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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통훈대부 칠원 현감 퇴은 안공 행장(通訓大夫漆原縣監退隱安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15
통훈대부 칠원 현감 퇴은 안공 행장
공의 휘는 신일(信一), 자는 군유(君有), 호는 퇴은(退隱)이며, 고려조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이 그의 현조(顯祖)이다. 문성공의 증손인 문혜공(文惠公) 휘 원형(元衡)은 공로가 있어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竹城)을 관향으로 삼았다. 휘 정(挺)에 이르러 우리 조정에 벼슬하여 직제학(直提學)을 지냈으며, 직제학이 휘 을겸(乙謙)을 낳았는데 군수를 지냈다. 군수가 휘 여주(汝舟)를 낳았는데 직장을 지냈으며, 장흥(長興)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직장이 휘 거(矩)를 낳았는데 좌랑(佐郞)을 지냈으며, 좌랑이 휘 신동(愼同)을 낳았는데 직장(直長)을 지냈다. 직장이 휘 양필(良弼)을 낳았는데 봉사(奉事)를 지냈고, 봉사가 휘 기(磯)를 낳았는데 부장(部將)을 지냈으며, 부장이 휘 여지(汝止)를 낳았는데 판관(判官)을 지냈다. 판관이 휘 우주(宇宙)를 낳았는데 참봉을 지냈으며,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칠원 윤씨(漆原尹氏)로, 봉사를 지낸 희순(希淳)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28) 8월 10일에 부(府)의 중산리(中山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총명하고 활달하여 또래들보다 훨씬 탁월하였다. 겨우 8~9세 때, 병사 오정방(吳定邦, 1552~1652)이 겸부사(兼府使)로서 연병관(鍊兵館)에서 강무(講武)주 92)하였는데, 공이 여러 아이들과 함께 가서 구경하니 오정방이 각각 배 하나씩를 주었다. 여러 아이들은 받은 즉시 베어 먹는데, 공만이 홀로 품속에 넣자 오정방이 이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장차 돌아가 어버이께 드리려고 하는데, 하나가 모자랍니다."라고 하니, 오정방이 기특하게 여겨 곧바로 백여 개의 배와 고기를 주었다. 어버이가 병이 나면 지극히 근심하여 밤에도 띠를 풀지 않았고, 부모가 잠을 자도록 하라고 꾸짖으면 그때마다 물러나 문 밖에 서 있다가 조금 지나서 다시 들어왔으니 그 지성스러움이 이와 같았다. 12세에 족대부(族大父) 동애(桐厓) 휘 중묵(重默)주 9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하루는 국상(國喪)을 당하여 여러 장로(長老)가 모두 관아의 뜰로 달려가 곡을 행하자 공은 여러 아이들과 함께 단(壇)을 설치하고 재계한 뒤에 망곡례(望哭禮)주 94)를 행하니 보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18세에 참봉공의 명으로 청음(淸陰) 김선생주 95)을 가서 뵙고 인하여 수업을 받았는데, 선생이 매번 칭찬함이 끊이지 않았다. 광해군 정사년(1617, 광해군9)에 폐모(廢母)의 변고주 96)가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며, "이는 천지가 있은 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하고는 곧장 소장(疏章)을 지었으나 결국에는 언로(言路, 임금에게 말을 아뢰는 길)에 막혀 결행하지 못했다.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에 도적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공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말하기를, "대가가 파천(播遷)하였으니 이 어찌 신하가 집안에 편안히 앉아 있을 때이겠는가."라고 하더니, 칼을 잡고 부원수(副元師) 신경원(申景瑗)주 97)의 막사에 나아가 군무를 도와 많은 공적을 이루어, 병절교위(秉節校尉)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인조5) 3월주 98)에 오랑캐인 금나라 침략하자, 공은 전 부사(府使) 민기(閔機)주 99) 등과 힘을 합해 호종(扈從)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충의위 부사과(忠義衛副司果)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629, 인조7) 봄, 상소를 올려 군사 장비를 정비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우리나라 동쪽에 강성한 왜구들이 있어 원망을 맺음이 이미 깊고, 서쪽에는 사나운 북쪽 오랑캐가 있는데, 얕잡힌 것이 이미 많아 위급한 형세가 아침에 저녁 일을 예측할 수 없으니 빨리 군기(軍器)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위급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하소서."라고 하니, 식자(識者)들이 그 의견을 옳다고 생각했다. 이때 극악한 역적 백룡(白龍)주 100)이 도당을 불러 모았는데,주 101) 남원(南原)이 더욱 심하였다. 부사 박정(朴炡)주 102)이 편지를 보내 공을 부르며 말하기를, "그대의 계략은 이미 익히 알고 있으니 부디 와주시어 시국의 어려움을 같이 구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편지를 받고 곧장 가서 책략을 도모하여 거의 다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목장흠(睦長欽)주 103)이 박공(朴公)을 이어 남원(南原)에 부임하여 공이 이룩한 계책에 힘입어 마침내 잔당을 소탕하자 경내가 평안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봄, 경상 우도(慶尙右道)주 104)가 기근이 심하여 도적이 다투어 일어나자, 박정이 공을 추천하여 칠원 현감(漆原縣監)에 임명되었다. 공이 혼자 말을 타고 부임하여 세금을 감면해 주고 진대(賑貸)주 105)하여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나타나니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평안해졌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겨 상을 주고 특별히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겨울에 북쪽 오랑캐가 크게 쳐들어오자 공이 달려가 감사(監司) 심연(沈演)주 106)을 만나 일을 의논하니 심연이 말하기를, "급히 본현으로 가서 병사를 모아서 오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현으로 돌아와 동구(同仇) 의리로써 타이르니 현의 사람들이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수천 명을 모아 심공과 합세하여 곧장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병사 김준용(金俊龍)이 광교(光敎)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여러 군사가 모두 흩어지자 공이 크게 외치며 말하기를, "군령(軍令)의 무엄함이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본현(本縣)의 장졸들을 불러 말하기를, "오직 내가 여기에 있는데, 너희는 장차 어디로 가려하느냐. 만일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가는 자가 있으면 참형(斬刑)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읍의 군사들은 모두 흩어졌지만 칠원의 병사들만은 독전(獨全)하여 영산(靈山)의 수령 윤면지(尹勉之)와 함께 길을 배로 재촉하여 나아갔다. 얼마 안 있어 남한산성에서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였다는 소식주 107)을 듣고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윤공과 이별하며 시를 지었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통곡하고 어느 곳으로 돌아갈거나 (痛哭歸何處)
동쪽 바다 이곳이 살기 좋겠네 (東溟是好居)

라고 하였다. 2월에 어버이의 병 때문에 보고를 올려 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2월에 관직을 버리고 같은 고을 사람 웅천 현감(熊川縣監) 위정렬(魏廷烈, 1580~1644)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숭덕(崇德)주 108)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모든 서찰 아래에 오직 숭정(崇禎, 명나라 의종(毅宗)의 연호) 몇 년이라고만 써서 풍천(風泉)의 생각주 109)을 부쳤으며, 인산(仁山)의 아래에 집을 지어 '지수정(智水亭)'이라 편액을 걸고 날마다 벗들과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근심을 떨쳐냈다. 그 뒤에 나이가 많아 가선대부 품계로 승진하였는데,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새 직함을 쓰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대개 청국(淸國)의 연호(年號)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오년(1666, 현종7)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2월 수문포(水門浦) 왼쪽 기슭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 공은 사문(斯文)의 이름난 가문으로,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현향(賢鄕, 상대방의 고향)의 장덕(長德) 문하에서 공부하여 마음을 세우고 자신을 위하는 학문의 절도는 진실로 이미 대체(大體)를 터득하였지만, 다만 당시의 세상일이 우환이 많음을 보고 개연(慨然)히 세상에 뜻을 두어 환란에 미리 대비할주 110) 계책을 세웠다. 또 무략(武略)에 익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매번 한가하고 조용한 틈에 활쏘기와 말타기를 겸하여 익히곤 하였다. 출신(出身)하여 관직에 나가서는주 111)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분주하게 절충(折衝)주 112)하고, 드나들며 보위하여 공로를 세운 것이 전후로 이와 같이 성대하였으니, 공은 문무(文武)의 재능과 장상(將相)의 훌륭한 기량을 갖추었다고 이를 만한데, 낮은 관직을 맴돌며 오히려 그가 품은 생각을 크게 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하물며 여기에 더 나아가 아무 일이 없는 때를 만나 조용히 간언(諫言)주 113)하고 임금의 덕을 보좌했다면 이 세상을 도용(陶鎔)주 114)한 것이 어떠했겠는가. 공이 말한 '학문과 절의는 본래 두 가지 일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이는 실제(實際)의 말이니, 백년 뒤에 공의 글을 읽고 공의 세상을 논하는 자가 마땅히 모두 다 알 것이다. 부인은 장연 변씨(長淵邊氏)로, 참봉을 지낸 덕룡(德龍)의 따님이다. 부덕이 있었으며 공의 묘에 합장되었다. 자녀가 없어 종증조(從曾祖) 형 언두(彦斗)의 둘째 아들 인업(仁業)을 취하여 후사로 삼았다. 장손 이행(而行)은 호가 포옹(圃翁)이며, 차손은 이형(而亨)이며, 증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8세손 인환(仁煥)은 어진 선비이니, 그 종질 규칠(圭七)을 보내 나에게 행장의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고루하고 미천하고 용렬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다만 두터운 교분으로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주석 92)강무(講武)
조선조 때 1년에 두 번 봄철과 가을철에 행하던 행사의 하나로, 지정(指定)한 곳에 장수와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임금이 주장하여 사냥하여 아울러 무예(武藝)를 연습하던 일을 말한다.
주석 93)중묵(重默)
안중묵(安重默, 1556~1607)으로, 자는 기현(基賢), 호는 동애(桐崖),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박광전(朴光前)ㆍ정개청(鄭介淸)에게 수학하고, 정구(鄭逑)의 효렴(孝廉) 천거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ㆍ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등을 지냈다. 병법(兵法)에도 능하여 정유재란 중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찾아오자 병론(兵論)을 전수해 주었으며, 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군량을 비축하였다. 저서로는 《동애선생실기(桐崖先生實記)》가 있다.
주석 94)망곡례(望哭禮)
임금이나 왕비가 죽었을 때 서울에서는 대궐 문 앞에 모여 곡하고, 지방에서는 서울 쪽을 바라보면서 곡하는 의식을 말한다.
주석 95)청음(淸陰) 김선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청서파의 영수이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주장하다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났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북벌군의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불렸다.
주석 96)폐모(廢母)의 변고
1617년(광해군9)에 조정에서 이이첨의 주도하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서궁(西宮)에 유폐하자는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을 말한다.
주석 97)신경원(申景瑗)
1581~1641. 본관은 평산, 자는 숙헌이다. 1605년(선조38)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선전관을 거쳐 온성 판관·부사를 지내고, 1619년(광해군11) 영유현령이 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황주 신교에서 패한 관군을 모아 안현에서 반군을 대파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평안·황해·함경·강원 4도 부원수로 맹산 철옹성을 지키다가 포로가 되자 단식으로 항거했다.
주석 98)정묘년(1627, 인조5) 3월
1627년 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만주에 본거를 둔 청나라의 전신(前身)인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 전쟁인 정묘호란을 말한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3월 1일(음력 1월 14일) 의주성을, 3월 2일(음력 1월 15일)에는 정주성을, 3월 8일(음력 1월 21일)에는 안주성을 점령했으며, 3월 10일(음력 1월 23일)에는 평양성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된지 불과 보름만에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이 청나라에게 빼앗긴 것이다.
주석 99)민기(閔機)
1568~1641.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선(子善), 호는 서한당(棲閑堂)이다. 1597년(선조30) 문과에 급제하였고, 경주 부윤을 지냈다.
주석 100)백룡(白龍)
인조(仁祖) 대에 남원 지역에서 출몰하던 도적의 괴수를 말한다. 《漫浪集 卷9 睦參判墓碑銘, 韓國文集叢刊 103輯》
주석 101)불러 모았는데
원문의 '소취(嘯聚)'는 도적들이 그들의 도당을 신호인 휘파람을 불어서 모으는 일을 뜻한다.
주석 102)박정(朴炡)
1596~1632.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대관(大觀), 호는 하곡(霞谷),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박동선(朴東善)의 아들로, 1619년(광해군11) 정시(庭試)에 급제, 춘추관에 들어가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고, 훈3등(勳三等)의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고 함평현감ㆍ통정(通政)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좌승지ㆍ대사간ㆍ병조 참의ㆍ참지를 거쳐 1629년(인조7)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강적(强賊)을 평정하여 금주군(錦州君)에 피봉되었다. 이조 참판ㆍ병조 참판ㆍ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주석 103)목장흠(睦長欽)
1572~1641.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우경(禹卿), 호는 고석(孤石)이다. 1599년(선조32)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내직을 두루 거친 뒤 이조 정랑이 되었으나 판서 기자헌(奇自獻)의 미움을 받아 고성 군수(高城郡守)로 나갔다. 1613년에 좌부승지가 되었는데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다가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연좌되어 청풍 군수로 좌천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뒤 승지에 임명되어 판결사, 함경도 관찰사, 경주 부윤 등을 거쳐 호조 참판을 지냈으며, 1641년에 도승지가 되었다.
주석 104)경상 우도(慶尙右道)
원문의 '영우(嶺右)'는 경상 우도로, 조선 시대 경상도의 서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태종 7년(1407)에 군사 행정상의 편의를 위하여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서부와 동부로 나누어 서쪽을 경상 우도라고 하였다. 성주(星州)ㆍ선산(善山)ㆍ합천(陜川)ㆍ함양(咸陽)ㆍ의령(宜寧)ㆍ남해(南海)ㆍ거창(居昌)ㆍ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고성(固城)ㆍ창원(昌原) 등 28개의 군현이 여기에 속하였다.
주석 105)진대(賑貸)
재난이나 흉년이 든 해에 나라의 곡식을 풀어서 어려운 백성에게 꾸어 주던 일을 말하는데, 고구려(高句麗) 때부터 빈민 구제책으로 춘궁기(春窮期)에 관곡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거두어들이던 제도이다.
주석 106)심연(沈演)
1587~1646.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윤보(潤甫), 호는 규봉(圭峯)이다. 광산 현감(光山縣監)으로 부임하여 재판을 공정히 하고 선정을 베풀어 현을 주로 승격시키고 그곳의 목사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쌍령(雙嶺)에서 패하여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전라도 임피(臨陂)에 유배되었다. 한성부 판윤, 대사간 등을 거쳐 경기 관찰사를 역임한 뒤 함경도 관찰사로 임지에서 죽었다.
주석 107)남한산성에서……나와
1636년(인조14)에 청나라가 재차 침입하자,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조선이 청나라에 대해 신하의 예로 행할 것'을 조건으로 강화한 일을 말한다.
주석 108)숭덕(崇德)
청나라 태종(太宗)의 연호(1636~1643)이다.
주석 109)풍천(風泉)의 생각
풍천(風泉)은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의 준말로, 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이고, 하천은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이다. 이 두 편은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쇠약해짐을 현인(賢人)이 개탄한 내용이다. 여기서는 조선의 국력이 약해 청나라에 유린당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명(明)나라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를 생각하면서 멸망한 명(明)나라를 생각하는 존주 대의(尊周大義)의 뜻이 담겨 있다.
주석 110)환란에 미리 대비할
환란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조처하여 예방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鴟鴞)〉에 "하늘에서 장맛비가 아직 내리지 않을 때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 모아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감히 나를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牑戶, 今此下民, 或敢侮予.]"라고 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주석 111)출신(出身)하여 관직에 나가
'출신'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뜻하며, 원문의 '통적(通籍)'은 문표(門標)에 성명ㆍ연령 등을 올리면 궁문의 출입을 허락하던 명패(名牌)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과거에 급제하고서 처음 관직에 진출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주석 112)절충(折衝)
절충어모(折衝禦侮)의 준말이다. 적의 침입을 격파하여 모욕당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주석 113)간언(諫言)
원문의 '계옥(啓沃)'은 내 마음을 열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해 간언하여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적시게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부탁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書經 說命上》
주석 114)도용(陶鎔)
도용은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고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는 것처럼 인재를 배양해서 육성한다는 뜻으로, 보통 대신이 나라를 다스리는 비유로 쓴다.
通訓大夫漆原縣監退隱安公行狀
公諱信一。字君有。號退隱。麗朝文成公晦軒先生。其顯祖也。文成公曾孫文惠公諱元衡。以功封竹城君。子孫因貫焉至諱挺。仕我朝官直提學。是生諱乙謙郡守。是生諱汝舟直長。始居長興。是生諱矩佐郞。是生諱愼同直長。是生諱良弼奉事。是生諱磯部將。是生諱汝止判官。是生諱宇宙參奉。卽公之考也。妣漆原尹氏奉事希淳女。以萬曆乙未八月十日。生公于府之中山里。穎悟開爽。絶山等夷。纔八九歲時。兵使吳定邦。以兼府使。講武于錬兵館。公與羣兒往觀之。吳各賜一顆梨。羣兒卽受而啗之。公獨懷之。吳問之曰。將歸遺二親。而但少一顆耳。吳奇之。乃賜百顆及肉物。遇親癠。極其致憂。夜不解帶。父母責令就睡。則輒退立門外。少頃復入。其至誠如此。十二受學于族大父桐厓諱重默之門。一日遭國恤。諸長老皆赴縣庭行哭。公與羣兒設壇齋後。行望哭禮。見者異之。十八以參奉公命。往謁淸陰金先生。因受業焉。先生每稱賞之無已。光海丁巳。聞有廢母之變。歎曰。此是有天地以後所未有之擧。卽製疏章。竟爲言路所沮。未果上。辛酉登武科。甲子賊适之叛。公不勝忿憤曰。大駕播遷。此豈臣子安坐屋裏時乎。杖劒詣副元師申景瑗幕。贊助戎務。多所效績。拜秉節校尉宣傳官丁卯三月。金虜人寇公與前府使閔機等戮力扈從。拜宣略將軍忠義衛副司果。己巳春。上疏請修武備。略曰。我國東有倭寇之强。而構怨旣深。西有建胡之狠。而見弱已多。危急之勢。朝不慮夕。亟令修葺軍器。錬習武士。以備緩急。識者韙之。時劇賊白龍。嘯聚徒黨。南原尤甚。府使朴炡以書邀公曰。吾君算略。已所稔知。庶肯來思共濟時艱。公得書卽行。謀畫方略。斬獲殆盡。睦長欽繼朴公而莅南原。賴公成算。竟勦餘黨。境內晏然。丙子春。嶺右饑甚。盜賊倂起。朴炡薦公爲漆原縣監。公單騎赴任。蠲除賑貸。恩威幷著。民賴以安。朝廷嘉賞之特。賜表裏一襲。冬北寇大入。公馳見監司沈演議事。沈曰。急往本縣收兵以來。公還縣。諭以同仇之義。縣人莫不願從。遂募得數千與沈公合勢。直向南漢。至中路。聞兵使金俊龍敗於光敎。諸軍皆散。公大呼曰。軍令無嚴何至此也。招本縣將卒曰。惟我在。此。汝將何之。若有退一步者斬。是以列邑軍皆散。而漆原兵獨全。與靈山守尹勉之。倍道而行。旣而聞南漢出城之報。痛哭而還。別尹公有詩曰。痛哭歸何處。東溟是好居。二月以親病。申省請遞。不許。十二月。棄官與同郡人熊川宰魏廷烈。同還鄕里。不復仕進。不用崇德年號。凡書尺下。惟書崇禎幾年。以寓風泉之思。築室仁山之下。扁曰智水亭。日與知舊。文酒自遣。後以年老。陞嘉善階。戒子孫曰。我死勿用此新銜。蓋以有淸國年號故也。丙午十二月十日捐館。明年二月葬于水門浦左麓艮坐原。嗚乎。公以斯文名家。稟質挺異。而從事於賢鄕長德之門。立心爲己。學問節度。固已見得大體矣。但見時事多虞。慨然有志於世而所以爲綢繆陰雨之計。又不可以不閒於武略。故每於簡黙之暇。兼習弓馬。至於出身通籍。一心徇國。而奔走折衝。出入捍衛。所以樹立勞勩者。前後磊落如此。公可謂文武全才。將相偉器。而低廻下僚。猶未能大展其所蘊。爲可恨也。況進於此。遭時無事。從容啓沃。輔翼允德。則其陶鎔斯世者。爲何如哉。公所謂學問節義。本非二事者。是實際語也。百歲之下。讀公之書。論公之世者。當有以悉之也。夫人長淵邊氏參奉德龍女。有婦德墓合祔。無育。取從曾祖兄彦斗第二子仁業爲嗣。孫長而行號圃翁。次而亨。曾玄以下不錄。八世孫仁煥賢士也。送其從姪圭七。屬余以狀行之文。余以固陋微劣。有不容承膺。而但以契誼之厚。有不敢終辭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