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용암 처사 김공 행장(龍巖處士金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05
용암 처사 김공 행장
공의 휘는 우종(佑鍾), 자는 내선(乃善)이다. 김씨(金氏)는 세계(世系)가 광산(光山)에서 나왔으며 전리 판서(典理判書) 휘 광리(光利)가 비조(鼻祖)이다. 문학(文學)과 사환(仕宦)이 누대에 걸쳐 성대하였다. 고조는 휘 명천(命天)이고 증조는 휘 기성(起聲)이며 조부는 휘 윤광(潤光)이다. 고(考)는 휘가 재영(在{王+營})이고 비(妣)는 진양 정씨(晉陽鄭氏) 기택(基宅)의 딸이다. 헌종 정유년(1837, 헌종3) 1월 2일에 진해(鎭海)의 실안리(實安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총명함이 남달라서 부모가 몹시 중하게 여겼다. 이 해에 능주(綾州)의 용반촌(龍盤村)으로 옮겨 살았는데, 천 리 거리를 이사하고 집은 네 벽만 서 있을 정도여서 생계를 꾸리기도 힘들었지만, 대인(大人)은 자식을 가르치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여 온 힘을 쏟았다. 서당이 집에서 10여 리나 떨어져 있었지만, 돌을 치우고 나무를 베어 길을 평탄하게 만들었다. 깊은 밤마다 직접 술과 음식을 가지고 가서 스승과 동학(同學)들을 대접하여 노고를 위로해 주었다. 조금 자라자 현능한 사우(士友)를 뒤따라 전국 각지를 유학(遊學)하게 하고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은 헤아리지 않았다. 공은 아버지의 뜻을 공경히 받들어 더욱 자신을 담금질하여 일찍이 잠시라도 게으름을 부리는 일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학문은 날로 더욱 풍부하고 해박해졌으며 문장은 날이 갈수록 더욱 성대해졌다. 덕망과 명성이 원근에 떠들썩하였고 같은 시대의 명사(名士) 가운데 교류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시 무사재(無邪齋) 박(朴) 선생주 25)이 같은 고을에 살았는데 공이 문하에 나아가 학업을 익히고 끊임없이 배행하여, 입으로 전하거나 마음으로 전한 핵심과 오묘한 뜻은 다른 사람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많았다. 박 선생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시문(詩文)이나 서화(書畫)에 대하여 더불어 종유(從遊)할 만하기로는 오직 이 사람뿐이다."하였다. 대인(大人)이 세상을 떠나자 공은 급작스럽게 집안일을 꾸려 가게 되었다. 집에 지닌 것이 없고 빚만 산처럼 쌓였지만, 집으로 찾아와 빚을 독촉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아마도 말하기도 전에 신뢰가 이미 갖추어져 사람들이 공을 매우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 빚을 모두 상환하자 비로소 말하기를, "늘 이 일로 말미암아 좋지 않은 말이 선친(先親)에게 미치게 할까 두려웠다. 이제야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겠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공의 집에 가서 머물며 함께 학업을 닦았다. 하루는 공이 밖으로 나가서 저녁 무렵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갑자기 곡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내가 나가서 보았더니 공이 계곡 옆 바위에 서 있었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옛날에 선군(先君)께서 술에 취해 저녁에 돌아오실 때마다 반드시 이 바위 위에서 서서 우룡(禹龍)[어릴 때 공을 부르던 이름이다.]을 불러 등에 업고 건너게 하셨다. 지금 저녁 무렵에 이곳에 이르자니 홀연히 당시의 정경(情景)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곡을 하고 눈물이 흘렀다." 하였다. 하루는 오래된 종이에서 선인의 수묵(手墨 친필)을 발견하고는 손에 쥐고 눈물을 쏟았다. 맏형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고아를 거두어 혼사를 치르고 가산을 마련해 주어 자기가 낳은 자식과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을해년(1875, 고종12)에 노사 선생(蘆沙先生)을 찾아가 인사를 올리자 선생이 공의 뛰어난 자질을 아끼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으로 보자면 세상에 좋은 자질을 지닌 자가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하였다. 신묘년(1891, 고종28) 가을 영남과 호남 양도(兩道)의 사우(士友), 예를 들어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주 26),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주 27) 등과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화엄사(華巖寺)에 모여 며칠 동안 강마(講磨)를 하고 돌아갔다. 계사년(1893) 봄 계남과 애산이 능주(綾州)를 지나자 공은 그들을 영귀정(詠歸亭)으로 맞이하여 날이 저물고 밤이 다하도록 쉬지 않고 강론을 벌였다. 막 출발하려고 할 때 공이 먼저 가면서 석양 무렵에 묵계(墨溪)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애산 등 여러 벗이 품평(品坪)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옹점치(甕店峙)를 넘는데 고개가 매우 높고 가팔라서 밀고 당기며 기어오르듯 하느라고 견딜 수 없이 목이 말랐다. 고갯마루에 이르러 술과 음식 등을 장만하여 기다리는 공을 만나 일행이 모두 흠뻑 취하여 갈증을 풀었다. 일을 처리하는 것의 치밀함이 이 같은 경우가 많았다. 성인의 책이 아니면 보지를 않았고 상도(常道)에 맞는 인간이 아니면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예에 맞지 않는 곳에는 이르지 않았고 의에 맞지 않는 물건을 취하지 않았으며 몸소 밭을 갈고 손수 김을 매어 자기 힘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가르침을 받으려는 생도(生徒)가 사방에서 모여들자 재주의 어짊과 어리석음에 따라 차근차근 엄격하게 가르쳤다. 초야와 산림에 묻혀 지내면서도 한 시대의 문학적 기풍이 성대하여 매우 볼만 하였다. 여러 해 동안 탕약(湯藥) 시중을 드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로써 평소에 학문을 익힌 힘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이런 일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디에 정성을 기울이겠는가. 터럭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하면 장차 평생에 걸쳐 후회하게 될 것이다. 힘쓰거라." 하였다. 한 우인(友人)이 고을의 수령이 되자 그를 아는 사람이 현(縣)의 관아(官衙)를 매일 드나들었다. 공이 경계하기를, "옛날에 원찬(袁粲)주 28)이 포의 시절에 사람을 만나 그와 꽤 친하게 지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찾아갔으나 원찬이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알던 고을 수령이 포의 시절에 만난 원찬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사람을 정도(正道)로 바로잡은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항상 좋은 산수를 꾸미는 것을 여생을 보내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다. 을미년(1895, 고종32)에 거처를 옮겨 한천(寒泉)의 산중(山中)에 은거하여 곤궁하게 지내면서 봉청리(鳳聽里)라고 이름을 붙였다. 평소 관아에 발길을 하지 않았고 고을 수령을 만나지 않았으며 모든 명예나 이익, 영예나 현달에 대하여 담박하였다. 이때가 되어서는 더욱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었으며 교유를 끊고 서적(書籍)에 정신을 집중하고 아름다운 경치에 회포를 풀었다. 물아(物我)를 벗어나 만족스러워하는 것이 뿌리가 감춰진 나무, 광채를 간직하고 있는 구슬과 같았다. 무술년(1898, 광무2) 10월 1일에 세상을 떠나 보성(寶城)의 복내진척(福內眞尺) 금성곡(金聲谷)의 유좌(酉坐)에 묘를 썼다. 배(配)는 파평 윤씨(坡平尹氏) 석진(碩鎭)의 딸로 2남 5녀를 두었다. 아들은 낙부(洛富), 낙인(洛麟)이고 딸은 이서일(李瑞一), 조병채(曺秉采), 정덕홍(鄭德洪), 박선동(朴善東), 위계옥(魏啓玉)에게 출가하였다. 손자인 두용(斗榕), 기용(基榕)은 큰아들 소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공은 순후하고 성실하며 신중하고 정성스러웠으며 성정(性情)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었다. 사람을 접하면 온화한 태도가 그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물을 접하면 진실한 마음이 동물(사물)을 감동시켰다. 남에게 간언하여도 그가 비방으로 여기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수고롭게 만들어도 그 사람이 괴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교만한 자는 스스로 굴복하고 험담을 하는 자는 스스로 그만두었다. 공이 있는 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시끄럽고 어수선한 상태이더라도 분쟁이 발생하지 않았고 경박한 장난조차 벌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왕래하며 친교를 맺어 진퇴(進退)에 서로를 의지하고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서로 안부를 묻고 득실에 대해서 서로 충고를 주고받았다. 인연을 끈끈하게 맺어 가장 가깝고도 오랜 관계이지만 한 번의 언행조차 의리를 벗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공은 사문(斯文)의 순유(醇儒)이고 요즘 세상의 일민(逸民)이라고 이를 만하다. 평소에 알고 지낸 옛날 벗들 가운데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벗의 지행(志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여 그들을 위하여 행적을 찬술한 것이 많았지만, 유독 공에게만 미치지 못하였다. 몸은 병들어 한 올의 실타래같이 위태로운 숨결인지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난다면 백세(百世) 뒤에 다시 공을 아는 자가 누구일지가 늘 두려웠다. 인하여 인품과 재능의 대강을 이처럼 기술하였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공에게 영합하려는 뜻이 있겠는가. 공의 풍도에 대해서 듣고 공의 의리에 탄복한 자는 응당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석 25)무사재(無邪齋) 박(朴) 선생
박영주(朴永柱, 1803∼1874)를 가리킨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석(類碩), 호는 무사재(無邪齋), 관수재(觀水齋)이다. 송치규(宋穉圭)의 문인이다. 정의림(鄭義林)ㆍ이지호(李贄鎬)ㆍ최인우(崔仁宇)ㆍ공병주(孔炳柱)ㆍ조병호(趙秉浩)ㆍ구교완(具敎完)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저서로 《무사재집》이 있다.
주석 26)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ㆍ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이다.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계남집》이 있다.
주석 27)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ㆍ물계(勿溪),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노백헌집》이 있다.
주석 28)원찬(袁粲)
420~477. 남북조 시대의 송(宋)나라 사람이다.
龍巖處士金公行狀
公諱佑鍾。字乃善。金氏系出光山典理判書諱光利。其鼻祖也。文學仕宦。世代煒燁。高祖諱命天。曾祖諱起聲。祖諱潤光。考諱在王+營。妣晉陽鄭氏基宅女。憲宗丁酉正月二日。生公于鎭海之實安里。生而岐嶷。穎悟異常。父母甚器之。是歲移寓于綾州龍盤村。千里遷徙。四壁徒立。調度辛勤。而大人以敎子一事爲十分專務。齋距家爲十里餘。伐石斬木。以坦其路。每於深夜。親齎酒饌。往饋其師及同學者。以慰其勤苦。稍長。令從賢士友。遊學四方。不計家力之不贍。公敬承親志。益自激勵。未始有須臾之或怠。是以問學日益贍博。詞華日益斐蔚。聞望聲輝。藉藉遠近。一時名士。無不願交。時無邪齋朴先生在同鄕。公造門肄業。源源陪從。其口傳心授。肯綮蘊奧。多人所未及者。先生嘗語人曰。翰墨間可與遊從。惟此人而已。大人歿。公猝然當家。家無所有。而積債如山。然未見有一人臨門索債者。蓋信在言前。人已信之也。未幾年。了還其債。乃曰。常恐緣此而使不美之言。及於先親。今而後。可以舒脚眠矣。余嘗往住公家。同硏一日。公出外。日昏不至。忽有哭聲自外聞。余出見之。公立於溪邊石上。問其故。公曰。昔先君每乘醉暮還。必立此石上。呼禹龍【公小字】使負而渡之。今乘昏到此。忽念其時情景。不覺哭泣之發也。一日見先人手墨於舊紙。執之泫然。伯氏早歿。撫其幼孤。爲之成昏設産。無間已出。乙亥往拜蘆沙先生。先生愛其姿質之美。因語人曰。以此一人觀之。世上好姿質何限焉。辛卯秋與嶺湖兩道士友。如崔溪南琡民鄭艾山載圭。會于方丈之華巖寺。講磨數日而歸。癸巳春。溪南艾山過綾州。公邀會于詠歸亭。講討娓娓終日竟夕。臨發公先行。約以夕陽遇墨溪。艾山諸友至品坪小憩。踰甕店峙。極峻急。扶携躋攀。不勝困渴。至嶺上。見公具酒饌等候。一行皆洽醉解渴。其處事糾密多如此。不觀非聖之書。不親非常之人。不到非禮之地。不取非義之物。躬耕手鋤。自食其力。敎授生徒。四方坌集。隨才賢愚。循循雅勅。山林巖穴之間。一時文學之風。蔚然可觀。有人在積年侍湯之中者。公語其人曰。此可以見平日學問之力。爲人子者。於此而不用其誠。惡乎用其誠。如有一毫之不盡。將爲畢生之悔。勉之。一友人爲邑宰。所知每出入縣衙。公戒之曰。昔袁粲遇人於野。頗與之款。後其人往見之。袁粲拒之不納。安知邑宰前日之知。非袁粲野外之遇乎。其勉人以正。皆此類也。常欲粧點好山水爲終老計。乙未移營薖軸於寒泉山中。名之曰鳳聽里。平日不到城府。不見邑宰。凡聲利芬華澹如也。至是益沈晦。杜門斂迹。絶息交遊。遊心於詩書之間。騁懷於風月之中。嗒然充然。如晦根之木。蘊輝之珠。戊戌十月一日卒。墓寶城福內眞尺金聲谷酉坐。配坡平尹氏碩鎭女。二男五女。男洛富洛麟女適李瑞一曺秉采鄭德洪朴善東魏啓玉。孫斗榕基榕長旁出。餘皆幼。嗚乎。公淳實謹慤。沈靜寡黙。接人而和氣薰人。接物而誠意動物。諫人而人不以爲謗。勞人而人不以爲厲。驕敖者自屈。浮放者自戢。凡公之所在。雖稠座紛雜之中。爭競不生。戲褻不作。其見重於人如此。余自童丱。至老白首。出入相友。進退相須。吉凶相問。得失相規。夤緣綢繆。最親且久。而未見其一言一行有不出於義理者。公可謂斯文之醇儒。今世之逸民。余於平生知舊先我逝者。哀其志行之無傳。爲之撰述其行者多矣。而獨於公未之及焉。常恐一縷病喘。朝夕溘然。則百世之下。誰復有知公者。因以述其行治之梗槪如此。豈有一分阿好之意。聞公之風而服公之義者。當有以知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