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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송하 처사 안공 행장(松下處士安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04
송하 처사 안공 행장
공의 성은 안(安), 휘는 국정(國禎), 자는 순견(舜見), 호는 송하(松下)이다. 고려조의 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주 7)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문성공의 증손(曾孫)인 문혜공(文惠公) 휘 원형(元衡)은 공훈으로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졌고, 자손이 이로 인하여 죽성(竹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죽성군은 휘 면(勉), 호 쌍청당(雙淸堂)을 낳았고 쌍청당은 좌찬성을 지내고 이목은(李牧隱)주 8)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쌍청당은 휘 정생(挺生)을 낳았고, 정생은 본조에 들어와 관직이 직제학에 이르렀다. 정생의 아들 휘 을겸(乙謙)이 영암군(靈巖郡)을 다스리게 되자 이로 인해서 남쪽 땅으로 옮겨 살았다. 을겸의 아들 휘 여재(汝再)는 직장(直長)을 지냈고 장흥(長興)에 우거(寓居)하였으며 자손이 이로 인해 장흥에 거주하였다. 직장공의 10대손인 휘 택인(宅仁), 호 회옹(海翁)이 덕을 쌓고 의를 행하여 향리(鄕里)에 널리 알려졌는데,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가 몽원(夢元)이고 조부는 휘가 수책(壽策), 호가 덕림(德林)이며 능주(綾州)로 이주하였다. 가업이 조금 넉넉해지자 선행을 좋아하고 남에게 잘 베풀었다. 고(考)는 휘 영({氵+潁}), 호 금방(錦舫)이며 비(妣)는 해주 최씨(海州崔氏) 수완(粹玩)의 딸이다. 생부(生父)는 휘가 협(浹), 호가 춘탄(春灘)으로 곧 금방공의 아우이다. 형제가 모두 효우(孝友)와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철종 갑인년(1854, 철종5) 9월 9일에 능주의 칠송리(七松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풍채와 용모가 단정하고 순수하며 성격과 기질이 온순하고 어질었으며, 부모를 곁에서 모시거나 명을 따르는 것이 공손하여 물이 흐르듯 하였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갑자기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반드시 단정하고 바르게 앉으며 움직임도 반드시 침착하고 차분하였으니 대체로 천품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6세에 조부상을 당하자 아침저녁으로 전(奠)을 올릴 때 반드시 참여하고 빠지는 일이 없었다. 동학(同學) 가운데 굶은 아이를 보면 반드시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같은 상에 함께 밥을 먹었다. 같은 마을에 굶주리는 사람을 보면 돌아와 부모에게 고하여 진휼하게 하였다. 깊은 밤에 책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같이 고생하는 사람을 대접하였다. 공의 풍도(風度)와 의용(儀容)이 어려서부터 이와 같았다. 공은 두 집안에서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 넉넉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니 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고 이를 만하다. 하지만 교만하고 경솔한 습성이 일체 마음에서 싹트지 않았고 화려한 물건을 몸에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독서를 하는 절도(節度)는 지시나 감독이 심하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을 다하여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고 한결같이 과정(課程)을 준수하여(였으므로,)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되어서는 문장(文章)이 탁월하게 되었다. 집안이 대대로 본래 효성스럽고 근신(謹愼)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다운 데다 집안의 영향을 받아 지켜 따르고 경륜을 키우는 것이 일반 사람과 크게 달랐다. 본생부모(本生父母), 소후부모(所後父母), 승중(承重)의 상(喪)주 9)을 치른 것이 앞뒤로 모두 15년이었지만 상례(喪禮)를 봉행하고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의절(儀節)에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 내외의 친족 가운데 본래 곤궁한 이가 많아 끊임없이 진휼하는 것이 해마다 상례(常例)였는데 농토와 집을 마련해 주기도 하고 혼인을 도와주기도 하며 굶주리는 해에는 더욱 잘 보살펴 주었다. 같은 동네의 오랜 친구에 이르기까지 공의 덕으로 목숨을 부지한 자가 많았다. 빈객(賓客)이 이르면 매우 정성스럽게 맞이하고 매우 넉넉하게 대우하여 앉은 자리에는 술동이가 비지 않았고 문밖에는 찾아온 이의 지팡이와 신발이 늘 가득하였다. 비록 옹색하고 초라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찍이 냉대(冷待)하는 기색을 하지 않았다. 아픈 곳을 얘기하면 반드시 직접 약을 달였으며 치료가 끝난 뒤에야 보내주었다. 일찍이 어떤 이가 집안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찾아와 패악한 짓을 벌였지만, 공의 말을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사죄를 하고 돌아갔다. 하루는 머슴이 소를 때려 다치게 하여 소가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공이 그 상황을 듣고는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틀림없이 사람이라면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 소가 스스로 뿔로 들이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중년 이후에는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스스로 노사(蘆沙)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받지 못한 것을 지극히 한스럽게 여기고 마침내 선생의 손자인 송사(松沙)주 10)와 문인인 최계남(崔溪南)주 11), 정월파(鄭月波)주 12), 정애산(鄭艾山)주 13)과 편지를 주고받아 강론을 펼치면서 선생이 남긴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자 사숙(私淑)의 의리를 기탁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노사(蘆沙)와 벽계(檗溪) 두 선생이 뒤늦게 근세에 나타난 것은 하늘의 뜻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세도가 이처럼 비루하고 스승이 전수(傳授)한 학설이 이처럼 분열되었건만, 정주(程朱)의 정맥(正脈)이 동방(東方)에서 천 년이 지나도록 끊어지지 않은 것은 반드시 두 선생의 힘 덕택이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벽계(檗溪)의 문하주 14)에서는 김중암(金重庵)주 15), 최면암(崔勉庵)주 16), 홍여지(洪勵志)주 17) 등 여러 현자가 앞뒤로 사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보위하여 이 세상에 큰 공을 세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풍습을 따른 지 오래일 것이다. 우리 조정 500년의 강상(綱常)이 오늘날 전부 벽계의 문하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누가 얘기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면암(勉庵) 선생에게 편지와 폐백을 올리고 학업을 연마할 길을 열었다. 하루는 고을의 수령이 만나기를 청했으나 공이 끝내 가지 않았다. 누군가가 충고하기를, "사민(土民)이 되어 거만하기가 이와 같은가."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거만한 것이 아니라 사민(土民)으로서 분수를 지키는 것이 진실로 그러할 뿐이다." 하였다. 무릇 권세가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마을 이웃에 있더라도 아득하게 대하며 상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오직 학문과 행의(行義)가 자기보다 나은 사람만 관계가 소원할지라도 진심으로 좋아하고 서로 친숙하게 지냈다. 고을의 사우(士友)들과 남전(藍田)의 향약주 18)과 백록동(白鹿洞)의 학규(學規)주 19)를 본받아 향음(鄕飮), 향약(鄕約), 강의(講儀), 독법(讀法)에 관한 의절을 봄가을로 상례로 삼아 여러 해 동안 거행하였다. 또 모여서 강론을 펼치는 장소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여러 벗과 서로 물자를 내어 정사(亭社)를 짓기 시작하였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3년 동안 공사(工事)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전부 직접 주관하였지만, 어느 한 사람도 지출과 수입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이와 같았다. 또 영남, 호남의 여러 벗과 실내가 넓은 재숙(齋塾), 예컨대 삼가(三嘉)의 뇌룡정(雷龍亭), 단성(丹城)의 신안사(新安社), 장성(長城)의 담대헌(澹對軒), 능주(綾州)의 영귀정(詠歸亭) 등을 골라 격년으로 모여서 강론을 펼치는 규정을 만들어 한두 차례 거행했지만, 세상이 혼란해져 그만두었다. 당시에 사설(邪說)이 점차 번성하였는데, 공은 일찍이 강회(講會) 자리에서 목소리를 높이기를, "우리 중에서 사학(邪學)에 물든 자가 있다면 응당 성토(聲討)하고 내쳐야 한다." 하고 마침내 조례를 적어 재사(齋舍) 벽에 걸었다. 갑오년(1894, 고종31) 봄 사악한 무리가 고부(古阜)를 침범하고 연달아 주변 고을을 어지럽힌 뒤 진격하여 전주(全州)를 함락하였다. 공이 그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가느다란 물줄기도 막지 않으면 결국 강수(江水), 하수(河水)가 되고 실타래도 끊임없이 이어지면 그물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이들을 이르지 않겠는가. 쑥대같이 잔약한 인생이라 큰일을 할 수는 없으니 자기 한 몸을 수양하는 계책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하였다. 가을에 사악한 무리가 더욱 기승을 부려 도처를 점거하고 모여 지내어 영귀정(詠歸亭)도 도적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공이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서 나와 만나기로 약속하고는 목을 놓아 대성통곡하기를, "한 줄기 희미한 햇살이 이곳에 의지했건만 이제는 이곳마저 빼앗겼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였다. 둘이 의논하여 적을 무찌를 계책 6~7조를 진술하여 관사(官司)에 바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이 대규모로 본주(本州)에 침입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다. 마침내 자제, 친족, 동지(同志) 5~6인과 영평(永平) 지역으로 재난을 피하였다. 몇 달이 지나고 난이 평정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재산이나 기물이 약탈당한 것을 보고 나중에 그 상황을 매우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전혀 묻는 바가 없었다. 을미년(1895) 겨울 삭발령(削髮令)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이 탄식하기를, "머리를 깎고 사는 것보다는 머리카락을 지키다 죽는 것이 낫다. 지금이야말로 삶을 버리고 의(義)를 취할 때이다." 하였다. 마침내 동지 여러 사람과 산에 들어가 자신을 수양할 계책을 세웠다. 병신년(1896, 건양1) 1월 정애산(鄭艾山)이 호남의 사우(士友)들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원수에 대적하자는 뜻을 알렸다. 얼마 뒤에는 기송사(奇松沙)가 대의소(大義所)를 설치한 뒤 도내(道內)에 통지하여 알리고 2월 30일에 각 고을의 병사를 광주(光州)에 모으기로 약속하였다. 공은 이 소식을 듣더니 즉시 달려가 군무(軍務)를 의논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뒤이어 본주(本州)에서도 의병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여 나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다. 공은 광주에서 돌아와 운영과 계획에 자못 수고를 하였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고을의 논의가 합치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공이 여러 벗과 약속하기를, "송사(松沙)가 만 번 죽을 힘으로 이 일을 준비하였다. 나라를 위해 군사를 일으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우리가 비록 고을의 의병을 이끌고 달려가지는 못하더라도 오랜 벗 몇 명과 위난(危難)에 달려가 함께 죽을 계책도 세우지 못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벗들과 기일을 정하였다. 기일이 되기 2, 3일 전에 관동(關東)의 의병(義兵)이 무너지고 남쪽 지방이 동요하고 광주(光州)에서도 병사들이 흩어져 전황(戰況)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은 마침내 나와 보성(寶城)의 동복(同福) 등지로 재난을 피하였다가 한 달 남짓 지나서 돌아왔다. 앞뒤로 겪은 일이 매우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급하고 급박했지만, 뜻이 확고하고 생각이 차분하여 일찍이 압박을 받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자신을 수양하려는 일념은 단청처럼 빛나 온갖 시련을 겪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단발령(斷髮令)이 잠잠해지더라도 훗날의 화를 어찌 예측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아니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또 어찌 한스럽겠는가. 옛사람이 배 안에서 《대학》을 읽은 것주 20)이 진실로 이 때문이었다." 하였다. 마침내 서숙(書塾)을 청소하고 서적을 비치하여 날마다 강론과 연구에 힘을 쏟았다. 서숙이 매우 넓고 맡은 일이 쌓여있어 종종 감내하기 어려웠지만 일을 처리하고 난 뒤에는 편안히 서안(書案)을 마주하고 평상시처럼 책을 읽어 일찍이 터럭만큼도 마음에 구애받는 일이 없었다. 바람이 시원하고 달이 밝은 좋은 날을 만날 때마다 절친한 벗들과 한가롭게 이리저리 거닐거나 시를 읊으면서 아득히 속세를 벗어난 풍도(風度)를 보이거나 격앙되어 세상을 걱정하는 회포를 드러내었다. 무술년(1898, 광무2) 봄 나이가 비슷한 벗인 정창림(鄭昌林), 윤자선(尹滋宣), 김장석(金章錫), 이병섭(李秉燮), 김기수(金基洙), 이기백(李祺白), 이인환(李仁煥), 그리고 나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강론을 열기로 규약을 정하였다. 대체로 노쇠하고 떨어져 살다 보니 규약이 해이해지는 것이 두려워 이를 단속하려고 했던 듯하다. 10월 12일이 되어 윤자선의 집에 모여 《근사록(近思錄)》을 강한 뒤 하루를 묵고 헤어졌다. 또 하루가 지난 뒤 공이 위독하여 서둘러 갔더니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근사록》을 손에 쥐고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이 죽을 때까지 이처럼 변하지 않았다. 인리(隣里)와 향당(鄕黨)의 남녀노소로부터 어린아이, 비천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친척이 세상을 떠난 듯이 탄식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길에는 조문(弔文)을 들고 와 곡을 하는 원근에 사는 유자(儒者)들이 끊이지 않았다. 12월 3일, 살던 마을 오른쪽에 있는 방애동(方藹洞)의 을좌(乙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아, 세교가 쇠퇴한 이래로 덕을 온전히 지키기 어렵게 된 것이 오래되었다. 의지가 굳센 자는 온화하고(함과) 유순함이 부족하고 순후하고 신실한 자는 활달함과 쾌활함이 부족하고 원만하고 사리에 통달한 사람은 청렴함과 강직함이 부족하다. 조화를 이루면서도 세속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정직하면서도 세속과 절연(絶緣)하지 않으며 겸허하고 온화한 태도로 자신을 지키지만 범접할 수 없는 자가 있으며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수양하지만 가볍게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을 다잡는 것은 매우 신중하지만 남을 대하는 것은 매우 너그러우며 자신을 돌보는 것은 매우 간략하지만, 남에게 베푸는 것은 매우 두터워 《서경(書經)》에서 말한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다)[直而溫]주 21)',(는 것과) 《주역(周易)》에서 말한 '같으면서도 다르다[同而異]주 22)'는 것이 아마도 공이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이 때문에 안팎에서 원망이 없고 위아래가 서로 믿으며 말을 하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고 베풀면 화답하지 않는 자가 없으며 거만하고 사나운 자는 멈출 줄 알고 교만하고 오만한 자는 공경할 줄 알고 탐욕스럽고 인색한 자는 수치를 알게 되었다. 비록 평상시에 공의 면모를 몰랐던 자라 하더라도 흠모하고 공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다른 의견이나 헐뜯는 말도 없었다. 아, 인심(人心)을 얻고 인정(人情)을 신복(信服)하게 한 것은 고인(古人)일지라도 공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빈곤하고 지위가 미천하여 널리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뿐이다. '선행을 보면 목이 마른 듯하고 악행을 보면 뜨거운 물을 만지듯 하였다.[見善如飢渴 見惡如探湯]주 23)'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사람을 보았다. '마음에는 정한 바가 있고 행실에는 지키는 바가 있으며 부귀로도 더하지 못하고 빈천으로도 덜어내지 못한다.[心有所定 行有所守 富貴不足以益 貧賤不足以損]주 24)'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그 사람을 보았다. 만약 하늘이 몇 년의 수명을 더 내려주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주변에 영향을 끼쳤다면 어찌 정미한 이치를 깊이 연구하고 광채를 발산하여 사문(斯文)의 도맥이 오래 유지되고 세도(世道)의 희망이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애석하고 애석하다! 행실을 기록하고 덕을 형용하여 후세에 전하고 사라져버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일이야말로 평소에 서로 왕래하던 자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삼가 이처럼 대략을 기술하였다. 배(配)는 행주 기씨(幸州奇氏) 영현(泳鉉)의 딸로 고봉(高峯) 문헌공(文憲公)의 후손이다. 3남 3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창섭(昌燮), 종섭(宗燮), 홍섭(弘燮)이고 딸은 오재동(吳在東)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둘은 아직 어리다.
주석 7)문성공(文成公) 회헌 선생(晦軒先生)
안향(安珦, 1243~1306)을 가리킨다.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최초의 주자학자라 할 수 있다.
주석 8)이목은(李牧隱)
목은은 이색(李穡, 1328~1396)의 호이다. 자는 영숙(穎叔),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졌다. 저서로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주석 9)승중(承重)의 상(喪)
가통(家統)을 잇는다는 뜻이다. 맏아들이 아버지가 사망하여 가통을 계승하는 것은 물론 할아버지 생존 중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뒤에 할아버지가 사망하여 할아버지로부터 가통을 계승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 즉 아버지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할아버지로부터 가통을 계승받아 할아버지에게 승중복으로 참최 삼년복을 하였다는 뜻이다.
주석 10)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을 가리킨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의 손자이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주석 11)최계남(崔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을 가리킨다. 자는 원칙(元則), 호는 계남(溪南)ㆍ존와(存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 《계남집》이 있다.
주석 12)정월파(鄭月波)
정시림(鄭時林, 1839∼1912)을 가리킨다. 자는 백언(伯彦), 호는 월파(月波),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주석 13)정애산(鄭艾山)
정재규(鄭載圭, 1843~1911)를 가리킨다. 자는 영오(英五)ㆍ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ㆍ애산(艾山),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저서로 《노백헌집》이 있다.
주석 14)벽계(檗溪)의 문하
벽계는 경기도 양근의 개울가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가 살던 곳이다. 이항로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이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성리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주석 15)김중암(金重庵)
김평묵(金平默, 1819~1891)을 말한다.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菴),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중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주석 16)최면암(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문인이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주석 17)홍여지(洪勵志)
홍재학(洪在鶴, 1848∼1881)을 가리킨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문숙(聞叔)이다.
주석 18)남전(藍田)의 향약
남전은 남전 여씨(藍田呂氏)로, 송(宋)나라 때 남전현(藍田縣)의 여대충(呂大忠)ㆍ여대방(呂大防)ㆍ여대균(呂大鈞)ㆍ여대림(呂大臨) 등 여씨(呂氏) 4형제를 이른다. 이들이 그 고을 사람들과 자치 규범을 정하여 서로 지키기로 약속하였으니, 이것이 여씨향약(呂氏鄕約)이다.
주석 19)백록동(白鹿洞)의 학규(學規)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을 다스릴 때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를 정하고 여기에서 학문을 강론한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동규(白鹿洞規)이다.
주석 20)옛사람이 …… 읽은 것
남송(南宋) 때의 충신인 육수부(陸秀夫)는 원(元)나라 군대에 쫓겨 배를 타고 도망가면서도 《대학(大學)》을 강학(講學)하기를 권하였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강경(講經)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자, 이 도가 없어지면 나라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고 강을 끝낸 다음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宋史 卷451 陸秀夫列傳》
주석 21)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고요(皐陶)가 우(禹)에게 말한 구덕(九德)의 하나이다. 구덕은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는 것[寬而栗],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것[柔而立], 성실하면서도 공손한 것[愿而恭], 가지런하면서도 공경스러운 것[亂而敬], 온순하면서도 굳센 것[擾而毅], 곧으면서도 온화한 것[直而溫], 간략하면서도 반듯한 것[簡而廉], 억세면서도 독실한 것[剛而塞], 용맹하면서도 의를 좋아하는 것[彊而義]이다. 《書經 皐陶謨》
주석 22)같으면서도 다른
《주역》 규괘(睽卦)의 상(象)에 "위는 불이고 아래는 못인 것이 규이니, 군자는 이를 본받아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上火下澤, 睽. 君子以, 同而異.]" 하였다.
주석 23)선행을 …… 하였다
《논어》 〈계씨(季氏)〉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주석 24)마음에는 …… 못한다
《공자가어(孔子家語)》 권1 〈상로제일(相魯第一)〉에 나오는 말이다.
松下處士安公行狀
公姓安。諱國禎。字舜見。號松下。麗朝文成公晦軒先生。其顯祖也。文成公曾孫文惠公諱元衡。以功封竹城君。子孫因貫焉。竹城君生諱勉號雙淸堂。官左贊成。與李牧隱爲道義交。雙淸堂生諱挺生。入本朝官直提學。子諱乙謙。宰靈巖郡。因寓南土。子諱汝再官直長。寓居長興。子孫因居焉。直長公十世孫諱宅仁號海翁。積德行義。鄕里著稱。卽公之高祖也。曾祖諱夢元。祖諱壽策號德林。移寓綾州家業稍溫。樂善好施。考諱氵+潁號錦舫。妣海州崔氏粹玩女。生父諱浹號春灘卽錦舫公弟也兄弟俱以孝友文學著名。以哲宗甲寅九月九日。公生于州之七松里第。儀容端粹。性氣溫仁。左右趨諾。承順如流。不戲色不暴怒。坐必端直。行必安詳。蓋其天稟然也。六歲遭王考喪。朝夕饋奠。必參無闕。見同學有飢者。必邀至家。同案共食。見隣里有飢者。歸告父母。俾有所恤。每深夜讀書。必具雞酒。以饋同苦者其風儀自幼如此。公以兩家一子。生長富饒。其慈愛可謂至矣。而驕易之習。未嘗一萌於心。奢華之物。未嘗一近於身。至於讀書節度。不甚提督而自能刻意孜孜。一遵課程。至於丱弁。文詞斐然。家世素以孝謹聞公以天姿之美。加以擩染之助。持循展拓。大異衆人。居所生所後及承重喪者。前後凡十五年矣。而執喪之節。送終之儀。必誠必信。終始如一。內外族戚素多貧乏。源源周恤。歲以爲常。或爲之備給田廬。或爲之助成婚姻。遇飢歲。尤加眷戀。至於隣里知舊。賴以存活者多。凡賓客之來。接之甚款。待之甚厚。座上杯樽不空。戶外杖屨常滿。雖寒乞遇之。未嘗以冷色加之。告病則必親煮藥餌。待其治療而後遣之。嘗有人怒門內一人。來肆悖惡。聽公言。不覺愧謝而去。一日。雇奴打傷其牛。幾斃。公聞其狀。佯若不知曰。此必非人所忍爲。必其牛之自觸致然也。中年以後。遂廢擧子業。專心性理之學。自以未及受業於蘆沙先生之門爲至恨。遂從先生之孫松沙及其門人崔溪南鄭月波鄭艾山。往復講磨。得聞其餘論。以付私淑之義。嘗曰蘆沙檗溪兩先生之晩出於近世者。天意甚不偶然。世道若是汗下。師說若是分裂。而使程朱正脈。不絶於東方千載之後者。未必非其力也。又曰。檗溪之門。金重庵崔勉庵洪勵志諸賢之前後斥邪衛正。大有功於斯世。不然。吾輩之爲被髮左袵久矣。孰謂我朝五百年綱常。在今日而不盡出於檗溪之門耶。遂上書贄於勉庵先生。以開講業之路。一日邑宰請見。公終不往。或規之曰。爲土民而倨傲如是耶。公曰。我非倨傲也。守土民之分。是所固然耳。凡聲勢之右於己者。雖在鄕隣。邈然若相忘。惟學問行義之勝於我者。則雖在疎遠。誠心愛好。綢繆相熟。與鄕裏士友。擬藍田及鹿洞規例。行鄕飮鄕約講儀讀法之節。春秋爲常。行之有年。又患講聚之無所。與諸友互相出力。經始亭社。首尾三年。凡百功費。皆自尸之。而無一人問其出入者。其見信於人如此。又與嶺湖諸友。擇齋塾寬闊如三嘉之雷龍亭。丹城之新安社。長城之澹對軒。綾州之詠歸亭。爲間年會講之規。一再行而以世亂止。時邪說漸熾。公嘗於講會席上。颺言曰。在吾儕而如有浸染邪學者。當鳴鼓而攻黜之。遂書條約。揭于齋壁。甲午春。邪類犯古阜。連撓旁邑。進陷全州。公聞之歎曰。涓涓不壅。終爲江河。綿綿不絶。或成網羅者。非是之謂耶。蓬蓽殘生。旣不能有爲。則只爲一身自靖之計可也。秋邪類益熾。在在盤聚。詠歸亭又爲賊所據。公不勝忿憤。要余相見於中路。放聲大哭曰。一縷微陽。所寄在此。而今乃見奪。吾輩其將安往乎。議陳勦除之策六七條。獻于官司。未幾。賊大入本州。禍不可測。遂與子弟族戚及同志五六人。逃難于永平地。數月亂平歸家。見生産什物。沒被侵掠。追知其狀甚悉。而一無所問。乙未冬。削令甚急。公歎曰。與其薙髮而生。何如存髮而死。舍魚取熊。此其時也。遂與同志諸人。爲入山自靖計。丙申正月。鄭艾山寄書湖南士友。示以同仇之意。旣而奇松沙設大義所。通喩道內。期以二月三十日。聚各邑兵於光州。公聞卽馳往。贊議戎務。繼而本州又謀擧義。余亦參其謀。公自光州還頗費經畫。未幾日。以鄕議不合而罷。公與諸友若曰。松沙出萬死之力。已設此擧。而勤王有日。則吾輩雖不能以鄕兵赴之。獨不可與知舊多少人爲赴難同死之計耶。遂與定期。前期數三日。關東義兵潰。南方繹騷。光州又罷兵。火色甚急。公遂與余逃難於寶城同福等地。月餘而還。前後所遭蒼黃震越。極其區測。而志定慮靜。未嘗有怵迫萎索之氣。至於自靖一念。炳然如丹。雖千生萬受。而有所不渝也。公曰。薙令雖浸。而後日之禍。寧可測耶。固知吾輩死亡無日。而朝聞夕死。又何恨焉。古人之舟中大學。良以是也。遂掃塾儲書。日以講討爲務。家戶深闊。事務叢委。往往有難堪耐處。而處置了後。晏然對案。讀書如常。未常有一毫介滯於中者。每當風月良辰。輒與朋知逍遙吟哦。悠然有出塵之標。慨然有傷世之懷。戊戌春。與年輩友鄭昌林尹滋宣金章錫李秉燮金基洙李祺白李仁煥及余爲一朔一講之規。蓋恐衰老離索。繩約廢弛。而爲此團束之也。至十月十二日。會于尹滋宣家。講近思錄一宿而別又一宿而公病馳往見之則氣息已絶。而近思錄猶在其手矣。好學之誠。至死不渝者如是。隣里鄕黨老少男女。至於童幼卑賤。無不咨咨涕洟。如喪親戚。遠近章甫操文來哭者。屬屬於道。十二月初三日。葬于所居村右方藹洞乙坐之原。嗚乎。自世敎衰。而德之難全久矣。剛毅者欠和裕。醇實者欠開爽。圓通者欠廉介。若夫和而不同於流。貞而不絶於俗。溫溫自持而有不可犯者在焉。謙謙自牧而有不可輕者存焉。檢身甚詳而待人甚恕。奉已甚約而施人甚厚。書所謂直而溫。易所謂同而異者。公其庶幾焉。是以內外無怨。上下相信。言之而人無不服。施之而人無不和。强梗者知戢。驕敖者知敬。貪吝者知恥。雖平日之不知面貌者。無不愛慕欽欽。無異言間辭。嗚乎。得人之心。服人之情。雖古之人。恐無以過之。但其窮約布素。而所及者不廣耳。見善如飢渴。見惡如探湯。吾聞其語而吾見其人矣。心有所定。行有所守。富貴不足以益。貧賤不足以損。吾聞其語而吾見其人矣。若使天假之年。從容優游。磨礱浸灌。豈不能究極精微。出治光彩。以壽斯文之脈。以係世道之望哉。痛惜痛惜。至於記其實狀其德。以傳諸後。不使任其泯沒。則此非平日遊從者之責也耶。玆不敢付諸別人。而謹述梗槪如是云耳。齊幸州奇氏泳鉉女。高峯文憲公之後。擧三男三女。男昌燮宗燮弘燮。女適吳在東。餘二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