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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만취헌 정공 행장(晩翠軒鄭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10
만취헌 정공 행장
만취헌(晩翠軒) 처사 정공(鄭公)은 무신년(1908)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주 53) 한 달 뒤 거주지 가까운 땅 운주동(雲柱洞) 술좌(戌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아들 순진(淳珍)이 가장(家狀)을 받들고 내가 사는 봉양(鳳陽)의 누추한 집으로 찾아와서 사적(事蹟)을 길이 전할 글을 청하였다. 아, 처사는 바로 나의 50년 지기 옛 친구이며, 양세(兩世)에 걸쳐 종유하고 일심으로 의기투합하였으니 어찌 차마 행장을 짓는 데 적임자가 아니라고 사양하겠는가. 공은 체구가 장대(長大)하고 훌륭한 용모에 수염도 아름다워서 보기만 해도 준걸스럽고 박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성품과 기질은 온순하고 화락하였으며, 행동거지는 안정되고 자상하였다. 선행을 즐겨하고 의를 좋아하였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온화하고 자상하여 화한 기운이 사람에게 스며드니 자상하고 화락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어려서부터 과거 공부를 하여 문사가 풍부하였지만 시류를 붙좇고 사정(私情)을 따라 요행으로 벼슬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만년(晩年)에 과업(科業)이 사람을 그르치는 것을 개탄하고는 마침내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밤낮으로 두루 열람하여 의취(義趣)를 힘써 궁구하였다. 그러므로 그 문장(文章)에 발현되고 행위에 드러난 것이 늙을수록 더욱 치밀하여 찬란하게 문채가 났으니, 학문을 함에 법도가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 어버이를 섬길 때에 살아계실 적에는 그 기쁨을 다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슬픔을 다하였으며, 기일(忌日)주 54)에 이르러서는 어렴풋이 뵙는 듯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듯주 55) 마치 살아계신 듯이 모시는 정성주 56)을 다하였다. 그 아우와의 우애가 순수하고 독실하여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고 지냈는데, 늙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고아가 된 조카들을 보살피고 기르면서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하였다. 아이였을 적에, 노상에서 한 노인이 땔나무를 지고 가는 것을 보고 그 노인을 불쌍히 여겨 주머니 속에 있는 돈을 꺼내어 갈증을 풀도록 도와주었으며, 엄동설한에 한 일가 사람이 지나가자 그 입고 있는 것이 매우 얇은 것을 보고 한 벌의 옷을 내어 그에게 준 적이 있었다. 중년에 서울에 갈 때, 동행 중 한 사람이 병이 매우 심하였는데, 동반한 여러 사람은 모두 가버리고 공만이 홀로 밤낮으로 병간호를 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강도(江都)에 변란주 57)이 일어나 풍문이 매우 흉흉하자, 사람들이 일찍 돌아가라고 권유하여 어버이께 걱정을 끼치지 말게 하니 대답하기를, "병이 났을 때 서로 구휼함은 평상시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천 리 밖에서 위급한 상황에 닥쳤다고 버려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차도가 있어 함께 돌아왔다. 하루는 한 여자가 이웃집으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양가의 딸로 흉년에 구걸하다가 남에게 팔려 종이 되었다는 것을 물어서 알고는 이에 산 사람에게 권유하여 마침내 속량(贖良)주 58)하여 돌려보냈다. 흉년을 만나면 의식(衣食)을 절약하고 그 남은 것을 친척과 오랜 친구 중 가난한 자들을 도왔으며, 시절마다 안부를 묻는 것과 길흉사나 경조사에도 은혜가 두루 미치고 일찍이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효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들으면 공은 그를 불러다가 타일렀는데, 말이 지극히 정성스럽고 간곡하니 그 사람이 감동하여 깨닫고는 마침내 효자가 되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의 변란주 59)에 비적의 무리가 크게 일어나자 의리(義理)와 화복(禍福)을 진달하여 한 사람 한 사람 타이르고 이해시키니 고을이 이에 힘입어 사교(邪敎)에 물들지 않은 자가 매우 많았다. 문규(門規)를 세워 집안의 화목을 도모하였고, 동약(洞約)주 60)을 만들어 예속의 사귐을 밝혔다. 자식을 가르칠 때에는 시문(時文)주 61)을 지어 과거를 쫓지 못하게 하고 항상 최면암(崔勉庵)주 62)과 기송사(奇松沙),주 63) 정애산(鄭艾山)주 64)의 문하에서 종유하게 하였다. 불량한 사람과 접촉하지 않았고, 분잡하고 화려한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빛나는 광채를 간직한 채 산수 좋은 고을에서 유유자적 지내니 그 세속을 벗어난 뛰어난 운취가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할 만하게 하였다. 공은 하동(河東)사람으로 휘는 기현(奇鉉), 자는 치홍(致弘)이다. 고조 인철(仁哲)은 참판에 증직되었고, 증조 수국(遂國)은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조부 권열(權烈)은 통정대부를 지냈으며 효성으로 정려(旌閭)의 명을 받았다. 아버지는 재일(在馹)이며 어머니는 밀성 박씨(密城朴氏) 명원(命源)의 따님이다. 헌종(憲宗) 갑진년(1844, 헌종10) 2월 19일에 바로 공이 태어났다. 16세에 공주 이씨(公州李氏) 의무(宜茂)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주 65), 아들 순진(淳珍)과 문일수(文日洙)에게 출가한 딸은 이씨의 소생(李氏)이며, 순학(淳學)、순룡(淳龍)、순경(淳璟)、순호(淳鎬)와 문병우(文秉禹)에게 출가한 딸은 진씨(陳氏)의 소생이다. 아 나와 공은 평생 교분을 맺어 늘그막에도 곁에서 서로 지켜보면서 따뜻하게 품어주는 정이 더욱 간절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천고의 사람이 되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물을 닦고 붓을 적셔 삼가 그 행실을 기술하여 돌려보낸다.
주석 53)세상을 떠났다
원문의 '관화(觀化)'는 만물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장자》 〈지락(至樂)〉에 "사람의 생명은 빌린 것이다. 빌려서 살고 있으니 생명은 먼지나 때와 같은 것이다. 사생은 주야의 교대와 같은 것이다. 게다가 나는 자네와 함께 만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는데, 마침 변화가 나에게 미쳤으니 내가 또 어찌 싫어할 것인가.[生者假借也. 假之而生, 生者塵垢也. 死生爲晝夜. 且吾與子觀化而化及我, 我又何惡焉?]"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주석 54)기일(忌日)
원문의 '부일(夫日)'은 그날이라는 뜻으로 부모의 기일(忌日)을 이른다. 《예기》 〈제의(祭義)〉에 "군자에게는 종신(終身)의 상(喪)이 있으니, 기일을 이른다. 기일에는 일상적인 업무를 보지 않으니, 이것은 불길한 날이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날〔夫日〕에는 내 마음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만 쏠리기 때문에 다른 사사로운 일에 마음을 쏟을 수가 없어서이다.[君子有終身之喪, 忌日之謂也. 忌日不用, 非不祥也, 言夫日, 志有所至, 而不敢盡其私也.]"라고 보인다.
주석 55)어렴풋……듯
《예기》〈제의(祭義)〉에, "제사하는 날에 묘실(廟室)에 들어가서 어렴풋하여 반드시 조상이 신위에 계심을 뵙는 듯하며, 제수를 올리면서 주선하여 방문을 나올 때에 숙연하여 반드시 조상이 거동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며, 제수를 올리고 방문을 나와 들을 때에 반드시 조상이 크게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祭之日, 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주석 56)마치……정성
선조의 영혼이 와 계신 듯이 정성스럽게 한다는 뜻이다. 《논어》 〈팔일(八佾)〉에 "선조의 제사를 지내실 적에는 선조가 계신 듯이 하셨으며, 신에게 제사를 지낼 적에는 신이 계신 듯이 하셨다.[祭如在, 祭神如神在.]"라는 말이 있다.
주석 57)강도(江都)에 변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어 많은 사람들이 순절한 것을 말한다. 강도는 강화(江華)를 달리 일컫는 말이다.
주석 58)속량(贖良)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매매되고 사역(使役)되던 비복(婢僕)ㆍ백정(白丁)ㆍ무격(巫覡)ㆍ배우(俳優)ㆍ창녀(娼女) 따위의 종들이 대가(代價)를 바치고 노비(奴婢)의 신분을 면제받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주석 59)갑오년의 변란
1894년(고종31) 6월 21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궁궐을 점령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를 통상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고 한다. 이후 민씨(閔氏) 정권은 붕괴되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하여 제1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성립시키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하게 된다. 이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유생(儒生)들은 갑오변란과 일본의 사주를 받은 친일적 개화 정권의 개혁 정책을 민족 존망의 위기로 받아들이고 상소를 올리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는 활동까지 전개하였다. 《김상기, 조선말 갑오의병전쟁의 전개와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3권,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편, 지식산업사, 1989》
주석 60)동약(洞約)
조선 중기(16세기) 이후 지방의 양반들이 신분질서의 유지와 결속을 위하여 만든 동단위 자치조직으로 동계(洞契)·동의(洞議)·동안(洞案)이라고도 한다. 향약이 국가 차원에서 장려되었지만, 향촌 전체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데는 비효율적이었으므로 몇 개의 자연 촌락으로 이루어진 동에 거주하는 양반들이 결속하여 스스로의 관심과 이해를 반영시킨 동약을 실시했다고 한다.
주석 61)시문(時文)
고문(古文)에 상대되는 말로 당시에 유행하는 문장을 가리키며, 과거 시험을 보는 데 필요한 문체의 글을 뜻한다.
주석 62)최면암(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으로,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생활하던 중에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에 《면암집》이 있다.
주석 63)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으로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신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김평묵(金平默, 1819~1891)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의 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복역하고 출옥한 다음, 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를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주석 64)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로, 자는 영오(英五) 또는 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당시 국권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저술과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주석 65)장가들었는데
원문의 '위금(委禽)'은 혼례(婚禮)에서 납채(納采)할 때에 나무로 만든 기러기를 올리던 데에서 유래하여, 장가드는 일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원년 기사에 "춘추 시대 정나라 서오범의 여동생이 아름다웠다. 공손초가 그녀에게 장가들려 했는데, 공손흑이 또 심부름꾼을 보내 억지로 기러기를 맡겼다.[鄭徐吾犯之妹美, 公孫楚聘之矣, 公孫黑又使强委禽焉.]"라고 하였다.
晩翠軒鄭公行狀
晩翠軒處士鄭公。以戊申二月二十五日觀化。踰月而葬于所居近地雲柱洞戌坐之原。遺胤淳珍奉家狀。過余鳳陽敝廬。謁不朽之文。嗚乎。處士是余五十年舊要。兩世遊從。一心密勿。豈忍以非其人辭。公身長體碩。好容顔美鬚髥。見之可知其爲峻茂朴實人也。性氣溫良。擧止安詳。樂善嗜義。愛人喜施。溫溫諄諄。和氣薰人。可知其爲慈詳愷悌人也。少業功令。文詞贍富。而未嘗趨時徇私爲僥倖干進計。晩年慨歎科業之誤人。遂將心經近思錄等書。晝夜閱覽。務窮義趣。是以其發於文詞。著於施爲者。老益邃密。斐然有章。可知其爲學問規矩人也。其事親也。生而盡其歡。死而盡其哀。至於夫日之臨。僾然愾然以盡如在之誠。與其弟友愛純篤。長枕大被。老而不替。撫育孤姪。無間已出。兒時路上見一老人負薪而行。悶其老。出囊金以資其解渴。冬雪中。一族人過之。見其所着甚薄。出一襲衣與之。中年赴京。同行一人。得疾甚劇。諸伴皆去。公獨晝夜救護。居未幾日。江都變起。風聞甚駭。人勸之早歸。毋貽親憂。答曰。疾病相恤。平時猶然。況在千里之外而可以危急相棄乎。月餘見差同還。一日有一女子逃匿隣家。問知其以良家女。凶年行乞。因以見賣爲婢於人。乃諭所買者。遂得贖良而還之。遇飢歲。縮衣節食。推其所餘。以周親戚知舊之貧者。時節寒暄吉凶慶弔恩意周遍未嘗有闕有人以不孝聞公招諭之。言極懇惻。其人感悟。卒爲孝子。甲午之變。匪類大熾。爲陳義理禍福。面面諭解。鄕里賴不染邪者甚多。立門規。講敦睦之義。設洞約明禮俗之交。敎子不令作時文覓科第。常令遊從於崔勉庵奇松沙鄭艾山之門。身不接浮浪之人。足不到紛華之地。潛光蘊輝。婆娑邱林。其偉韻逸趣。令人可敬。公河東人。諱奇鉉。字致弘。高祖仁哲贈參判。曾祖遂國五衛將。祖權烈通政。以孝命旌。考在馹妣密城朴氏命源女。憲宗甲辰二月十九日。卽公之寅降也。十六委禽于公州李氏宜茂女。男淳珍。女文日洙李氏出。淳學淳龍淳璟淳鎬。女文秉禹。陳氏出也。嗚乎。余與公爲平生之契。而到老相守。益切煦濡之情。誰知今日而奄作千古人耶。抆淚泚筆。謹述其行以還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