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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유인 함양 박씨 행장(孺人咸陽朴氏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12
유인주 70) 함양 박씨 행장
조익제(趙翼濟) 군은 착한 선비이다. 나와 만년에 이웃 마을에 살면서 날마다 따르고 쫒은 지 10여년이 되었다. 하루는 선유인(先孺人)의 유장(遺狀)을 가지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자 내가 말하기를, "그대 집안이 대대로 아름다운 덕을 지녔던 것은 진실로 이미 익히 들었으나, 다만 사람이 미천하고 학문이 얕아 받들어 감당하기에 부족한 점이 있네. 그렇지만 두터운 인연을 헤아려 볼 때 또 완강히 사양할 수 없겠네."라고 하였다. 유인(孺人)의 성은 박씨(朴氏)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상서공(尙書公) 휘 선(善)이 시조(始祖)이며, 영암군(靈巖君) 휘 통(通)이 그 중조(中祖)이다. 증조는 휘 종윤(宗允), 조부는 휘 경은(景殷), 아버지는 휘 원(源)이며,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참봉 기대(箕大)의 따님이다. 순조 경진년(1820, 순조20) 11월 3일에 유인은 영암(靈巖) 송정리(松亭里)에서 태어났다. 유인 박씨는 정숙하고 유순하여 어려서부터 장난하는 모습이 없었고, 놀러 다니는 습관도 없었으며, 어버이를 곁에서 모실 때에는 순종하며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 조금 자라서는 규방(閨旁)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밤에는 다닐 때 횃불을 사용하였다.주 71) 그 몸가짐이 엄격함과 어버이를 봉양하는 정성과 일을 다스리는 부지런함은 제칙(提勅)하지 않아도 한결같이 성인(成人)과 같았다. 16세에 고(故) 학생 조용희(趙鏞熙) 공에게 시집갔는데, 조공은 함안(咸安)의 저명한 종족이었다. 문에 들어가 시부모를 알현하자 친척 내외가 그 덕용(德容)과 예모(禮貌)를 보고는 평범한 보통 사람과 달라서 현부(賢婦)를 얻었다고 하례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잘 때까지 집안일을 살펴 일이 크든 작든 반드시 여쭈어 행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드리고 문안드리는 의식과 겨울과 여름에 온청(溫淸)하는 절차는 반드시 성실하고 반드시 삼가서 시종 변함이 없었다. 시부모가 병이 있으면 낮에는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고 밤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아 지극히 근심하다가 혹 음식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시어머니 조씨(曺氏)가 몹시 늙고 병들어 사지를 가누지 못한 지 6년이나 되었는데, 유인이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면서 눕고 일어나는 것을 손수 부축하였고, 먹고 마시는 것을 손수 떠 주었으며, 머리가 가려우면 손수 빗질해주었고, 대소변을 흘리면 손수 닦아주었다. 병상을 부지런히 비질하고 병석에 입었던 옷을 자주 빨아 병실을 항상 청결하게 하니 사람들이 악취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조씨가 매번 사람을 대할 때마다 말하기를, "내가 근근이 목숨을 이어 죽지 않고 6년이나 된 것은 모두 새 며느리의 은덕입니다."라고 하였다. 남편을 섬김에 예의가 있어 사사로이 지낼 때의 안일한 뜻을 경계하고 함부로 친압하는 태도를 끊어 공경하기를 손님을 대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허물이 있으면 번번이 너그러운 말로 규간(規諫)하였고, 성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차분하게 깨우쳐 주고 오해를 풀었으며, 독서하고 근칙하도록 권하여 유업(儒業)을 실추시키지 않게 하였다. 동서를 대함에 항상 굶주리고 추위에 떨까 염려하고 그 노고를 근심하여 음식과 의복은 반드시 균일하게 하였고, 재산과 기물은 반드시 빌려주었으며, 곡직(曲直)을 서로 따지지 않았고, 이해(利害)를 가지고 서로 겨루지 않았으므로 매우 화락하여 누구도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심지어 친족과 이웃에 이르기까지 때에 따라 안부를 묻고 일에 따라 돌보아 주며 은혜와 의리가 있어 각각 그 마음을 얻었다. 태만한 기운을 몸에 베풀지 않았고 이치에 어긋난 비루한 소리를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화려한 물건은 방에 들이지 않았고 무격(巫覡) 같은 무리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자손을 가르칠 적에는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 항상 어진 사우(師友)를 따라 배우게 하였는데, 예가 아닌 곳과 의롭지 못한 사람은 금하여 가지도 만나지도 못하게 하며 항상 말하기를,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는 연연해 할 것이 없고, 높고 화려한 관직은 부러워할 것도 없다. 다만 인가(人家)에 좋은 자손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이 나의 큰 바람이다."라고 하였다. 자기를 꾸짖는 데에 두텁고 남을 꾸짖는 데에 박하며, 스스로를 받드는 것에 검소하고 남에게 베푸는 것에 넉넉하였다. 따라서 한 집안의 안에 은의(恩誼)가 넘쳐흐르고 윤리가 정연하여 가르침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없고 일이 거행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식자(識者)들이 옛날의 정녀(貞女) 숙원(淑媛)에 견주었다. 임진년 6월 17일에 세상을 떠나 부춘면(富春面) 담덕동(澹德洞) 뒤 기슭 건좌(乾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익제(翼濟), 차남은 순제(順濟)이며 딸은 능성(綾城, 능주) 구치복(具致福)과 광산(光山) 이승규(李承奎)에게 시집갔다. 맏이 집의 손자는 내룡(來龍)과 내구(來龜)이며, 둘째 집의 손자는 내주(來柱)이다. 증손은 어려서 기록하지 않는다. 아, 규방의 안에 숨겨진 덕과 그윽한 행실이 상세하지 않은 듯하여도 밖에 드러난 것은 마치 열 손가락이 가리키고 열 눈이 주시하는 것처럼 밝을 뿐만 아니다. 시부모님은 그 효성을 칭찬하고, 친척은 그 자애로움을 칭찬하며, 자손은 그 가르침을 준수하고, 이웃은 그 뜻에 감동받아 고을의 오랜 벗과 원근의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조씨(趙氏)를 덕문법가(德門法家)라고 일컫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너에게 훌륭한 여사(女士)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라.주 72)"라고 하였으니, 나는 조씨가 반드시 훌륭한 후손이 있을 것임을 알겠다.
주석 70)유인(孺人)
9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품계이다.
주석 71)밤에 횃불을 사용하였다
《소학》 〈명륜〉에 "그러므로 여자는 규문 안에서 날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백 리 먼 길의 초상에 달려가지 않는다.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없고 행실을 독단적으로 이룸이 없어서, 참여하여 알게 한 뒤에 행동하고 증험이 있은 뒤에 말한다. 낮에는 뜰에 나다니지 않고 밤에는 다닐 때 횃불을 사용한다. 이는 부덕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是故女及日乎閨門之内, 不百里而犇喪, 事無擅爲, 行無獨成, 叅知而後動, 可驗而後言, 晝不遊庭, 夜行以火, 所以正婦徳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주석 72)너에게……하리라
《시경》 〈기취(旣醉)〉에, "그 따름은 무엇인가.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줌이로다. 너에게 훌륭한 여사를 주고 훌륭한 자손으로 따르게 하리라.[其僕維何. 釐以女士. 釐以女士, 從以孫子.]"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注)에 "여사는 여자 중에 선비의 행실이 있는 자이다." 하였다.
孺人咸陽朴氏行狀
趙君翼濟善士也。余晩接隣閈。日月從逐。爲十餘年。日以其先孺人遺狀。有立言不朽之託。余曰。君家世德之美。固已稔聞。但人微學淺。有不足以承堪。而揆以事契之重。又不可以牢讓。孺人姓朴氏。貫咸陽。尙書公諱善。始祖。靈巖君諱通。其中祖也。曾祖諱宗允。祖諱景殷。考諱源。妣光山金氏參奉箕大女。純廟庚辰十一月三日。孺人生于靈巖松亭里。貞靜柔嘉。自幼無戲嬉之容。無遊走之習。侍側聽順。未有違忤。稍長不出閨旁。夜行以火。其持身之嚴。養親之誠。執業之勤。不費提勅而一如成人。十六歸于故學生趙公諱鏞熙。趙卽咸安著族也。及入門拜舅姑。親戚內外。見其德容禮貌。異於凡常。莫不賀其得賢婦。夙興夜寐以視宮事。事無大小。必稟而行。朝夕滫瀡之供。晨昏定省之儀。冬夏溫淸之節。必誠必謹。終始無替。舅姑有疾。晝不就席。夜不就枕。極其致憂。或至廢食。姑曺氏極老極病。四體不收。至爲六年。孺人晝宵在側。臥起則手扶之。飮啖則手匙之。頭癢則手梳之。遺矢則手除之。勤掃病榻。頻濯病衣。使病室常常潔淨。人不見其有臭惡之氣。曺氏每對人言曰。吾延命不死而至於六年之久者。皆新婦之賜也。事君子有禮。戒燕私之意。絶褻狎之態。敬之如賓。有過則輒寬裕以規諫之。有怒則必從容以諭解之。勸令讀書飭身。不墜儒業。待娣姒。常念其飢寒。悶其勞苦。飮食衣服必均一。財産器用必假貸。不以曲直相稽。不以利害相較。怡怡湛樂。了無間言。至於族戚隣里。隨時問訊。隨事扶恤。有恩有義。各得其心。怠慢之氣。不設於身。鄙俚之聲。不出於口。華麗之物。不入於房。巫覡之類。不納於家。敎子孫必以義方。常令從賢師友遊。至於非禮之地。非義之人。禁不得使之相接焉。常曰。良田美土。不足爲戀。嵬官華職。不足爲羨。但見人家有好子孫。是吾大願也。厚於責已而薄於責人。儉於自奉而豐於施人。一門之內。恩誼融融。倫理井井。敎無不行。事無不擧。識者以古之貞女淑媛擬之。壬辰六月十七日卒。葬富春面澹德洞後麓乾坐原。生二男二女。男長翼濟。次順濟女。適綾城具致福光山李承奎。長房孫來龍來龜。次房孫來柱。曾孫幼不錄。嗚乎。閨房之內。潛德幽行。宜若不詳而其著於外者。不啻若十手十目之爲昭昭也。舅姑稱其孝。親戚稱其慈。子孫遵其敎。隣保感其義。以至鄕邦知舊。遠近人士。無不稱趙氏爲德門法家。詩曰釐以女士。從以孫子。余知趙氏之必有後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