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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학생 문공 행장(學生文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13
학생 문공 행장
우리 고을에 있는 선배 중에 박아하고 후덕하며 자상하고 온화한 덕이 있어 이구동성으로 고을에서 탄복하고 군자와 장자(長子)로 지목한 사람이 있으니 학생(學生) 문공(文公)이 그 사람이다. 공의 휘는 치욱(致郁)이며 자는 우서(禹瑞)로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의 후손이다. 증조는 휘 세동(世東), 조부는 휘 봉주(鳳周)이다. 아버지는 휘 환상(煥相)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 동우(東宇)의 따님으로, 순조 기묘년(1819, 순조19) 1월 1일에 능주의 입교리(笠橋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의 자태와 용모는 단아하고 품성은 화락하였으며, 마음을 보존함은 질박하고 성실하였으며, 몸가짐은 삼가고 신중하였다. 그 말은 어눌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듯하였고, 그 행동은 움츠러들어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주 73) 부모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였고, 형제를 대함에 우애로써 하였으며, 친척을 대함에 화목함으로 하였고, 붕우를 대함에 충성스럽게 하였으므로 가정에서부터 미루어 고을에까지 모두 기뻐하며 각각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남을 이기거나 해치는 잔인한 생각을 일찍이 마음에 품지 않았고,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을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시비(是非)와 훼예(毁譽)에 관한 소리를 한 번도 귀에 거치게 하지 않았다. 선을 좋아하고 의를 좋아하여 남의 어려움을 급하게 여기고 사물을 구제하기에 이르러서는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굶주리고 목이 마른 듯 급급하게 하였다. 초년에 과거공부를 하여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중년에는 향시에 합격하여 예부시(禮部試)주 74)에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권하기를 가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선발될 수 있다고 하니 공이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데 어찌 권세가에 빌붙기를 힘쓰겠는가."라고 하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는 인하여 과거공부를 그만 두었다. 공의 맏아들주 75) 송규(頌奎)주 76)가 훌륭한 재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사람들이 권하여 시문(時文)을 지으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자식을 가르침에 귀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다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게다가 사람의 귀함은 명(命)에 달려 있어서 구한다 한들 보장할 수 없는 데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고는 마침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여 가계(家計)주 77)를 세우게 하였다. 만년에 가족을 데리고 화학산(華鶴山)주 78) 안에 들어가 교유(交遊)하는 것을 사절하고 더욱 자신의 능력을 감추면서,주 79) 초의(草衣)를 입고 갈건(葛巾)을 쓴 채주 80) 밤낮으로 흰 구름과 붉은 등라의 사이에서 노닐며 시를 읊조렸다. 나와 송규(頌奎)는 학문의 교분을 정하고 종유(從遊)하며 왕복한 지 전후 몇 년 동안 거의 빠뜨린 달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찾아뵙고 문안하는 것이 빈번하였다. 경진년(1880, 고종17) 봄에는 공이 묵계리(墨溪里)로 선인(先人)을 찾아와 두 집안의 자식들이 종유하는 정의(情誼)를 말씀하셨는데, 종일토록 시립(侍立)하면서 감격하여 잊지 못할 말씀을 많이 하셨다. 4년 뒤에 선인이 세상을 떠나고, 다음 해 갑신년(1884, 고종21) 12월 10일에 공이 또 이어서 세상을 떠났다. 아, 바람에 나무는 고요할 수 없고주 81) 음성과 용모는 날이 갈수록 멀어지며, 추위와 더위가 바뀌고 서리와 이슬이 변한 지 이제 몇 년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던 옛 학업은 그대로 실추되어 당일 기대하였던 만에 하나의 뜻에 부응할 수 없지만 오직 송규만은 재주가 민첩하고 뜻이 확고하며 나아가기만 하고 멈추지 않아, 개인적으로 생각건대, 양가(兩家) 돌아가신 부모의 바람이 전혀 아무런 결과가 없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송규가 또 병을 앓고 있는데, 여러 해 조리하면서 아직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조옹(造翁)의 뜻이 장차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하루는 송규가 편지를 보내 나에게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불초가 무탈할 때에 일찍이 선인의 행장을 써두지 못하였는데, 지금 병이 이미 심해져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천고의 한이 될 듯합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불초를 위하여 한 때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마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아, 고로 여생(孤露餘生, 어려서 부모 잃은 것)이 예전에 교유하였으니 그 사모하는 마음과 측은한 마음이 진실로 보통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며, 더구나 송규가 병에 걸려 간절히 부탁하니 더욱 차마 사양할 수 없었다. 이에 감히 대강을 차례대로 적어 훗날에 입언(立言) 하는 자로 하여금 취할 바가 있게 하였다. 공은 제주 양씨(濟州梁氏) 상기(相基)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송규와 언규(彦奎)이며, 딸은 고홍진(高弘鎭), 이승옥(李承玉), 민모(閔某), 윤의호(尹懿浩)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공보다 7년 앞서 정축년(1877, 고종14)에 세상을 떠나 고을의 동산(東山) 병좌(丙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의 무덤은 화학산(華鶴山) 동쪽 기슭 술좌(戌坐)의 언덕에 있다.
주석 73)몸은……하였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문자는 그 몸이 겸퇴하여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하였으며, 그 말이 어눌하여 마치 그 입에서 제대로 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文子其中退然如不勝衣, 其言吶吶然如不出諸其口.]"라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공손하고 겸양하였다는 말이다.
주석 74)예부시(禮部試)
과거의 본고시로 958년(광종9)부터 실시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대과(大科)와 연결된다. 예부가 주관하므로 예부시(禮部試)라고 하며, 예위(禮闈)·춘관시(春官試)·춘위(春闈)·동당시(東堂試)로도 불렸다. 합격자는 급제(及第)·등제(登第)·중제(中第)·중과(中科) 등으로 표현된다. 예부시 과목은 제술업(製述業)·명경업(明經業)이 양대업(兩大業)을 이루었는데, 제술업이 가장 중시되었다.
주석 75)맏아들
원문의 '주기(主器)'는 종묘(宗廟)의 제기(祭器)를 주관할 적장자로 맏아들을 말한다.
주석 76)송규(頌奎)
문송규(文頌奎, 1859~1888)이다. 개항기 화순 출신의 학자로,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계원(啓元), 호는 구암(龜巖)·면수재(勉修齋)이다. 사람들이 신동이라고 일컬었으며, 하락이수(河洛理數, 개개인의 품성과 운명에 대한 연구)와 천문(天文)의 물상을 확연하게 융회하였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의 요체를 깨닫고, 심성과 이기의 묘리를 세밀하게 분석하니, 선생이 매우 칭찬하였다.
주석 77)가계(家計)
학문이나 공부를 말한다. 주희가 말하기를 "사서는 혼잡하고 경서는 냉담하니, 후생들은 마음과 뜻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외면으로 향하지 않는 이가 적다.[史書鬧熱, 經書冷淡, 後生心志未定, 少有不偏向外去者.]"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3 答呂伯恭》 이황(李滉)이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모름지기 심신을 수렴하여 냉담한 가계(家計)로써 고되고 힘든 공부를 해야 한다. 이에 연찬하고 되씹되 오래도록 그만두지 않아야 바야흐로 그 맛이 좋은 줄을 참으로 알아 힘을 얻게 될 것이다.[惟學者, 先須收斂身心, 以冷淡家計, 作辛苦工夫. 於此鑽硏咀嚼, 久久不輟, 方始眞知其味之可悅, 而得其力也.]"라고 하였다. 《退溪集 卷19 答黃仲擧 別紙》
주석 78)화학산(華鶴山)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우치리와 청풍면 청룡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산세가 학이 날개를 펼쳐놓은 듯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 한다.
주석 79)자신의 능력을 감추면서
원문의 '도회(韜晦)'는 재주나 지혜, 학문, 자취 등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을 말한다.
주석 80)초의(草衣)를……채
초의는 은자가 입는 옷이고, 갈건(葛巾)은 처사나 은사(隱士)들이 쓰던 두건을 말한다.
주석 81)바람에……없고
원문의 '풍수(風樹)'는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자식의 슬픔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주(周)나라 구오자(丘吾子)에게 슬피 통곡하는 이유를 묻자,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한번 가면 오지 않는 것은 세월이요, 다시 뵐 수 없는 것은 어버이이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 往而不來者年也, 不可再見者親也.]"라고 대답하고는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致思》
學生文公行狀
在吾鄕先輩。有博雅長厚慈詳愷悌之德。翕然爲鄕里所服。而無不以君子長者目之者。學生文公其人也。公諱致郁。字禹瑞。江城君諱益漸后。曾祖諱世東。祖諱鳳周。考諱煥相。妣達城徐氏東宇女以。純廟己卯正月一日。生公于綾之笠橋里。公姿相端雅。稟性樂易。存心質慤。持身謹勅。其言訥訥若不出口。其行縮縮若不勝衣。事父母以孝。處兄弟以愛。待族戚以和。接朋友以忠。自家庭推至鄕閭。無不驩然各得其心。忮克殘忍。未嘗一萌於心。俚俗鄙倍。未嘗一出於口。是非毁譽。未嘗一經於耳。至於樂善好義急人濟物。則不顧前後。汲汲若飢渴然。初業功令。爲親應擧。中年參鄕解。赴禮部。有人勸以往見要人。可得選。公正色曰。富貴在天。豈趨附可辦耶。終不應親歿之後。因廢擧業公主器頌奎有才性過人人勸以做時文公曰吾敎子不願爲貴人。只要作好人。況人貴有命。求未可必耶。遂令從學於蘆沙奇先生之門。專意學問以立家計。晩年挈家入華鶴山中。謝絶交遊。益自鞱晦。草衣葛巾。日夕嘯咏於白雲紅蘿之間。義林與頌奎。定爲學問之交。從遊往復。前後幾年。殆無闕月。是以拜床承候爲頻頻矣。歲庚辰春。公訪先人于墨溪里。爲道兩家子從遊之誼。侍立終日。多有感鏤不忘之語。後四年先人棄世翌年甲申十二月十日。公又繼逝。嗚乎。風樹莫靜。音容日遠。寒暑霜露之變。今幾年矣。宿心舊業。因仍失墜。無以副當日萬一之志。而惟頌奎材敏志確。進且不住。私竊以爲兩家先父母之望。不至專歸無有。頌奎且病矣。積年調理。尙不告效。未知造翁之意。且將何居耶。一日頌奎走書要余。且曰。不肖無恙時未曾爲先人下狀德之筆。今病已劇矣。若遂溘然。恐爲千古之恨。願吾子爲不肖。勿吝一時之勞。嗚乎。孤露餘生。於先行交遊。其所以思慕感惻。固非常人之比。而況頌奎之臨病懇託。尤有所不忍辭者。玆敢序次梗槪。使後日立言者。有所取焉。公娶濟州梁氏相基女。擧二男四女。男頌奎彦奎。女高弘鎭李承玉閔某尹懿浩。夫人先公七年丁丑卒。葬于州之東山丙坐原。公墓在華鶴山東麓戌坐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