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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간재 처사 이공 행장(澗齋處士李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07
간재 처사 이공 행장
공의 휘는 기백(琪白), 자는 광빈(光斌), 호는 간재(澗齋)이다. 이씨(李氏)는 세계(世系)가 전주(全州)에서 나왔으며 신라 시대에 사공(司空)을 지낸 휘 한(翰)이 시조(始祖)이다. 사공 이하 21대는 조정(朝廷) 왕실의 계통과 같으며 완풍군(完豐君) 휘 원계(元桂)에 이르러 처음으로 별자(別子)주 32)를 계승한 대종(大宗)이 되었다. 완풍군은 천우(天祐)주 33)를 낳았고, 천우는 관직이 병조 판서에 이르러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도공(襄度公)이다. 양도공은 굉(宏)을 낳았으며 굉은 관직이 부총제사(副摠制使)에 이르렀고 부총제사는 명인(明仁)을 낳았다. 명인은 주부(主簿)를 지냈고 담양(潭陽)의 풍서(豐墅)로 남하하여 살았다. 주부는 효상(孝常)을 낳았고 효상은 부사맹(副司猛)을 지냈으며 담양에서 영광(靈光)으로 이주하였다. 사맹(司猛)부터 8세가 지나 휘 상후(相厚)에 이르러 능주(綾州)로 이주하였는데, 상후는 공의 6대조이다. 증조부는 이덕(以德)이고 조부는 윤택(潤宅)이다. 고(考)는 문계(文繼)이고 비(妣)는 화순 최씨(和順崔氏) 봉권(鳳權)의 딸이다. 철종 갑인년(1854, 철종5) 10월 16일에 간리(澗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절조(節操)가 남달라 스스럼없이 굴거나 다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침착하고 차분하여 어른스러운 예의와 법도를 갖추었다. 스승에게 나아가주 34) 공부하게 되자 날마다 과정(課程)을 지켜 소소한 일로 그만두거나 거르는 경우가 없었다. 부모를 섬기는 것이 매우 근실하여 뜻을 받들고 물품을 봉양하는 것이 모두 지극하였고 상례(喪禮)를 봉행하는 데도 애통한 마음을 다하여 상례의 내용과 형식에 유감이 없었다. 기일(忌日)이 돌아와 산재(散齋)주 35)와 치재(致齋)주 36)를 올리면 몸을 깨끗이 하고 모든 제구(祭具)를 주관하며 밤 깊도록 단정하게 앉아 제사가 행해지기를 기다렸다.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마음과 슬퍼하는 안색이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할 만하였다. 형제가 즐겁게 지내 화목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의지할 곳 없는 친척은 거두어 양육하기도 하고 도와주어 혼사를 치르게 하기도 하였다. 향당(鄕黨)의 오랜 벗에게는 길사(吉事)나 흉사(凶事), 새해 첫날에 문안하는 일을 힘닿는 만큼 예를 갖추어 빠트리는 일이 없었다. 외가의 선조를 섬기는 것도 집안 선조를 섬기듯 하여 기일이 되면 반드시 가서 참여하였다. 외조카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자 매우 극진히 보살피고 도와주었으며, 가업(家業)을 남에게 빼앗기자 공이 관에 알리어 억울함을 바로잡아 편안히 살도록 해주었다. 갑오년(1894, 고종31)의 난 때는 자제와 족친들에게 사교(邪敎)에 물들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산속 골짜기로 난을 피했을 때 갑자기 적을 만나자 공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바라는 것이 이것 아니더냐." 하고는 즉시 소 1척(隻)을 주면서 조금도 아까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난이 평정된 뒤 누군가가 소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으나 공은 웃으면서 대꾸하지 않았다. 공은 평소에 담박하고 침착하며 말이 적었다. 일찍이 아우 상백(常白)과 산에 올라 여기저기 구경하는데 한나절이 지나도록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우가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참된 생각, 고상한 정취가 절로 마음에 있는데 무엇 때문에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객이 찾아왔으나 안부를 묻는 것 외에는 한마디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 객이 떠나자 아우가 말하기를, "객을 대접하는 것이 어찌 그리도 냉랭하십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서권(書卷)을 마주하고 고인(古人)과 얘기하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금인(今人)과 얘기를 하겠는가." 하였다. 상백(常白)이 일찍이 덕성(德性)을 수양하는 요체를 묻자, 공이 즉시 주자(朱子)의 〈경제잠(敬齋箴)〉과 범공(范公)주 37)의 〈좌우계(座右戒)〉를 써 주고 인하여 말하기를, "평소에 앉아 있는 자리에 걸어두고 항상 부사(父師)가 엄숙하게 내려다보듯 하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누군가가 "부모가 안 계시니 효도하고자 하여도 미치지 못한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돌아가신 뒤에도 살아계실 때처럼 섬기고 안 계실 때에도 계실 때처럼 섬기며 몸을 상하지 않고 자신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모두 효이다. 어찌 미치지 못한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하루는 어린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집안사람이 공에게 꾸짖게 했더니 공은 아이들을 불러 앞에 앉히고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으면서 슬프고 참담한 기색을 하였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부모에게 불효하였다. 불효자의 자식이 또 불효를 저질렀으니, 이것은 예전에 불효한 죄에 대한 보답이다. 저 아이들에게 무엇을 벌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물러나 자신을 매질하고 스스로 새롭게 변하였다. "먹는 것은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는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食無求飽 居無求安]주 38)", "일은 원칙 없이 무턱대고 따르지 않고 물건은 구차하게 취하지 않는다[事不苟從 物不苟取]", "경(敬)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 행동을 규범에 맞도록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주 39)", "신묘하게 밝히고 묵묵히 이룬다[神而明之 黙而成之]주 40)" 등을 벽에 적어놓고 항상 자신을 견주어 살폈다. 아들 건신(建身)이 범노공(范魯公)의 〈계자(戒子)〉시주 41)를 읽자, 공이 말하기를, "격언(格言), 요어(要語)가 이것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 너는 이 시 1편을 평생의 표준으로 삼아 오늘 아버지가 너에게 경계하는 것처럼 여기거라." 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서로 왕래하며 교분을 맺은 사우(士友)들을 재숙(齋塾)으로 불러 모아 봄가을로 모여 강론을 펼치는 규약을 정하였다. 또 이웃 마을의 6, 7동지와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서로 30일 동안 학습한 내용을 강론하였다. 아마도 늙어서 학업을 그만두는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때문에 식견은 늙어갈수록 더욱 심오해졌고 지조는 늙어갈수록 더욱 단단해져서 함께 강론을 펼친 사람들이 모두 "볼 때마다 진보가 있는 사람은 간재(澗齋)뿐이다."라고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몸은 요인(要人)과 접촉하지 않고 발길은 요문(要門)에 이르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경학(經學)에 힘을 기울여 자신의 뜻을 추구하며 물아(物我)와 육신의 세계를 벗어나 느긋하고 여유롭게 지내면서 인간 세상에 다시 이것과 바꿀 수 있는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를 몰랐다. 그 맑은 운치와 아득한 자취는 참으로 지금 시대를 살았던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주 42)라고 이를 만하다. 계묘년(1903, 광무7) 2월 23일 집에서 편안히 생을 마쳤다. 향리(鄕里)의 인사(人士), 부녀자, 어린아이, 노복들이 탄식하면서 애석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아, 나는 공과 서로 알게 된 지가 20년에 가깝다. 그동안 서신을 주고받고 서로를 따르며 함께 유람하며 흉금을 털어놓는 일이 끊이지 않았지만, 일찍이 한 마디의 망령된 발언이나 한 번의 망령된 행동을 보지 못하였다. 병신년(1896, 건양1) 봄 공이 거의소(擧義所)로 나를 만나러 왔다. 인하여 책망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시사(時事)에 어두워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경거망동하는가. 하지만 평소에 서로 가깝게 지냈으니 어찌 위난 때문에 서로를 따르지 않을 이치가 있겠는가. 원수에게 함께 대적하고 같이 죽는 것은 내가 달갑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으니, 이 일로 공을 알 수 있다. 다만 존심양성(存心養性)에 골몰하는 각종 공부가 근거할만한 바탕이 있어서 장차 얼마나 높고 큰 영역으로 나아갈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하늘이 그의 장수에 인색하고 귀신이 그의 나이를 빼앗아가서 사문(斯文)과 사림(斯林)이 이렇듯 갑자기 복을 잃게 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비통하다! 배(配)는 광산 이씨(光山李氏) 문호(文鎬)의 딸이며 모두 2남을 두었다. 장남 건신(建信)은 제주 양씨(濟州梁氏)를 아내로 맞았고 차남은 아직 어리다. 공이 세상을 떠나고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때 건신(建信)이 숙부에게 부탁하여 내게 와서 말하기를, "장례를 치를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묘갈(墓碣)이나 묘지(墓誌) 등 제반 문자(文字)는 반드시 먼저 행장(行狀)을 갖춘 다음 비로소 이를 근거로 지을 수 있습니다. 선인을 잘 알고 선인의 행장(行狀)을 지을 수 있는 분은 장인(丈人)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인하여 생각하니, 실제적인 덕을 갖췄건만 세상에 드날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벗의 책임이다. 하물며 죽어서 후세에 완전히 사라지게 하겠는가. 이에 건신의 청에 감히 여러 번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32)별자(別子)
제후의 중자(衆子)를 장자(長子)와 구별하여 별자라고 한다. 제후의 중자는 새로운 대종(大宗)의 시조가 된다.
주석 33)천우(天祐)
이천우(李天祐, 1354~1417)이다.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태조 이성계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 1330∼?)의 둘째 아들이다.
주석 34)스승에게 나아가
10살을 가리킨다. 《예기》 〈내칙〉에 "10세가 되면 집을 나가 외부의 스승에게 찾아가서 배우고, 밖에 거주하며, 육서(六書 글자 읽히는 법)와 숫자 계산법을 배운다.[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計.]" 하였다.
주석 35)산재(散齋)
제사하기 전 외출은 하지만 말타기, 음악, 조문(弔問) 등을 하지 않음으로써 몸가짐을 경건하게 갖는 의절이다.
주석 36)치재(致齋)
제사를 올리는 대상에 대하여 거처하던 곳, 말씀하던 모습, 즐기던 것, 지향하던 것, 좋아하던 음식 등 생전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마음을 경건하게 갖는 의절이다.
주석 37)범공(范公)
송(宋)나라 범조우(范祖禹, 1041~1098)의 아들인 범충(范沖, 1067~1141)이다. 〈좌우계(座右戒)〉의 내용은 《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주석 38)먹는 …… 않는다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39)경(敬)으로 …… 한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40)신묘하게 …… 이룬다
《주역》 〈계사전(繫辭傳) 상〉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41)범노공(范魯公)의 〈계자(戒子)〉시
범노공은 북송(北宋)의 명재상인 노국공(魯國公) 범질(范質)을 가리킨다. 그 조카 고(杲)가 승진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시를 지어 주며 조급히 승진하려는 것을 경계시켰던 것을 말한다. 시의 내용은 《소학(小學)》 〈가언(嘉言)〉에 보인다.
주석 42)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남주(南州)의 고결한 선비'로 불렸다. 이를 원용하여 간재(澗齋) 공을 서치에 빗댄 것이다. 《後漢書 卷83 徐穉列傳》
澗齋處士李公行狀
公諱琪白。字光斌。號澗齋。李氏系出全州。以新羅司空諱翰爲始祖。司空以下二十一世。與國朝璿系同。至完豐君諱元桂。始爲繼別之祖。完豐生天祐。官兵曹判書。封完山君。諡襄度公。襄度生宏官副摠制副摠制。生明仁官主簿。南下潭陽豐墅居焉。主簿生孝常官副司猛。自潭移靈光。自司猛入世而至諱相厚。移綾州。是公六世祖也。曾祖以德。祖潤宅。考文繼。妣和順崔氏鳳權女。哲宗甲寅十月十六日。生公于澗里居第。幼有異操。不好戲狎。不好爭競。凝然有成人儀度。就傅上學。日遵課程。未嘗以小小事務。有所廢闕。事親甚謹。志物俱至。執喪致哀。情文無憾。遇忌諱之辰。致散齋潔。躬執凡具。竟夕危坐。以待行祭。其嚴敬之意。哀戚之色。可以感動傍人。兄弟湛樂。未嘗失和。親戚之無依者。或收而養育之。或助而昏娶之。至於鄕黨知舊。吉凶之問。歲時之存。隨力致禮。未有闕焉。事外先如己先。忌日必往參。表侄幼孤。撫恤甚至。家業見失於人。公爲之聞官辨枉。俾安其生甲午之亂。戒子弟族戚。勿染邪敎。逃難山谷。忽遇賊。公曰。汝等所欲非此物耶。卽以牛隻與之。少無吝色。亂平後。人有告牛在處者。公笑而不應。平居恬黙寡言。嘗與弟常白。登山遊賞。過半日而無一言。弟問其故。公曰。眞想逸趣。自在其心言語何爲。一日客來。寒喧外。不交一語。良久客去。弟曰。待客何其冷耶。公曰。對卷方與古人言。何暇與今人言。常白嘗問自修之要。公卽書朱子敬齋箴及范公座右戒以與之。因曰。揭之座側。常如父師之儼臨。則不爲無助也。人或言父母不在。欲孝靡及。公曰。事死如生。事亡如存。不虧其體。不辱其身。皆是孝也。奚謂靡及耶。一日兒子輩有爭端。家人令責之。公招置於前。不誚讓。有悲慙之色。人問其故。曰吾曾不孝於親。不孝之子。又爲不孝。此所以報前日不孝之罪也。於渠何誅。兒輩退而自撾。而自新焉。書食無求飽。居無求安。事不苟從。物不苟取。敬以直內。義以方外。神而明之。黙而成之。等語於壁上。常自鏡攷。子建身信讀范魯公戒子詩。公曰。格言要語。此外何有。汝以此詩一通。看作平生弦韋。如乃父今日之戒汝也。中年以來。遊從士友。排置齋塾。定爲春秋講聚之規。又與隣閈六七同志。一月一聚。相講三十日所課之書。蓋慮其老而廢業也。是以其見識老而益精。持守老而益固。至使同講之人皆曰。每見每有進益。惟澗齋是已云。身不接要人。足不到要門。勤耕服穡以糊其口。劬經力學以求其志。于于洋洋於物我形骸之表。而不知人間世復有何樂可以易此也。其淸韻遐躅。信可謂南州今日之高士也。癸卯二月二十三日。考終于家。鄕里人士。婦孺輿儓。莫不嗟惜。至有涕下者。嗚乎。余與公相知近二十年矣。其間往復從逐。游衍傾倒。非不源源。而未嘗見其有一言妄發一事妄行。丙申春。公來見我於擧義所。因責之曰。子何昧時而輕擧至此耶。然居常相從者。豈以危難而有不相從之理。同仇一死。吾所甘心云。此可以見公矣。但存養窮索。種種功夫。方有田地可據。而將趨乎崇深遠大之域。有不可量。誰知天嗇其壽。鬼奪其年。使斯文斯林遽此無祿耶。痛哉痛哉。配光山李氏文鎬女。擧二男。長建信娶濟州梁氏。次幼。公歿未葬。建信屬其叔父來曰。營葬有日矣。墓碣墓誌諸般文字。必先有行狀而後。乃可以據此而作。知先人熟而可以狀先人行者。其非丈人乎。因念人有實德而不揚於世者。此朋友之責也。況死而使之泯然於後乎。玆於建信之請。有不敢多辭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