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하동 정씨 십충전(河東鄭氏十忠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02
하동 정씨 십충전
정공(鄭公) 열(悅)은 자가 구남(懼南)이고 호가 모암(慕庵)이다. 고조 여해(汝諧)는 일두 선생(一蠹先生)주 121)과 종형제가 되고, 호는 둔재(遯齋)로 지평(持平)을 지냈다. 공은 지향하는 뜻이 고결하고 문장은 해박(該博)하였으니, 어린 나이에 학교에 가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 막사로 달려가 계책을 도운 것이 많았고, 갑자년(1624, 인조2)에 같은 고을 양위남(梁渭南)주 122)과 배경생(裵慶生)주 123) 등과 함께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에 달려갔다. 정묘년(1627, 인조5)에 또 의병을 모집하여 난리에 달려가다가 완산(完山)에 이르렀을 때 적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일이 《절의록(節義錄)》에 실려 있다. 칙(恜)은 자가 충보(忠甫), 호가 우수(愚叟)이며 열의 종형제[從父弟]이다.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하였으며, 문학이 화려하고 풍부하여 효와 청렴으로 천거되어 순릉 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임진년에 충무공 이순신을 따라 유격대로 적을 정탐하다가 적에게 잡혔는데, 절개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얼마 뒤에 군수 김득광(金得光, 당시 보성군수)이 왜노를 기습하여 격파하니 마침내 풀려날 수 있었다. 예교(曳橋)·첨산(尖山)·노양(露梁)·안치(鴈峙) 등지에서 힘써 싸우다가 많은 적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갑자년과 정묘년에 종형(從兄, 정열을 말함)과 함께 난리에 달려갔다. 인기(仁紀)는 자가 원기(遠期)로 열의 사종제이다. 영특하고 웅대한 자질로 '충의(忠義)' 2자를 허리에 찬 칼에 새겼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자년의 변란에 선전관(宣傳官)으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주 124)의 막사에 나아가 사흘 동안 연달아 싸워 이겼는데 갑자기 탄알을 맞고 죽었다.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증직되었다. 문상(文翔)은 자가 일경(一卿)이며 호가 화은(華隱)으로 칙의 아들이다. 강개한 절개가 있어 정묘년에 어버이를 모시고 의병으로 나아갔다. 병자년에 안문강공(安文康公)주 125)을 가서 방략(方略)을 많이 도왔다. 문웅(文熊)은 자가 우경(虞卿)이며 호가 회은(晦隱)으로 열의 아들이다. 지극한 행실이 있으며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다. 문리(文鯉)는 열의 종자이다. 의기(義氣)를 좋아하여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갑자년에 의병으로 나아가고, 병자년에는 문강공을 따라갔으나 얼마 뒤 그만두고 돌아왔다. 부자형제, 숙질 조손이 전후로 의병을 일으켰는데, 모두 10명이었다. 외사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온 고을 전체에서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한 사람도 천거하지 않고, 하북(河北)의 열읍(列邑)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다주 126) 하였다. 이는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와 같이 성대한 시대에도 그러한데, 지금 정씨(鄭氏) 한 집안 안에 어찌 충신(忠信)과 의사가 이와 같이 성대하단 말인가. 아, 상(庠)ㆍ서(序)와 학(學)ㆍ교(校)는 인륜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주 127)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에 성스러운 임금이 잇달아 일어나 유현(儒賢)이 성대하게 일어나고 예의의 가르침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위해 죽는 기풍이 가득하여 막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그렇다면 정씨(鄭氏)의 열 충신이 어찌 다만 한 집안과 한 고을의 광택이 될 뿐이겠는가.
주석 121)일두 선생(一蠹先生)
일두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호이다. 자는 백욱(伯勗), 본관은 하동(河東),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오현(五賢)의 한 분으로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다. 저서로는 《일두선생유집(一蠹先生遺集)》이 있다.
주석 122)양위남(梁渭南)
1574~1633.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경섭(景涉), 호는 구봉(九峯)으로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현손이다. 무과에 급제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궁마(弓馬)에도 능하였으며 1610년(광해군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이첨(李爾瞻)이 그의 재행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불렀으나, 권문(權門)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안방준(安邦俊)과 강론하며 세월을 보냈다. 이괄의 난에 격문을 돌리고 정열(鄭悅)·배경생(裵慶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정묘호란에도 100여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전주까지 나아갔으나 적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주석 123)배경생(裵慶生)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유선(由善), 호는 후송(後松)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의리(義理)를 강구하였다. 1618년(광해군10)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624년(인조2)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양위남(梁渭南)·정열(鄭悅)·홍덕임(洪德任) 등과 함께 격문을 돌려 거의(擧義)하였다. 정읍에 이르렀을 때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였다. 후송정(後松亭)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문을 가르쳤다.
주석 124)장만(張晩)
1566~1629.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1624년 이괄의 반란에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집해 진압한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627년 정묘호란에 후금군을 막지 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부여에 유배되었으나 앞서 세운 공으로 용서받고 복관되었다.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이 뛰어났다 한다. 1635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통진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서집》이 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주석 125)안문강공(安文康公)
안방준(安邦俊, 1573~1654)으로,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ㆍ우산(牛山)ㆍ빙호(氷壺)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효종(孝宗)이 즉위한 뒤 조익(趙翼)의 천거로 지평(持平), 장령(掌令),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 《항의신편》, 《혼정편록(混定編錄)》, 《기묘유적(己卯遺蹟)》 등이 있는데, 문집인 《은봉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주석 126)하북(河北)에……없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하북 지역이 모두 항복하였다. 현종이 처음 이 소식을 듣고, "하북 24군(郡)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는가?"라고 탄식하였으나, 나중에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顔眞卿)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물리쳤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크게 기뻐하였다. 《古今歷代標題註釋十九史略通攷 卷5 唐 玄宗 天寶14年》
주석 127)상(庠)……것이다
《맹자》 〈등문공 상〉에 "상, 서, 학, 교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상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교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서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입니다. 하나라에서는 교라 하였고, 은나라에서는 서라 하였고, 주나라에서는 상이라 하였으며, 학은 삼대가 이름을 함께하였으니, 이는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인륜이 위에서 밝으면 소민들이 아래에서 친해집니다.[設爲庠序學校, 以敎之, 庠者, 養也; 校者, 敎也. 序者, 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라고 하였다.
河東鄭氏十忠傳
鄭公悅。字懼南。號慕庵。高祖汝諧。與一蠹先生爲從昆季。號遯齋。官持平。公志尙高潔。文章該洽。早年上庠。聲望藹蔚。壬辰亂。赴崔忠毅公慶會幕。多贊畫。甲子與同郡梁渭南裵慶生等。赴賊适之變。丁卯又募義赴難。至完山。聞賊退還鄕。事載節義錄。恜字忠甫。號愚叟。悅之從父弟也。事親至孝。文學華贍。以孝廉薦除順陵參奉。壬辰從李忠武公舜臣。遊軍覘候。爲賊所執。抗節不屈。旣而爲郡守金得光襲破賊奴。遂得脫。力戰于曳橋尖山露梁鴈峙等地。多所斬獲。甲子及丁卯。與從兄共赴難。仁紀字遠期。悅之四從弟也。英邁雄偉。忠義二字。銘佩腰劒。登武科。甲子之變。以宣傳官赴都元帥張晩幕。三日連捷。忽中丸而死。贈濟用監正。文翔字一卿。號華隱。恜之子也。慷慨有節。丁卯侍親﨣義。丙子從安文康公。多贊方略。文熊字虞卿。號晦隱。悅之子也。有至行。擧孝廉。文鯉悅之從子也。好氣義有膽略。甲子赴義。丙子從文康公。尋罷還。父子兄弟。叔姪祖孫。前後起義。凡十人。外史氏曰。闔郡大都。不擧忠信一人。河北列邑。未有一人義士。此在漢唐之盛而猶然。今鄭氏一家之內。何忠信義士若是彬彬耶。嗚乎。庠序學校。所以明人倫也。恭惟我朝聖聖繼作。儒賢蔚興。禮義之敎浹骨淪膚。而親上死長之風。有藹然不可遏者。然則鄭氏十忠。豈徒爲一家一鄕之光澤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