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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묵양재 양공 행장(黙養齋梁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06
묵양재 양공 행장
공은 성이 양(梁), 휘가 익환(益煥), 자가 중경(重慶)이며 관향(貫鄕)은 제주(濟州)이다. 당요(唐堯) 시대에 양을나(良乙那)가 한라산(漢挐山)으로 내려와 탐라국(乇羅國)을 세우고, 신라와 고려 시대에 이르러 대대로 작위(爵位)와 공훈(功勳)을 이어받아 동방(東方)의 명망 있는 성씨가 되었다. 중엽(中葉)에 이르러 휘 팽손(彭孫)주 29), 호 학포(學圃)가 교리(校理)를 지냈는데 세상에서는 기묘 명류(己卯名流)로 일컬으며 조정암(趙靜庵) 선생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팽손은 교위(校尉)를 지낸 휘 응기(應箕)를 낳았으며, 응기는 호조 참판에 추증된 휘 산립(山立)을 낳았다. 산립은 첨정(僉正)을 지낸 휘 인용(仁容)을 낳았으며 송석정(松石亭)을 짓고 독서를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인용은 진사(進士) 휘 위남(諱渭)을 낳고 위남은 참봉에 제수되고 효성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위남은 휘 우전(禹甸)을 낳았으며 우전은 덕을 숨기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우전은 휘 지해(之瀣), 호 익우(益愚)를 낳았으며 지해는 우암(尤庵) 송(宋) 선생주 3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월곡(月谷)의 옛 전장(田莊)에서 송석정으로 나와서 살았는데 그로 인하여 그 지역에 집안을 이루었다. 지해는 휘 대하(大夏)를 낳았고, 대하는 현감을 지낸 휘 익조(益祖)를 낳았다. 익조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휘 성헌(成憲)을 낳았는데,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는 휘가 일현(一鉉)이고 조부는 휘가 찬호(贊浩)이다. 고(考)는 휘가 식(栻)으로 문장과 덕행으로 당대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비(妣)는 장흥 마씨(長興馬氏) 언모(彦模)의 딸로 헌종 기해년(1839, 헌종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체구가 넉넉하고 얼굴이 둥글며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엄숙하고 장중하며 목소리가 크고 맑았다. 어려서부터 포부와 신조를 지니고 있어 말하는 모습이 범상치 않았으며 집안에서 효(孝)를 행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을 표하는 의절(儀節)을 어기지 않았다. 집안이 평소 청빈(淸貧)하여 대그릇과 표주박에 담긴 음식조차 자주 거르는 형편이었으나 몸소 농사를 지으며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시(詩)와 예(禮)에 밝은 명문가인데다 원림(園林)과 수석(水石)이 빼어난 곳에 살고 있어 평소에 왕래하는 선비나 사계절에 노닐며 즐기는 사람들로 뜨락에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지만, 공은 주선하는 일에 힘을 다하고 접대에 정성과 예우를 갖추어 환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간간이 한가한 날에는 가숙(家塾)을 깨끗하게 치우고 아우인 덕환(德煥)과 책상을 마주하고 함께 학업을 연마하며 과정(課程)을 그치지 않았다. 평소에 인륜을 소중히 여기고 학식과 품행을 갖춘 선비를 숭상하며 권세나 이익에 빌붙지 않고 영예나 현달을 추구하지 않아 함께 교유한 자들은 모두 누추한 골목의 빈한한 벗들이었다. 남과 어울리는 것은 온화하면서도 정직하여 업신여기거나 예모 없이 대하는 의도가 보이지 않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공정하면서도 너그러워 애매하거나 대충대충 넘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종족(宗族)에게 사랑을 받고 붕우에게 신뢰를 받고 향리(鄕里)에서 흠모를 받았다. 대체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이치가 의심스러우면 공에게 의지하고 자문(諮問)하여 결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중년에 아내를 잃었는데 여러 자녀가 모두 어린 나이였다. 그 정황이 애처로웠지만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이유로 너그럽게 대하지 않았다. 가숙(家塾)을 열고 스승을 맞이하여 자녀 교육에 매우 힘을 기울이며 말하기를, "평생의 소원은 오직 글을 읽는 종자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매번 경계할 때마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 독서를 하면서 나물 먹고 물 마시는 것조차 부족하였지만 학업은 감히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들은 예전보다 배가 부르고 따뜻하게 지낸다고 이를 수 있건만 나태함이 더해서야 되겠느냐. 글을 읽고 행동을 삼가며 집안의 좋은 자손이 되는 것이 부모의 뜻을 봉양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삼생(三牲)과 팔진미(八珍味) 같은 진수성찬으로 부모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효성스럽다고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공은 호방하고 기개가 넘쳤지만 남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늙어서는 더욱 외롭게 지내면서 묵양(黙養)을 자호(自號)로 삼아 만년에 자신을 위로하는 마음을 기탁하였다. 원계(遠溪)로 연재(淵齋) 송(宋) 선생주 31)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또 면암(勉庵) 최(崔) 선생에게 편지와 폐백을 올려 끝까지 의지하고 우러러 받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와 부절이 들어맞듯 서로 의기가 투합하여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았다. 선대(先代)의 전장(田莊)을 중수(重修)하여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어 아우와 노년에 이르도록 아침저녁으로 함께 즐겼다. 좋은 계절이나 명절을 만날 때마다 근처의 옛 친구를 불러 산 경치가 보이고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하면서 은거하는 삶의 회포를 풀었다. 갑진년(1904, 광무8) 11월 23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나 우봉(牛峰)의 왼쪽 기슭 선영 아래 갑자(甲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풍산 홍씨(豐山洪氏) 혁주(赫周)의 딸이고 계배(系配)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기수(箕秀)의 딸이다. 모두 3남 5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회종(會宗), 회윤(會潤)이고 딸은 이기무(李基茂), 박재현(朴梓鉉), 임노일(林魯一), 김모(金某), 오모(吳某)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 나와 공의 관계는 부친과 조부 때부터 대대로 교분(交分)이 있고 어린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다. 옛날 공의 선대인(先大人) 형제를 기억해보면 나이가 많고 덕이 깊어 풍도(風度)와 운치(韻致)가 뛰어났으며 내 선인(先人)과 사이좋게 지내며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불초(不肖)한 내가 만년에 이르러 또 공의 형제와 함께 늙고 함께 어울리는 것이 선대 때와 같으리라고 어찌 알았겠는가. 다만 공이 좀 더 세상에 남지 않고 보잘것없는 나만 뒤에 남았으니, 나의 끝없는 한이 어찌 우리 고장의 불행에서 그치겠는가. 회윤(會潤)이 조카 일승(一承)을 시켜 가장(家狀)을 지니고 나에게 와 영원히 후세에 전할 문장을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보잘것없지만, 공을 잘 알기로는 진실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어찌 감히 자꾸 사양하면서 서로 왕래했던 사람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이에 눈물을 훔치고 붓을 적시어 적어 보낸다.
주석 29)휘 팽손(彭孫)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을 가리킨다. 자는 대춘(大春)이고, 호는 학포(學圃)이다. 중종조에 수찬, 교리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1519년(중종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ㆍ김정(金淨) 등을 위하여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가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綾州)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는 독서로 소일하였다. 1630년(인조8)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18) 순천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 저서로 《학포유집(學圃遺集)》이 있다.
주석 30)우암(尤庵) 송(宋) 선생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다.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 이름은 시열(時烈),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었다. 저서에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다.
주석 31)연재(淵齋) 송(宋) 선생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말한다. 자는 화옥(華玉), 호는 동방일사(東方一士)ㆍ연재(淵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9세손이다. 저서로는 《연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黙養齋梁公行狀
公姓梁。諱益煥。字重慶。貫濟州。唐堯時。良乙那降于漢挐山。建國乇羅。至羅麗。世襲爵勳。爲東方著姓。至中葉有諱彭孫校理號學圃。世稱己卯名流。與趙靜庵先生。同享竹樹院。是生諱應箕校尉。是生諱山立贈戶曹參判。是生諱仁容僉正。築松石亭。以文籍自娛。是生諱渭南進士。除參奉。以孝旌閭。是生諱禹甸。隱德不仕。是生諱之瀣號益愚。受學尤庵宋先生之門。自月谷舊庄。出居於松石亭。因家焉。是生諱大夏。是生諱益祖縣監。是生諱成憲通德郞。於公爲高祖。曾祖諱一鉉。祖諱贊浩。考諱栻。世著文行。妣長興馬氏彦模女。以憲宗己亥生。公體厚面圓。風儀峻整。聲音弘亮。幼有志操。言笑不凡。入孝出恭。未有闕儀家素淸貧。簞瓢屢空。躬幹耕稼。備盡忠養。以詩禮名家。兼有園林水石之勝。平日過從之士。四時遊賞之人庭屨常滿。公周旋竭蹶。接待款厚。無一人失歡。間以餘日。淨掃家塾。與弟德煥對兀連業。不廢課程。平日愛好人倫。敦尙儒雅。不附勢利。不趨芬華。所與遊皆坊曲寒友生也。其接人和而正。不見有侵侮好狎之意。其處事公而恕。不見有依違苟且之狀。是以宗族愛之。朋友信之。鄕里慕之。凡事有所難。理有所疑。無不待以咨決焉。中年喪耦。諸子女皆幼。其情景可哀。而少有過差。不以愛憐而有所假借。開塾邀師。敎之甚力曰。平生所願。惟是文種不絶。每戒之曰。吾兄弟幼而讀書。咬菜飮水。猶爲不充。而課業不敢有懈。今汝輩比前日。可謂飽暖而怠惰過之耶。讀書勅行做人家好子孫。此是養志之大者。不然。三牲八珍。何足爲孝也。倜儻寡諧。老益踽凉。自號黙養。寓晩年自遣之意也。拜淵齋宋先生於遠溪。又上書贄於勉庵崔先生。以付究竟依仰之計。與奇松沙宇萬鄭艾山載圭。契遇甚密。往復不絶。重修先庄。栽花種竹。與其弟到老白首。日夕湛樂。每遇良辰佳節。招致備近知舊。婆娑徜徉於山色水聲之中。以敍幽逸之懷。甲辰十一月二十三日。以宿疾終。葬牛峰左麓先塋下甲坐原。配豐山洪氏赫周女。系配天安全氏箕秀女。擧三男五女。男會宗會潤。女李基茂朴梓鉉林魯一金某吳某。孫以下不盡錄。嗚乎。余於公。爲父祖世交。丱角舊遊。記昔公先大人兄弟。耆年淵德。風韻偉然。而與我先人。遊好源源。豈知不肖晩年。又得與公兄弟同衰相從如當日耶。但公不少延。而沙石在後。區區無窮之恨。豈止爲吾鄕之不幸也。會潤伻其姪一承。抱家狀。託以不朽之文。自惟無狀。而知公之深。則固不後於人矣。豈敢多讓而謂非從遊者之責乎。抆淚泚筆。書以還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