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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기은 정공 행장(箕隱鄭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11
기은 정공 행장
유생 정유흠(鄭瑜欽)은 나에게 배운 지 여러 해인데, 그 사이에 선대인(先大人, 돌아가신 남의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고, 상기를 마친 뒤에 가장을 받들고 와서 사적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가장의 기록에 의하면, 공의 휘는 덕주(德周), 자는 화앙(華仰), 호는 기은(箕隱)이다. 체구가 장대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엄숙하여 온화하고 화락한 풍모가 있고 출중(出衆)하고 탁월한 기개가 있었으니, 그 기국과 인물을 품평하는 것이, 대개 지금처럼 쇠퇴한 세상의 인물이 아니었다. 어려서는 서당에 나아가 형과 함께 공부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 된 자가 부모를 충심으로 봉양주 66)하지 못하고 도리어 부모에게 양육을 받으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마음이 편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여 잠시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이때부터 살림살이가 힘입은 바가 있어서 몸을 편안하게 하는 물건들을 모두 넉넉히 갖추어 드렸다. 5명의 형제 중에 공은 둘째였는데, 장가들고 나자 어버이의 명에 따라 분가하였으나, 조석으로 맛있고 연한 음식을 장만하는 일과 나고 들며 부지런히 집안일을 맡아 다스리는 일을 분가하였다는 이유로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다.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해서는 반드시 성심을 다하고 반드시 미덥게 하였으며, 절기에 따른 예제(禮制)는 마음에 유감이 없도록 하였는데, 가슴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는주 67) 예절은 예보다 지나치게 하였다. 백씨(伯氏)를 부친과 같이 섬겼으며 나가고 물러가는 것을 오직 명(命)대로 하였다. 형이 세상을 떠나자 형의 아들 및 여러 아우들이 모두 어려서 공이 곁에서 도와주었으니, 지극한 정이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한결같이 공의 소생과 같이 하였다.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려 차례로 장가보내고 시집보내 그 집안 생계를 꾸리게 했는데,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매우 애통해하였고남아있는 자제들을 어루만져 보살피기를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제기(祭器)와 제전(祭田)을 갖추고 노비를 사서 종가(宗家)에 바치고, 조상의 산소에 아직 표지(表誌)가 없는 경우에는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웠으며, 아직 제사를 지내지 못한 경우는 전지(田地)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글방을 건립하여 마을 자제들이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흉년이 든 해에는 한 되 한 말의 혜택도 가난하고 곤궁한 사람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고, 절신(節辰, 명절날)을 맞아서는 고기반찬을 보낼 때에 연로한 이들을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을 차리는 초기에는 거친 옷에 거친 음식을 먹으며 빈틈없이 준비하여주 68) 부지런히 일하였다.주 69) 중년에 이르러서는 사세(事勢)와 재력(財力)이 조금 평안해지자 그 학문을 일찍 포기했던 것을 한스럽게 여겨 자식 가르치기를 매우 독실하게 하였다. 글방을 열어 책을 마련하고 어진 스승을 택하여 두어 그 과정과 절도를 엄격하게 조리를 두었다. 소년 중에 문행(文行)이 있는 자를 보면 더욱더 사랑하고 중히 여겨 반드시 불러서 자제들과 함께 종유하게 하였다. 노성(老成)한 사람 중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폐백을 드리고 가서 수학하게 하였다. 이는 모두 가장(家狀)에 기록된 내용의 대략이다.
내가 사우(士友)를 따라 공의 이름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의 가장과 당일(當日)에 들은 말이 다른 말이 없으니, 그 어버이를 속이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내가 일찍이 공을 한번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병세가 이미 극심한 상태에서 병을 무릅쓰고 몸을 일으켜 간절하게 죽은 뒤를 부탁하였으니, 오직 그 자제를 잘 인도하여 불의(不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충신(忠信)으로 마음을 보존하고 효제(孝弟)로 입신(立身)하며 근검(勤儉)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선(善)을 좋아하고 의(義)를 좋아하여 궁핍한 자를 구휼하였지만, 평생 쌓아온 덕행에 대한 보답은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공(公)의 후록(後祿)은 이로부터 장차 크게 오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정씨(鄭氏)의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충장공(忠莊公) 휘 분(苯)은 그의 중계(中系) 현조(顯祖)이시다. 증조는 택의(宅宜), 조부는 인모(仁謨), 아버지는 재충(載忠)으로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어머니는 진원 박씨(珍原朴氏) 정채(挺采)의 따님이다. 공은 헌종(憲宗) 정미(1847, 헌종13)에 태어나 금상(今上, 고종) 갑진년(1904) 4월 22일에 졸하였다. 부인은 수원 백씨(水原白氏) 낙홍(樂弘)의 따님으로 1남 4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글을 요청한 것이다. 딸은 광산(光山) 김세현(金世鉉), 광산 김영대(金永台), 남평(南平) 문수엽(文洙燁)에게 출가하였고, 그 다음은 어리다. 손자는 해성(海成), 해봉(海琫), 해현(海顯)이다. 공의 무덤은 본방(本坊) 서당동(書堂洞) 선조의 묘 오른쪽 산등성이 모좌(某坐)의 언덕에 있다.
주석 66)충심으로 봉양
원문의 '충양(忠養)'은 충심으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내칙(內則)〉에 "효자가 노부모를 봉양할 때에는,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고 그 뜻을 어기지 않으며, 그 눈과 귀를 즐겁게 해 드리고 그 잠자리를 편안하게 해 드리며, 그 음식을 가지고 충심으로 봉양해야 한다.[孝子之養老也, 樂其心, 不違其志, 樂其耳目, 安其寢處, 以其飮食忠養之.]"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주석 67)가슴을……구르는
원문의 '벽용(擗踊)'은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극도로 슬픈 나머지, 가슴을 치며 발을 굴러 뛰는 것을 말한다. 《효경(孝經)》 〈상친(喪親)〉에 "벽용하며 곡읍을 하고, 슬퍼하며 보내 드린다.[擗踊哭泣, 哀而送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68)빈틈없이 준비하여
원문의 '주무(綢繆)'는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는 뜻으로, 빈틈없이 자세하고 꼼꼼하게 미리 준비해서 환란을 예방한다는 말이다. 《시경》 〈빈풍(豳風) 치효(鴟鴞)〉의 "하늘에서 아직 장맛비가 내리기 전에, 저 뽕나무 뿌리를 거두어다가 출입구를 단단히 얽어서 매어 놓는다면, 지금 너희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혹시라도 감히 우리 새들을 업신여길 수 있겠는가.[迨天之未陰雨, 徹彼桑土, 綢繆牖戶, 今女下民, 或敢侮予.]"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석 69)부지런히 일하였다
원문의 '길거(拮据)'는 《모전(毛傳)》에서 "길거는 극국(撠挶)이다." 하였는데, 공씨(孔氏)의 소(疏)에 "극(撠)은 가진다[持]는 것이다." 하였다. 극국은 '손톱으로 풀을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길거는 둥지를 만들 때 손과 입을 함께 움직이며 바삐 일하는 것을 말한다.
箕隱鄭公行狀
鄭生瑜欽。從余遊有年。間遭其先大人喪。服闋而奉家狀來。謁不朽之文。按狀。公諱德周。字華仰。號箕隱。體相碩大容止端嚴。溫溫有愷悌之風。軒軒有倜儻之氣。其器局品第。蓋非衰世人也。幼而就塾。與兄連業。稍長。見家甚艱。甘旨不充。慨然曰。爲人子者。不能忠養父母。而反被養於父母。何忍一日安心。遂竭力服勞。暫不暇逸。自是生理有賴。而便身畢給。兄弟五人。公居第二。及其有室。以親命分炊。而朝夕甘腝之洪。出入幹理之勤。不以分炊而有少異。遭內外艱。必誠必信。時月之制。無憾於心。而擗踊之節。有過於禮。事伯氏如嚴父。進退惟命。兄歿。兄子及諸弟皆幼。公左右扶持。至情懇惻。一如所生。待其長。次第昏娶。俾立家計。次第歿。哀痛殊甚。撫恤遺孤亦如之。具祭器備祭田買奴婢。納于宗家。先世墳塋。有未表誌者。伐石以竪之。有未設享者。置田以祭之。營構齋塾。爲村子弟肄業之所。當飢歲。升斗之惠。遍及於貧乏。遇節辰。饌肉之饋。不遺於高年。設産之初。菲食惡衣。綢繆拮据。至於中身。事力稍䌥。嘗恨早失其學。敎子甚篤。開塾儲書。擇置賢師。課程節度。嚴有條緖。見少年有文行者。甚加愛重。必招延之。使與子弟遊。有老成可師者。爲贄幣。使之往從焉。此皆狀辭大略也。余從士友。聞公之名久矣。而今日之狀與當日之聞無異辭可謂不誣其親矣。余嘗一過於公。見病已劇矣。力疾而作。眷眷身後之託。惟是善道其子弟。使不入於不義。以忠信存心。以孝弟立身。以勤儉成家。樂善嗜義。賙窮恤匱。平生積累。不食其報。余謂公之後祿。從此而將有大來之日。鄭氏貫晉陽。忠莊公諱苯。其中系顯祖也。曾祖宅宜。祖仁謨。考載忠。世有隱德。妣珍原朴氏挺采女。公以憲宗丁未生。今上甲辰四月二十二日卒。配水原白氏樂弘女。生一男四女。男謁文者。女光山金世鉉光山金永台南平文洙燁。次幼。孫海成海琫海顯。公墓在本坊書堂洞先隴右岡某坐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