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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죽계 조공 행장(竹溪曺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09
죽계 조공 행장
공의 휘는 덕기(德琪), 자는 기지(器之), 호는 죽계(竹溪)이다. 조씨(曺氏)의 선계는 창녕(昌寧)에서 나왔으니, 신라 태사(太師) 창성 부원군(昌城府院君) 휘 계룡(繼龍)이 그의 시조이다. 증조는 효제(孝悌)가 있어 효행으로 재랑(齋郞)주 43)에 제수되었고, 조부 억원(億元)은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아버지 여홍(汝弘)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니는 평택 임씨(澤林氏) 억문(億文)의 따님이다. 공은 명종(明宗) 정미년(1547) 7월 13일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 보통 아이들과 같지 않았다. 스승에게 나아가주 44) 배우기 시작하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진보하였다. 13세에 《논어》를 읽다가 자하(子夏)가 질문한 '교소천혜(巧笑倩兮)'에 이르러주 45)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 또한 근본에 힘쓴다는 뜻이니, 배워서 본말과 선후를 알지 못한다면 마치 기름덩이에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힘만 허비하고 공효는 없을 것이다."주 46) 라고 하고는, 마침내 마음을 잡아 함양(涵養)하고 근본을 바로잡아 근원을 맑게 하는 경지에 더욱 힘을 다하였다. 약관에 시서(詩書)와 육예(六藝)에 통달하여 명성이 자자하였다.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서 미암(眉庵) 유선생(柳先生)주 47) 문하에 들어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절차탁마하여 날로 더욱 발전하니 선생이 칭찬해 주고 인정해 줌이 매우 컸다. 부모를 섬길 적에는 온화한 안색과 부드러운 모습으로 조촐한 음식이나마 한껏 기쁘게 해 드렸고, 상을 당하자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아우 덕련(德璉)과 함께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형제가 긴 베개를 함께 베고, 큰 이불을 함께 덮어주 48) 낮과 밤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종족과 붕우에게는 각각 그에 맞는 방도를 다하여 대하였다. 부춘산(富春山) 속에다 오두막집을 지어 세 오솔길주 49)에 꽃과 대나무를 심어놓고 사방 벽에 도서를 두었으며, 문을 닫아걸고 휘장을 드리우고서 경서를 궁리하고 이치를 연구하니 이웃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매번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할 때에는 복건(幅巾)과 망혜(芒鞋) 차림으로 수림(水林)과 천석(泉石)의 사이에서 소요하면서 화려한 영화(榮華)를 부러워하거나 외롭고 쓸쓸함을 서글퍼할 줄 몰랐다. 유선생이 일찍이 절구(시) 한 수를 붙여 말하기를,

은둔해서는 도연명과 사영운주 50)의 정취처럼 하고 (隱同陶謝趣)
마음으로는 정자와 주자의 글을 배운다 (心學程朱書)

라고 하였다. 우복(愚伏) 정선생(鄭先生)주 51)이 본도(本道)의 절도사로 있으면서 순시하다가 본읍(本邑)에 왔을 적에, 수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 만나보고 탄복하기를, "직접 보니 들은 것보다 훨씬 뛰어나도다."라고 하고서 예물을 보내왔다. 공이 일찍이 그 아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는 네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네가 귀인(貴人)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말을 신중히 하는 것이 화를 멀리하는 도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을 보존하고 학문을 진보시키는 것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선조 때, 향도천(鄕道薦)으로 침랑(寢郞)에 제수되었고, 인조 갑자년(1624) 5월 8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금오산(金鰲山)주 52) 갑좌(甲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부장(部將) 탁(倬)의 따님으로 부덕(婦德)을 온전히 갖추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명서(命瑞)는 한성 좌윤(漢城左尹)을 지냈고, 딸은 진사 박립(朴立)에게 출가하였으며, 증손 이하로 매우 번창하였다. 숙종 때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아, 재주는 세상에 쓰이기에 충분하였는데도,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는 문장에 힘쓰기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학문은 다른 사람정도를 따라가기에 충분하였는데도,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에 급급해하지 않았으니, 공의 숭상하는 뜻이 무엇이며,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지위의 높고 낮음과 이름의 드러남과 가려짐으로 공을 논할 바가 아니다. 후손 석주(錫柱)가 그 집안에 전하는 문자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그의 행장을 청하니, 나는 행장을 지을만한 적임자가 아님으로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가전(家傳)을 바탕으로 대략 윤색을 가하였다.
주석 43)재랑(齋郞)
재랑은 종묘와 사직의 제사를 맡은 하급 관리로, 위(魏)나라 때 처음 설치하였는데 태상(太常)에 속하였고, 당나라와 송나라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묘(廟), 사(社), 전(殿), 궁(宮), 능(陵), 원(園) 따위의 참봉을 달리 이르기도 한다.
주석 44)스승에게 나아가
원문의 '취부(就傅)'는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나이인 10세를 말한다. 《소학(小學)》 〈입교(立敎)〉에 "여덟 살이 되면 문호를 출입하고 자리에 나아가고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반드시 장자(長者)보다 뒤에 하여 비로소 겸양(謙讓)을 가르친다. 열 살이 되면 바깥 스승에게 나아가 바깥에서 거처하고 잠잔다." 하였다.
주석 45)자하(子夏)가……이르러
자하(子夏)가 공자(孔子)에게 "옛 시에 '예쁜 웃음에 보조개가 예쁘며 아름다운 눈에 눈동자가 선명함이여. 흰 비단으로 채색을 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을 마련하는 것보다 뒤에 하는 것이다.[繪事後素.]"라고 하였다. 이는 곧 진실한 자질이 있은 뒤에 예의와 문학을 할 수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論語 八佾》
주석 46)이……것이다
얼음을 조각한다는 것은 곧 수고만 할 뿐 보람이 없음을 뜻한다. 한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에 "안으로 바탕이 없이 겉으로 문만 배운다면, 아무리 어진 스승이나 훌륭한 벗이 있더라도 마치 기름덩이에다 그림을 그리거나 얼음에다 조각하는 것과 같아서 시간만 허비하고 공효는 없을 것이다.[內無其質而外學其文, 雖有賢師良友, 若畫脂鏤氷, 費日損功.]"라고 하였다.
주석 47)미암(眉庵) 유선생(柳先生)
유희춘(柳希春, 1513~1577)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사돈간이며 선조(宣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다. 1547년(명종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주석 48)긴……덮어
형제간에 우애가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서》 삼종제자전(三宗諸子傳)에, "현종이 태자로 있을 적에 큰 이불과 긴 베개를 만들어 여러 아우들과 함께 썼다[玄宗爲太子, 嘗製大衾長枕, 將與諸王共之.]."라는 고사가 있다.
주석 49)세 오솔길
원문의 '삼경(三徑)'은 세 오솔길이란 뜻으로, 본디 한(漢)나라 때 은사(隱士) 장후(蔣詡)가 자기 집 대나무 밑에 세 오솔길을 내고 친구인 구중(求仲), 양중(羊仲) 두 사람하고만 서로 종유했던 데서, 전하여 은자의 처소를 가리키는데,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잠(陶潛) 또한 일찍이 팽택 영(彭澤令)을 그만두고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세 오솔길은 묵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 남아 있도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주석 50)도연명과 사영운
원문의 '도사(陶謝)'는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의 병칭이다. 두보(杜甫)가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 가에 초당을 짓고 살 때 강물이 크게 불어난 것을 보고 지은 〈강상치수여해세료단술(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에 "어찌하면 시상(詩想)이 도연명, 사영운 같은 이를 얻어서 그로 하여금 시 짓게 하고 함께 노닐꼬.[焉得思如陶謝手, 令渠述作與同遊.]"라고 하였다.
주석 51)우복(愚伏) 정선생(鄭先生)
정경세(鄭經世, 1563~1633)로 우복은 그의 호이고, 자는 경임(景任), 본관은 진주(晉州), 초시(初諡)는 문숙(文肅), 개시(改諡)는 문장(文莊)이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19)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 검열 등을 거쳐 사가독서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尙州)의 인사들이 의병을 규합하고 정경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갑작스럽게 왜적과 맞닥뜨리게 되어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그해 겨울에는 의병들의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호서(湖西) 지역으로 가다가 천연두에 걸려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 임진왜란 후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우복집》ㆍ《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다.
주석 52)금오산(金鰲山)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해 있는 용암산(聳岩山, 547m)의 옛 이름이다. 용암산이라는 이름은 솟을 용(聳)과 바위 암(岩)자인데, 원래는 산위의 샘에 금자라[金鰲]가 있다고 하여 금오산(金鰲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산 정상에 용암이 솟아 오르듯 솟은 바위가 있다'고 하여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竹溪曺公行狀
公諱德琪。字器之。號竹溪。曺氏系出昌寧。新羅太師昌城府院君諱繼龍。其鼻祖。曾祖孝悌。以孝行除齋郞。祖億元直長。考汝弘軍資監正贈吏曹參判。妣平澤林氏億文女。公以明宗丁未七月十三日生。天稟挺邁。不類凡兒。就傅上學。文理日進。十三讀論語。至子夏問巧笑倩兮。沈思良久曰。此亦務本之意也。學而不知本末先後。則如畵脂鏤氷。勞而無功。遂於操存涵養端本淸源之地。尤致力焉。弱冠通詩書六藝。聲聞藹然。廢擧業。遊於眉庵柳先生之門。薰陶切磋。日益展拓。先生稱許甚重。事父母。怡色婉容。菽水盡歡。居喪廬墓。與弟德璉友愛甚篤。長枕大被。日夕不離。宗族朋友。待之各盡其方。結廬富春山中。三徑花竹。四壁圖書杜門下帷。窮經硏理。隣里罕見其面。每良辰和煦。幅巾芒鞋。逍遙於水林泉石之間。不知芬華之爲可艶。而踽凉之爲可傷也。柳先生嘗寄一絶詩有曰。隱同陶謝趣。心學程朱書。愚伏鄭先生按節本道。巡到本邑。舍車徒入見。歎曰。所見浮於所聞。因致幣物。公嘗戒其子曰。吾願汝爲好人。不願汝爲貴人也。又曰。愼言非惟爲遠禍之道。存心進學。實權輿於此。可不勉哉。宣廟朝。以鄕道薦。除寢郞。仁祖甲子五月八日圽。享年七十八。葬于金鰲山甲坐之原。配南平文氏部將倬女。婦德純備。墓合窆。一男一女。男命瑞漢城左尹。女進士朴立。孫曾以下甚蕃衍。肅廟朝贈工曹參議。嗚乎。才足以售世而不屑屑於沽衒之文。學足以及人。而不汲汲於干進之路。未知公之所尙者何志。所樂者何事。位之軒輊。名之顯晦。非所以論公也。後孫錫柱持其家傳文字。請余狀其行。余以非其人。辭不獲已。謹据家傳而略加潤色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