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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겸 경연참찬관 월헌 조공전(贈通政大夫兵曹參議兼經筵參贊官月軒曺公傳)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전(傳)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2.TXT.0001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겸 경연참찬관 월헌 조공전
조공(曺公)의 휘는 현(顯), 자는 희경(希慶)이며 월헌(月軒)은 그의 호이다. 신라 태사 계룡(繼龍)이 비조(鼻祖)가 되고, 고려평장사(高麗平章事) 자기(自奇), 비서소감(祕書少監) 사단(思旦),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장양공(莊襄公) 저(著)가 그의 현조(顯祖)이다. 조부 세창(世昌)은 장예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냈으며, 아버지 억년(億年)은 참봉을 지내고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을미년(1535, 중종30)에 태어났다. 공은 지기(志氣)가 무리보다 뛰어나고 강개함이 장대하여 붓을 던지고 무과에 급제하여 명종(明宗) 을묘년(1555, 명종10)에 나가 달량진(達梁鎭, 해남 달랑포)을 지켰다. 그 당시 섬 오랑캐들이 침범해오자 변방 성의 바다를 지키는 수군주 115)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났는데, 공이 휘하를 독려하여 성에 올라 힘써 싸우자 적들이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 후 며칠이 지나 화살이 다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는데도 밖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다. 적들이 성을 수겹으로 에워싸자 칼을 뽑아 공격하여 수십여 수급을 베었고 검도 부러졌다. 그리하여 지붕의 기와를 걷어 던져 적을 죽이고 부상을 입힌 것이 매우 많았으나 기와가 다 떨어져 성은 함락되었다. 적들은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음을 분하게 여겨 공을 굴복시키고 등을 갈라 간을 드러내기까지 하였는데, 도적을 꾸짖는 소리가 오히려 끊이지 않았다. 적들이 이를 의롭게 여겨 관을 갖추고 시체를 거두었으니, 그때의 나이가 21세였다. 3년이 지난 정사년(1557, 명종12)에 병조 참의에 추증하였고, 선조 무인년(1578, 선조11)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주 116) 효종 을미년(1655, 효종6)에는 포충사(褒忠祠)주 117)에 올려 제향하였고, 숙종 계미년(1703, 숙종29)에는 정려를 명하였다. 외사씨(外史氏)주 118)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주 119)이 회양(睢陽)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논하는 자들이 고금 천지의 쌍혼(雙魂)으로 그들을 인정하였는데, 공이 장순 허원과 함께 고금의 3혼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우리 조정이 태평할 때에 공이 먼 지방의 보잘 것 없는 관원으로 우뚝하게 떨쳐 한 시대에 강상(綱常)을 부지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풍의(風義)를 빛냈으니, 38년이 지나 임진년의 변란 때 의병을 일으켜 순절(殉節)했던 일이 영호남(嶺湖湖) 사이에 잇달아 있었던 것이 공이 이끈 것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는가. 이 집에서 잠도 자고 일어나서 날마다 먹고 마시며 은혜를 받은 것이 많았으니, 삼가 전(傳)을 지어 후대의 재필(載筆)주 120)할 사람을 기다린다.
주석 115)바다를 지키는 수군
원문의 '해수(海戍)'는 바닷가의 수자리이다. 이백(李白)의 자류마(紫騮馬)에 "흰 눈이 덮인 관산은 멀고 누런 구름 자욱해 해수는 아득해라.[白雪關山遠, 黃雲海戍迷.]" 하였다.
주석 116)관리를……했으며
1578년(선조11)에 예조 정랑(禮曹正郞) 구충연(具忠淵)을 보내어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치루는 제사)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주석 117)포충사(褒忠祠)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죽수서원 옆에 위치한다. 1610년(광해군2)에 창건되었으며, 처음에는 최경회(崔慶會, 1532~1593) 장군만 모셨으나, 1630년(인조8)에 당시 이조판서인 이귀(李貴)의 주청으로 문홍헌(文弘獻)을 배향하였다. 이후 1657년(효종8) 을묘왜란때에 해남 달랑포에서 전사한 조현(曺顯)을 추배 했으며, 1860년(철종11)에 구희(具喜) 등을 추가 배향하였다.
주석 118)외사씨(外史氏)
《사기》 등에는 사관이 어떤 일을 논하는 논평의 글이 나오는데, 이 글은 사관의 글이 아니므로 외사씨라고 한 것이다. 소설에서 끝에 작가 개인 의견을 표출하는 대목에서 '외사씨왈(外史氏曰)' 표현을 많이 쓴다.
주석 119)장순(張巡)과 허원(許遠)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허원은 수양 태수(睢陽太守)로 있으면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안녹산의 군대에 맞섰으나, 성이 포위된 지 몇 개월 만에 구원병도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성은 함락되고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 뒤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들의 회유에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주석 120)재필(載筆)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운문을 '문(文)', 산문을 '필(筆)'이라 하였다. 후대에 재필(載筆)은 '필기도구를 휴대하고 군왕의 언행을 기록한다.'는 것으로 사관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이른다. 또는 '소차(疏箚)나 표문(表文)을 짓는다.'라는 등의 문체를 지칭하게 되었다. 《양서(梁書)》 권14 〈임방전(任昉傳)〉에 "임방이 매우 글을 잘 지었는데 더욱이 재필을 잘 지었다."라고 하였다.
贈通政大夫兵曹參議兼經筵參贊官月軒曺公傳
曺公諱顯。字希慶。月軒其號也。以新羅太師繼龍爲鼻祖。高麗平章事自奇。秘書少監思旦。都僉議政丞莊襄公著。其顯祖也。祖世昌掌隷院判決事。考億年參奉贈刑曹參判。公生于嘉靖乙未。志氣不羣。慷慨磊落。投筆登武科。明宗乙卯。出守達梁鎭。時島夷入寇。邊城海戍。望風奔潰。公督管下。登城力戰。賊不敢近。居數日。矢盡力竭。外援不至。賊圍城數匝拔劒擊斬數十級。劒亦折。捲屋瓦投之。殺傷甚衆。瓦盡城陷。賊憤其久不下。伏公刳背。至於露肝。而罵賊之聲。猶不絶。賊義之。具棺斂尸。時年二十一。越三年丁巳贈兵曹參議。宣廟戊寅。遣官致祭。孝宗乙未。躋享褒忠祠。肅廟癸未。命旌閭。外史氏曰。昔張巡許遠。死於睢陽之戰。論者以古今天地一雙魂。與之。公之於巡遠。謂之古今三魂。非過論也。當我朝昇平恬憘之際。公以遐土冗官。崛然奮張。扶綱常於一時。耀風義於萬目。後三十八年。壬辰之變。倡義殉節。相望於嶺湖之間者。安知非公倡之耶。載寢載興。日用飮食。受賜多矣。謹爲立傳以以俟後之載筆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