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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경헌 이군 행장(敬軒李君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14
경헌 이군 행장
군(君)의 성은 이(李), 휘는 인환(仁煥), 자는 덕재(德哉), 호는 경헌(敬軒)이다. 공주(公州) 사람으로 철종(哲宗) 무오년(1858)에 태어났다. 개국 초기에 공숙공(恭肅公)은 휘가 명덕(明德),주 82) 호가 사봉(沙峯)으로 좌의정에 증직되었는데, 목은(牧隱)주 83)의 고제(高弟)로 태조의 명신이 되었으니 바로 군(君)의 17대조이다. 16대조 휘 효근(孝根)은 참판을 지냈고, 15대조 휘 종림(宗琳)은 이조참의를 지냈으며, 14대조 휘 공필(公弼)은 철산 부사(鐵山府使)를 지냈고, 13대조 휘 교맹(嶠孟)은 현감을 지냈으며, 12대조 휘 시돈(時敦)은 이조참판을 지냈고, 11대조 휘 경운(慶雲)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냈고, 10대조 휘 영숙(靈肅)은 공조참의를 지냈다. 9대조는 휘가 위(韡)주 84), 호가 혁회재(衋悔齋)이고 생원시에 입격하였으며, 우산(牛山)주 85)의 고제(高弟)로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을 일으켰으니, 사림이 제사를 지냈다. 8대조 휘 동명(東鳴)은 진사를 지냈고, 7대조 휘가 만시(萬蒔)이며 호가 석련(石蓮)은 진사를 지냈으며, 6대조는 휘 계제(桂齊), 5대조는 휘 재후(載厚), 고조는 휘 기형(基馨), 증조는 휘 문갑(文甲), 조부는 휘 택무(擇茂), 아버지는 휘 민채(敏采)이며 문행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군은 타고난 자질이 돈후하고 품성이 인자하였다. 어려서부터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였으며, 말하면 번번이 사람을 놀라게 하여 보는 자들이 칭찬하였다. 군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가 없었으나 위기(爲己)의 학문주 86)을 알아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스스로 손수 베꼈다. 남의 선을 보기를 자기가 지닌 것처럼 하고, 남의 악을 보기를 자기 몸의 병처럼 여기니 원근의 붕우들이 마음으로 기뻐하고 진실로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밤낮으로 책상을 대하였는데, 만약 의아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여러 장덕(長德, 나이 많고 덕행이 있음)인 계남(溪南)주 87)과 애산(艾山) 및 최면암(崔勉庵)과 기송사(奇松沙)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문하여 해결하였으니, 제대로 알지 못하면 놓아두지 않는주 88) 뜻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어버이가 연로한 날에 곁에 형제가 없고,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에는 몸에 병이 있었기 때문에 멀리 유람하여 그 문하에 나아가지 못한 것을 항상 한스럽게 여겼다. 봄날 날씨가 따뜻할 때나 가을바람이 쓸쓸할 때마다 번번이 벗을 맞이하여 술을 싣고서 높은 곳에 올라 소요(逍遙)하다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으니, 그 드넓은 흉금과 표일한 자취가 유유자적하게 세상을 초월한 기상이 있었다. 평소의 몸가짐은 법도가 있고 말을 냄에 문장이 있었으며, 자상한 뜻은 가정에 넘쳐나고 화락한 풍모는 고을에 두루 미쳤다. 남이 곤경에 처함을 보면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한 줄 모르고 반드시 구휼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흉년을 만나면 의식을 절약하여 그 남은 것을 미루어 친족과 이웃의 가난한 자들에게 이르게 하였다. 갑오년(1894)의 난리 때 마을이 흉흉하였는데, 군(君)은 태연히 스스로의 지조를 잘 지키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심지어 산으로 골짜기로 피난가는 매우 험난한 상황에 처하여도 자정(自靖)하려는 뜻이 더욱 확고하였다. 을미년(1895) 단발의 변란에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주 89)은 한강 북쪽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송사 기우만은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나는 군(君) 및 여러 벗들과 약속하여 송사에게 가서 원수를 함께 치려고 하였는데주 90) 그 울분과 강개함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평소에 권문세가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고 요직에 있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 세속의 명성이나 이로움,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친척의 무리가 혹여 당시에 등용되어도 돕지 않았으며, 수령의 관원이 혹 세력을 이용해 불러도 가지 않기도 하였으니, 남의 권세를 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임인년(1902) 5월 18일에 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 도장면(道莊面) 정천촌(淨川村) 뒤 경좌(庚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해남 윤씨(海南尹氏) 주봉(柱琫)의 따님으로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기일(基一)과 기복(基福)이며, 딸은 하동(河東) 정귀채(鄭貴采)와 제주(濟州) 양모(梁某)에게 시집갔다. 아, 이같이 순후한 자질과 화통한 재주로 마음을 세우고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며 종유하고 강마(講磨)하여 안목이 점차 열리고 기세가 한창 올랐으니, 누가 천 리를 가는 수레를 중도에 그치고 백 번 단련한 금을 중간에 훼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군보다 나이가 좀 더 많고 교분을 맺음이 조금 늦었지만 서로 뜻이 맞아서 험난한 상황 속에서 서로 종유하며 세한(歲寒)주 91)에도 서로 지키려는 생각을 한 것이 어떠하였는데, 지금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났단 말인가. 종유했던 오랜 벗들은 열에 여덟아홉은 없으니 군을 아는 자가 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죽고 난 뒤에 사적을 길이 전할 책임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있겠는가. 그 대강을 간략히 서술하여 그의 아들에게 주어 그가 조금 자라거든 이 글을 보고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고 계술(繼述)할 방법을 생각하게 하노라.
주석 82)명덕(明德)
이명덕(李明德, 1373~ 1444)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시호는 공숙(恭肅), 본관은 공주(公州)이다. 1396년(태조5)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보직되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ㆍ장령(掌令)ㆍ사인(舍人)ㆍ집의(執義)ㆍ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ㆍ형조참의(刑曹參議) 겸 지도관사(知都官事) 등을 역임했다. 우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주석 83)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다. 자는 영숙(穎叔),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2) 성균시에 합격하여 대제학,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조에서는 벼슬하지 않아 포은(圃隱),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주석 84)위(韡)
이위(李韡, ?~?)이다. 화순 출신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안방준(安邦俊)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을 성취하고, 「분의편(奮義篇)」과 「계자서(戒子書)」를 저술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동지들과 안방준을 도와 서기가 되고, 말을 달려 여산까지 이르렀다가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1660년(현종 1)에 생원시에 올랐고, 효행으로 여러 번 도천(道薦)에 올랐으며, 뒤에 수직(壽職)으로 가선 대부 동지중추에 제수되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충효전(忠孝傳)」을 지어 극찬하였다. 사림이 칠송리에 충현사(忠賢祠)를 지어 춘추로 향사한다.
주석 85)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호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또 다른 호는 은봉(隱峰)이다.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박광전과 성혼의 제자이며 임진왜란ㆍ정묘호란ㆍ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효종 초에 공조 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을 거쳐 공조 참의가 되었다. 《은봉전서》ㆍ〈항의신편(抗義新編)〉ㆍ〈호남의록(湖南義錄)〉ㆍ〈혼정편록(混定編錄)〉ㆍ〈기묘유적(己卯遺蹟)〉 등을 남겼다
주석 86)위기(爲己)의 학문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석 87)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호이다. 자는 원칙(元則),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에서 살았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주석 88)제대로……않는
《중용장구》 제20장에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운다면 잘하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으면 알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하면 터득하지 못하거든 그만두지 말아야 한다.[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弗措也.]"라고 하였다.
주석 89)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조선 말기의 의병으로,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자는 여성(汝星), 호는 의암(毅庵)이다. 화서 이항로, 중암 김평묵, 성재 유중교로 이어지는 학맥을 이어받았고,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5년 12월 24일 의병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후 만주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며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인재를 양성하였다. 저서로 《의암집》이 있다.
주석 90)원수를……하였는데
원문의 '동구(同仇)'는 원수를 함께 한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진풍(秦風) 무의(無衣)〉에, "어찌 옷이 없다 해서, 그대와 솜옷을 같이 입으리오. 왕이 군사를 일으키면, 우리들 창과 모를 손질하여, 그대와 함께 원수를 치리.[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修我戈矛, 與子同仇]"라고 하였다
주석 91)세한(歲寒)
의지를 굳게 가져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하였다.
敬軒李君行狀
君姓李。諱仁煥字德哉。號敬軒。公州人。以哲宗戊午生。國初恭肅公諱明德號沙峯贈右議政。以牧隱高弟爲太祖名臣。卽君之十七世祖也。十六世諱孝根參判。十五世諱宗琳吏曹參議。十四世諱公弼鐵山府使。十三世諱嶠孟山縣監。十二世諱時敦戶曹參判。十一世諱慶雲同知敦寧府事。十世諱靈肅工曹參議。九世諱韡號衋悔齋中生員。以牛山高弟。倡丙子義旅。士林俎豆之。八世諱東鳴進士。七世諱萬蒔號石蓮進士。六世諱桂齊。五世諱載厚。高祖諱基馨。曾祖諱文甲。祖諱擇茂。考諱敏采。以文行著世。君天姿敦厚。稟性仁慈。自幼入孝出恭。語輒驚人。見者稱之。君早孤靡依。知爲己之學。心經近思錄等書。自手謄書。見人之善。若已有之。聞人之惡。若已之病。朋友遠近。莫不心悅誠服。日夕對案。若有疑訝。則必走書於諸長德溪南艾山及崔勉庵奇松沙而咨決之。其不得不措之意如此。然親老之日。傍無兄弟。親沒之後。身有疾病。是以未得遠遊以造其門。常以爲恨。每當春日和煦。秋風蕭散之時。輒邀友載酒。登臨徜徉。竟日而歸。其曠襟逸躅。悠然有出俗超塵之象。平日持身有法。出言有章。慈詳之意。溢於家庭。愷悌之風。遍於鄕閭。見人在阨。不知己力之不逮。而必周恤之無已。遇飢歲縮衣節食。推其所餘以及族戚隣里之貧者。甲午之亂。閭里汹汹。君晏然自持。少不爲撓。至於奔山竄谷。備極艱險。而一端自靖之志。愈益確如也。乙未薙削之變。柳毅庵麟錫擧義漢北。奇松沙擧義湖南。余約君及諸友。擬赴松沙同仇。見其忿憤慷慨。終始不渝也。平日不入要門。不見要人。於聲利芬華。漠然若無所好。親表之屬。或爲時用而不援之。守宰之官。或以勢邀而不往之。其忘人之勢如此。壬寅五月十八日。以疾終於家。葬道莊面淨川村後庚坐原。配海南尹氏柱琫女。生二男二女。男基一基福。女適河東鄭貴采濟州梁某。嗚乎。以若醇厚之質。開爽之才。立心爲己。遊從講磨。眼目漸滑。步趨方張。誰爲千里之駕。止於中途。百鍊之金。毁於半功哉。余於君。雖年紀稍長。結交差晩。而密勿相得。間關相從。爲歲寒相守之計者。顧何如。而今乃棄我如遺耶。從遊知舊。十亡八九。知君者不可謂非我。然則身後不朽之責。豈在於他人乎。略敍其梗槪而授之遺胤。待其稍長而見之。俾知厥者之心。而思所以繼述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