 139)가 서로 닦여 함께 이르렀는데도,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에 체용(體用)이 있는 자는 누구이며, 넓으면서도 잡스럽지 않고 번다하고도 어지럽지 않으며, 긍지를 가지고 있되 속이 좁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오만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히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화락하게 절로 탄복하게 하는 자는 누구인가. 아, 나는 공에게서 이러한 것을 보았도다. 공의 도는 비록 그 시대에 행해지지 못하였으나 공의 풍도를 듣고 공의 글을 읽는 자는 반드시 이 말이 아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세 뒤에도 그와 함께 마음으로 이해하고 정신으로 사귀고자주 140) 하는 것임을 알리라. 옛날 채백개(蔡伯諧)가 곽유도(郭有道)의 비명(碑銘)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으니,주 141) 나도 내가 지은 이 전(傳)에 대해 또한 그렇게 말할 뿐이다.
주석 128)쇄소(灑掃)와 정성(定省)
쇄소는 물 뿌리고 청소하는 것으로, 제자(弟子)된 예의를 말하며, 정성은 혼정신성(昏定晨省)으로 부모를 모시는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는 일을 말한다.
주석 129)이곤수(李崑壽)
1808∼1888. 자가 이회(而晦)이고 호가 심재(心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로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의 후손이다. 천품이 단아하고 효도의 마음을 극진히∨하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관통하였으며. 홍매산(洪梅山)과 기노사(奇蘆沙)에게 출입하며 종유(從遊)하였다. 저서로는 《심재집(心齋集)》이 있다.
주석 130)독서
원문의 '행묵(行墨)'은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준말로 깊은 이치를 탐구하지 않고 글자만 따라 책을 읽는 것을 말한다. 독서에 대한 겸사이다.
주석 131)방구석
원문의 '옥루(屋漏)'는 고대에 실내(室內)의 서북쪽 모퉁이에 장막을 치고 신주(神主)를 모시던 곳을 이르는데, 전하여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 혼자 있을 때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중용장구》 제33장에 "《시경》에 이르기를 '네가 홀로 방안에 있음을 보니, 여기서도 방 귀퉁이에 부끄럽지 않게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동하지 않아도 공경하게 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게 한다.[詩云: 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故君子不動而敬, 不言而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132)상제(上帝)를 대하듯 하고
주자(朱子)의 〈경재잠(敬齋箴)〉에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거처하고 상제를 대하듯 경건한 자세를 가져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하였다.
주석 133)인(仁)을 드러내고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인에 드러나며 용에 감추어져, 만물을 고무하되 성인과 함께 근심하지 않으니, 성덕과 대업이 지극하도다.[顯諸仁, 藏諸用, 鼓萬物而不與聖人同憂, 盛德大業至矣哉.]"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것은 인자한 공덕을 발휘하여 만물에 은혜를 입히고, 그 공적을 은밀히 감추어 알지 못하게 함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유능한 인재가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비유한다.
주석 134)말……않았으며
신념이 확고하여 부귀공명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맹자가 상탕(商湯)의 현상(賢相)인 이윤(伊尹)의 마음가짐을 설명하면서, "의롭지 못하거나 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천하를 그에게 녹봉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4000필의 말을 매어 놓는다 하더라도 거들떠보지 않았다.[非其義也, 非其道也, 祿之以天下, 不顧也, 繫馬千駟, 不視也.]"라고 말한 대목이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온다.
주석 135)숙속(菽粟)과 포백(布帛)처럼 실용적이어서
곡식이나 포백은 의식(衣食)의 주요 물품으로서, 이것은 사람마다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전하여 극히 평범하면서도 대단히 유익한 사물을 비유한다. 여기서는 일상생활에 절실한 문장을 의미한다.
주석 136)한……펴는
큰 이익을 위하여 작은 도리를 굽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는 것은 이(利)로써 말한 것이다. 만일 이로써 말한다면 여덟 자를 굽혀서 한 자를 펴 이로울 경우에도 그것을 하겠는가?[夫枉尺而直尋者, 以利言也. 如以利, 則枉尋直尺而利, 亦可爲與?]"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
주석 137)상례(相禮)
관례를 올리는 당사자를 인도하여 예를 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석 139)학문을……공부
박문(博文)은 학문을 널리 하여 사물의 이치를 모두 알고자 하는 것으로 도문학(道問學)에 속하고, 약례(約禮)는 예로써 자신을 단속하는 것으로 존덕성(尊德性)에 속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이르기를 "군자가 문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하였다.
주석 140)정신으로 사귀고자
원문의 '신교(神交)'는서로 만나지 못하고 다만 정신으로 사귄다는 말이다.
주석 141)채백개(蔡伯諧)가……하였으니
사실에 입각하여 비문을 지었다는 뜻이다. 곽유도는 후한 때의 은사(隱士)인 곽태(郭太, 128~169)를 가리킨다. 채옹(蔡邕)이 그의 비문을 〈곽유도비문(郭有道碑文)〉이란 제목으로 짓고 노식(盧植)에게 말하기를 "내가 비명(碑銘)을 지은 것이 많았는데, 모두 그 덕(德)에 부끄러움이 있었으나 오직 이 사람의 비문은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58 高士傳》
大谷處士金公景範傳
公姓金。名錫龜。字景範。號大谷。系出駕洛。六世祖載祿。自南陽寓南原。子孫仍居焉。曾祖鼎三祖再坤考洛賢世有隱德。公以憲宗乙未生。幼而岐嶷。初就塾。見同學有讀小學者。側聽其所受。坐必端拱。行必周折。灑掃定省。一一遵循。因以小學請業。塾師曰。八歲小學。今不可行也。遂挾冊歸家。淨掃一室。講習有程。時寓谷城地。聞同縣李崑壽。以先進宿碩。行義偉然。遂從之。十八贄謁蘆沙先生。得聞爲學之方。挈家寓光州之大谷。蓋就近師門計也。家貧甚。菽水屢空。躬耕手鋤。供給親旨。入塾行墨。課授生徒。左右服勤。內外酬應。更於暇日餘力。諷詠涵暢以求聖賢之旨。硏精覃思以極事物之蘊。鞭辟體察以盡踐履之實。恬靜澹默以養本源之要。其日用節度。的有成規。立心以忠信爲主。雖幽獨屋漏之地。而可以對越上帝。持己以端莊爲本。雖燕私造次之時。而常若卓然山立。自期以聖人爲準。以爲一毫不及。便是吾事未了。自任以天下爲度。以爲一物有闕。便是吾氣不管。處事則正其義而無計較趨避之意。接物則顯諸仁而無忌克怨尤之心。廉介則係馬千駟而不顧也。氣量則海涵萬斛而不見其涯也。文辭則菽粟布帛。雖不甚貴而日用不可無也。出處則老死窮巷而枉尺直尋。有所不屑也。自太極性命。至於日用典禮。鑽硏窮覈。倫類相次。日久月深。零碎者融會。矜持者純熟。至於一言一行。絶無安排造作依違苟且之狀。老先生之喪。會葬者數千人。推公及艾山載圭爲相禮。推本制作之源。參酌損益之宜。定爲儀節以行之。持服三年。退老於家懼師道之無傳。舊業之未就。刻苦激勵。不以衰且病有少恕焉。乙酉八月八日。以宿疾終。享年五十一。其友鄭義林曰。程朱世遠。議論多門。後生晩進。莫適所向。而若其大公至正。集衆折衷。使程朱疆土。依舊廓淸者。惟我(老)先生生其人也。然先生之門。若未有公。則其千古不傳之訣。一心獨得之妙。不其幾於懷之卷之而無可告語耶。此可謂千載奇遇。曠世神會也。義林自少小。取友視志。非不多矣。觀其平生無小小出脚。可以指議。而超然遐擧。終始無累者何人。千辛萬苦。極其揶揄。而蕩蕩然無幾微色者何人。博文約禮。交修倂臻。而天德王道。有體有用者何人。博而不雜。繁而不亂。矜而不隘。簡而不傲。使人不覺肅然起敬。怡然自服者何人。嗚乎。吾於公見之矣。公之道。雖不得行於一時。而聞公之風。讀公之書者。必有知斯言之非阿好。而欲與之心會神交於百世之下矣。昔蔡伯諧以郭有道碑銘爲無愧。余於此傳亦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