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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우인당 박공 행장(愚忍堂朴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03
우인당 박공 행장
공의 휘는 인진(麟鎭), 자는 학중(學仲), 호는 우인당(愚忍堂)이다. 박씨(朴氏)는 세계(世系)가 밀양(密陽)에서 나왔으며 찰방(察訪)을 지낸 휘 위(蔚)가 그의 중조(中祖)이다. 찰방은 첨정(僉正)을 지낸 휘 맹성(孟誠)을 낳고, 첨정은 참의를 지낸 휘 영걸(永傑)을 낳고, 참의는 사맹(司猛)을 지낸 휘 억서(億瑞)를 낳고, 사맹은 감찰을 지낸 휘 지수(枝樹)를 낳았다. 지수는 임진년(1592, 선조25)의 충신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받았다. 승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휘 천주(天柱)를 낳고, 주부는 휘 성소(成素)를 낳고, 성소는 휘 태흥(泰興)을 낳고, 태흥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휘 상언(尙彦)을 낳고, 첨지중추부사는 휘 필익(必益)을 낳았다. 필익은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휘 경귀(慶龜)이고 조부는 휘 만환(萬煥)이다. 고(考)는 휘 재덕(在德)이고 비(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이다. 생고(生考)는 휘가 재응(在應)이며 백부(伯父)의 후사로 나갔다. 헌종 병오년(1846, 헌종12) 12월 30일에 벽지리(碧池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순박하고 성실하며 성품과 기질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한결같이 양친을 섬겨 집안에서 비난하는 말이 없었다. 부친주 1)이 일찍 세상을 떠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기고 부친을 추모하고 받드는 제사에 슬픔과 정성을 다하였다. 온화한 낯빛으로 어머니를 모시어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받들었으며 집안일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반드시 어머니에게 여쭙고 난 뒤 행하였다. 기미년(1859, 철종10)에 여산 송씨(礪山宋氏) 가문에 장가를 들었는데, 조행(操行)을 갖춘 뛰어난 배우자로 내조를 잘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에 생고(生考 생부)가 세상을 떠나자 계부(季父)인 휘 재표(在杓)가 집안일이 학업에 장애가 될까 염려하여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고 공에게는 유학(遊學)하여 학업을 성취하게 하였다. 공은 계부를 매우 근실하게 섬겨 출입과 진퇴를 오직 계부의 명에 따랐다. 생고(生考)가 세상을 떠난 뒤 오래된 상자 안에서 우연히 돈을 빌려준 것과 관련된 문서를 발견하자 즉시 먹칠을 해버리고 말하기를, "저쪽에서 말을 하지 않는데 내가 말을 하면 기망(欺罔)의 논란을 일으킬 것이다. 인정에 편하겠는가." 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도록 경계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는 약관(弱冠) 언저리였지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처럼 남다른 면이 있었다. 종족(宗族)이 매우 번창하였으며 같은 마을에 함께 살면서 장유(長幼)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은의(恩義)가 두루 미쳐 모두가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인척(姻戚)과 옛 친구들에 대해서도 왕래하며 안부를 살피는 일을 언제나 그만두지 않았다. 외왕부(外王父 외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몇 묘(畝)의 땅을 사서 제사에 올릴 물품을 마련하는 데 이용하도록 하였다. 본생(本生)의 외왕부를 위해서도 이처럼 하고 외구(外舅 장인)와 외고(外姑 장모)를 위해서도 이처럼 하였다. 집안의 규약을 만들고 물력(物力)을 비축하여 가난하고 살기 어려운 이들을 돕고 길사와 흉사에 힘을 보태며 묘제(墓祭)와 봄가을의 시제(時祭)에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 그 힘을 미루어 방계 친족의 묘제에도 보탬이 되게 하였다. 육촌 여동생이 시집을 가서 살림이 어렵고 병도 나자 공이 데려다 부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뒤 가마에 실려 집으로 돌아갈 때는 관과 삽(翣)주 2)을 마련하여 도와주었다. 같은 마을에 아이를 낳게 된 부인이 굶주리다 이로 인하여 목숨이 끊길 지경이었다. 공이 그 말을 듣고 양식과 음식을 장만하여 돕도록 하여 어머니와 아이가 그 덕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걸객(乞客)이 왔다가 병이 들자 몇 달에 걸쳐 구호하고 치료해주는 것이 집안 식구가 병이 들었을 때와 차별이 없었고, 죽었을 때도 의복과 물건을 마련하여 장례를 치러주었다. 떠돌며 빌어먹던 부자(父子)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죽어서 길가에 빈(殯)주 3)을 하였지만 오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길에서 슬프게 곡을 하고 있었다. 공이 불쌍하게 여겨 물자를 내어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가난한 일가 한 사람이 수십 민(緡)의 돈을 빌려 가 여러 해가 되도록 돌려주지 않았건만 또한 한마디도 언급한 일이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빌린 돈을 돌려주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 마음에서 이 돈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잊어버렸는데 받는다면 어찌 쓸데없는 물건이 아니겠는가." 하고, 결국 받지 않았다. 흉년을 만나면 반드시 몸소 검약을 실천하고 남는 재물을 보존했다가 곤궁한 자들을 진휼하여 그동안 공에게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한 자가 적지 않았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노비가 오래도록 역을 치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풀어주었다. 일찍이 여자 노비 1명을 샀다가 양가(良家)의 딸이라는 말을 듣고는 또한 풀어주어 돌려보냈다. 한번은 날아가던 꿩이 산짐승에게 쫓기다 처마 밑에 숨어 엎드려 있었다. 자식들이 잡아 바치자 공이 말하기를, "짐승이 의지할 데가 없어 사람에게 의지했건만 어찌 차마 죽이겠는가." 하고 풀어주도록 하였다. 근세(近歲) 이래로 먼 지역에서 온 매우 공교한 물건들이 시장에 현란하게 넘쳐나 서로 앞다투어 빠져들고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건만 공은 여태껏 눈길조차 준 적이 없었다. 공은 선대의 계보(系譜)가 중조(中祖)부터 그 위로는 잃어버려 전하지 않았다. 중간에 선조 한 사람이 다른 집안의 계보를 끌어다 그 위에 붙였는데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공은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 몹시 두려워 최면암(崔勉庵)주 4), 기송사(奇松沙)주 5)(성과 호는 붙여 씁니다. 예) 이율곡 「지침」 이하 표시만 해두겠습니다.) 등 예를 아는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뒤 종족(宗族)에게 알리고 바로잡았다. 마을에 재력과 권세를 지닌 사람이 위세가 꽤 당당하였다. 그가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만나기를 청했으나 공은 끝내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아들 준기(準基)에게 허리에 차고 다니는 보도(寶刀)가 있었다. 하루는 그것을 잃어버렸는데 공이 말하기를, "가난한 유자(儒者)에게 보검(寶劒)은 본래 지나친 물건이니 잃어버리는 게 진실로 당연한 일이다." 하고 돌이켜 생각하며 아쉬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하루는 내가 두세 명의 벗과 공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며 앉아 있었다. 집안에 불이 나 실성(失聲)한 채로 다급한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공은 사내아이 종을 불러 불을 끄러 가도록 하더니 돌아와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었다. 공의 아우가 밖에 나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였다. 돌아와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잘못이 너에게 있으면 모욕을 당하는 것이 진실로 당연하고 잘못이 저쪽에 있으면 저쪽이 망녕된 사람이다. 망녕된 사람과 무엇을 따지겠느냐." 하였다. 아우가 말하기를, "잘못이 없는데도 모욕을 당했으니 역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공은 "모욕은 잘못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곧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동도(東徒 동학교도)의 난 때 그들의 위세가 매우 강하여 마을 사람들이 여기에 휩쓸렸다. 공이 친척과 오랜 벗들을 모아놓고 사정(邪正)과 순역(順逆),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의 분별을 설명하여 물드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른 일찍 과거를 준비하여 시문(詩文)을 드날렸으며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유람을 하면서 종종 호탕한 풍운(風韻)을 보여주기까지 했지만, 세상일을 점점 많이 겪게 되면서 덧없는 생각이 사라졌다. 그래서 문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세상과 교유를 끊었다. 병을 치료하는 여가에 《가례(家禮)》, 《심경(心經)》, 성리서(性理書) 등을 취하여 조용히 깊이 연구하고 차례대로 연역하면서 따뜻한 봄날에 얼음이 녹는 듯 유연히 스스로 즐거워하여 몸에 병이 깊고 적막하고 외로운 삶이 고생스럽다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선영(先塋) 아래의 옛집을 고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마련해 놓고 일문(一門)의 자제들이 학업에 전념하는 장소로 삼았다. 만년에는 본채의 서쪽에 몇 칸짜리 집을 지어 즉이재(則以齋)라 이름 붙이고 자식들이 여력이 있을 때 글을 익히는 장소로 삼았다.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시문(時文)을 짓거나 과장(科場)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잘못은 나로 충분하다. 어찌 너희들까지 거듭 잘못되게 하겠느냐." 하였다. 날마다 독서와 궁리(窮理)로 자신을 다잡고 예법에 맞는 행실을 하고, 과정(課程)을 지도하여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현명한 사우(士友)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거리가 멀더라도 반드시 가서 종유하게 하였고 좋은 책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형편이 어렵더라도 반드시 사서 집에 두도록 하였다. 선행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와 인간 세상에 명예와 영화, 영달(榮達)과 같이 좋은 것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남을 시기하거나 이기려는 생각이 마음에서 싹트지 않고 화를 내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고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난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온화하고 어질며 자애롭고 선량함이 온 식구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한적하고 여유로운 날을 맞을 때마다 아우들, 종형제들, 자식들, 조카들이 모시는 자리에서 모여서 마주하며 얼굴마다 표정이 화기애애한 것을 보면 마치 봄날에 온갖 꽃들이 활짝 핀 사이에 있는 것 같이 여겼다. 일찍이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사람에게 만금의 재산이 있는 것은 선행 하나를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 소나 말에게 옷을 입혀 놓은 듯한 저들이 과연 인간 세상에서 무엇을 하겠느냐."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홍범(洪範)〉의 오복(五福)에는 덕이 네 번째 순서에 있지만 실제로는 덕이 오복의 근본이다. 내가 생각건대 천하의 복 가운데 덕을 능가하는 것이 없다." 하였다. 매번 선(善)을 행하도록 정성껏 인도하고 일깨우는 데 공력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방 안은 네 벽이 텅 비고 소박하여 편지나 서첩(書帖) 외에는 다른 여분의 물건이 없었다. 집에 바둑판 하나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물이라 일컬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몰래 틈틈이 바둑을 두며 노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바둑판을 가져다 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성품이 예(禮)를 좋아하여 손수 제의(祭儀)를 베껴 일문(一門)의 자제들에게 주고 익히게 하였다. 속절(俗節), 삭망(朔望), 사시제(四時祭)에 대해서는 사라지고 거행되지 않던 것들을 정리하여 찬연함이 볼 만하였다. 또 언서(諺書)로도 1본(本)을 베껴 며느리와 딸들에게 주어 익히도록 하였다. 일문(一門)에서 관례(冠禮)를 치르는 자가 있으면 삼가(三加)의 예주 6)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매번 일문의 자제들에게 서사(書社)에 모여 향음(鄕飮), 강규(講規) 등의 의절(儀節)을 익히게 하였다. 평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경륜(經綸)은 대충대충 처리하지 않아 조리와 두서가 확실하였고 세속의 풍습에 얽매이지 않아 의리가 곡진하였다.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드러나고 감춰진 것이 다를지라도 요컨대 측은하게 여기고 자애롭게 대하고 남을 이롭게 하고 은혜를 베풀려는 마음을 벗어나지 않았다. 산림에 감추어진 면모가 세상에 조금이나마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애석하다. 을미년(1895, 고종32) 6월 25일, 우인당(愚忍堂)에서 편안히 생을 마쳤다. 원근의 인사(人士)들이 공을 알든 모르든 몹시 애석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조문(弔文)을 들고 와 곡을 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여항(閭巷)의 부녀자나 아이들, 시정(市井)의 장사꾼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탄식하면서 선인(善人)이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8월 17일 정천(淨川) 뒤에 있는 가옥치(佳玉峙)의 술좌(戌坐)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4남을 두었는데 준기(準基), 준회(準會), 준규(準奎), 준우(準遇)이다. 무릇 인(仁)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린 존귀한 작위(爵位)이고 사람이 사는 편안한 집이다. 사람이 처음 태어났을 때 누군들 이 도리를 지니고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하늘로부터 뛰어난 자질을 받고 학문의 공을 성취하여 가정에서는 효성스럽고 유순한 아들이고 향려(鄕閭)에서는 정직하고 신뢰받는 선비이며 남을 사랑하여 남에게 사랑받고 남을 공경하여 남에게 공경받으며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으며 지극히 너그러운 자리에 머물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지에 노닐어 이르는 곳마다 자득(自得)하지 않음이 없고 삶과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을 나는 공에게서 보았다. 공은 예설(禮說)에 정통하고 경전(經典)의 본뜻을 부지런히 연구하였으며 역사에 박학하고 사물의 이치에 정통하며 세사(世事)에 밝아서 함께 얘기하면 마치 샘물이 마르지 않고 세차게 흐르는 듯하였다. 공의 행의(行義)와 풍채는 진실로 사람들마다 모두 함께 보았고 함께 들었지만, 학문의 성취에 대해서 말하자면 두문불출하며 요양(療養)하는 10년 동안 이루어졌기에 부지런히 뒤따르던 자가 아니라면 그 깊이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아, 우리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비록 매우 쓸쓸하고 적막하지만, 무너진 세상, 쇠락한 풍조 속에서 함께 어울리면서 한 가닥 실 같이 거의 끊어진 도맥을 지키고 조만간 젊은 후생(後生)들의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건만, 공이 조금도 머물지 않고 서둘러 우리를 버릴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남은 생이 쓸쓸하여 그저 눈물이 옷깃을 적실뿐이다. 아, 나를 아는 것이 공과 같은 사람이 없고 공을 아는 것이 나와 같은 자도 없다. 따라서 평소의 행적과 평소의 덕을 찬술하는 일에 대해서 사양을 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길 수가 없다. 이에 감히 차례대로 서술하여 공의 집으로 돌려보낸다. 드러내지 못한 덕이나 갖추지 못한 행적은 준기(準基)가 응당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훗날 입언(立言)하는 자의 붓을 기다릴 것이다.
주석 1)부친
소후부(所後父)인 백부(伯父)를 가리킨다.
주석 2)삽(翣)
상여에 실린 관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부채 모양의 장식이다. 불삽(黻翣, '기(己)' 자가 등지고 있는 문양을 그려 넣은 것), 운삽(雲翣, 구름의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보삽(黼翣, 도끼 문양을 그려 넣은 것) 등이 있다. 운삽은 화삽(畵翣)이라고도 한다.
주석 3)빈(殯)
본래 대렴(大斂)을 마친 시신을 매장하기 전까지 서쪽 계단 위쪽에 묻어둔 관에 임시로 안치하는 상례의 절차이다. 여기서는 정식으로 빈을 한 것이 아닌 상황이므로 길가의 구덩이에 임시로 안치한 상태라는 뜻이다.
주석 4)최면암(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말한다.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 문하에서 배웠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있다.
주석 5)기송사(奇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다.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송사집》이 있다.
주석 6)삼가(三加)의 예
관례를 할 때 관을 세 차례 씌우는 예를 말한다. 《가례(家禮)》에 따르면,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 재가(再加)에는 사모(紗帽), 삼가(三加)에는 복두(幞頭)를 씌었다.
愚忍堂朴公行狀
公諱麟鎭。字學仲。號愚忍堂。朴氏系出密城。察訪諱蔚其中祖。察訪生僉正諱孟誠。僉正生參議諱永傑。參議生司猛諱億瑞。司猛生監察諱枝樹。壬辰忠臣贈左承旨。旌閭。承旨生主簿諱天柱。主簿生諱成素。成素生諱泰興。泰興生僉樞諱尙彦。僉樞生諱必益。於公高祖也。曾祖諱慶龜。祖諱萬煥。考諱在德。妣水原白氏。生考諱在應。蓋出爲伯父後也。憲宗丙午十二月三十日。生于碧池里第。天姿朴實。性氣溫良。一事兩庭。庭無間言。嘗恨嚴庭早世。未及承顔。追遠事亡。極其哀誠。侍慈幃。色溫氣和。承順無違。家事巨細。必稟而行。己未委禽于礪山宋氏之門。女士好逑。極有內助。乙丑生考違世。季父諱在杓。慮其以家務妨學。凡百躬自幹理。而使公遊學以就其業。公事季父甚謹。出入進退。惟命是從。生考歿後。偶得出錢券文於故篋中。卽加墨抹曰。彼旣不言。自我言之。則是發其欺誣也。於人情安乎。戒家人勿言。是時公年爲弱冠左右。而其處事偉然已如此。宗族甚繁。同住一巷。長少內外。恩義周遍。各得歡心。至於姻戚故舊。往來存訊。隨時不廢。外王父沒。買爲數畝地。俾資奠獻之具。爲本生外王父亦如之。爲外舅姑亦如之。立門規蓄物力。使貧窮有助。吉凶有須。墳塋香火。春秋有賴。又推其力以及於傍親之墓。再從女弟。嫁而貧且病。公邀而養之。及沒。舁還其家。具棺翣而助之。隣里有婦人解娩。飢因垂絶。公聞之。具糧饌使救之。其母孩得以蘇活。有乞客來而病。數月救治。無間家衆。其死也具衣物而葬之。有人父子行乞。父死殯於道側。久而未葬。哀哭於道。公矜之。出力而營之。貧族一人貸去數十緡錢。積年不還。亦無一言及之。久後還之。公笑曰。吾心中忘此錢久矣。忘而受之。豈非剩物乎。遂不受。遇飢歲。必躬加儉約。而存其羸餘。以賙貧乏。前後賴活不少。家有世來奴婢。悶其久役而放之。嘗買一婢。聞其爲良家女。亦放還之嘗有飛雉爲山獸所逐。竄伏簷下。諸子拱之。公曰。物窮依人。豈忍殺之。令放之。近歲以來。遠方淫巧之物。眩溢市肆。競相耽服。公未嘗接目焉。公先系。自中祖以上。逸而無傳。中間族先一人。引他系而冒於其上。因仍未改者久矣。公大懼倫理之乖悖。往復於崔勉庵奇松沙諸識禮處。告于宗族而反正之鄕裏有豪富人。風勢頗張。累書請見。終不一往。子準基有所佩寶刀。一日見失。公曰。窮儒寶劒。本是過物。失之固當。了無追惜之意。一日余與數三朋友訪公。坐語良久。家內失火。失聲告急。公呼僮僕。使之往救。坐語如常。公弟出外。見辱於人。歸告之。公曰。曲在於汝。則見辱固當。曲在於彼。則彼是妄人。與妄人何計較之有。弟曰。直而見辱。不亦寃乎。曰辱在於曲。不在於直。東徒之亂。威虐甚熾。閭里靡然。公會親戚知舊。喩以邪正順逆利害禍福之分。使無所犯。早治功令。馳騁翰墨。以至文酒遊衍之際。往往有豪宕風韻。閱世漸久。浮想消歇。於是杜門閉帷。絶遊息交。養病之餘。取家禮心經性理等書。從容沈潛。次第紬繹。春融氷釋。逌然自樂。不知沈痾之在身。幽獨之爲苦也。修墓下舊構。儲四子五經。爲門子弟修息之所。晩築數椽於寢之西。命曰則以齋。以爲諸子餘力學文之地。敎諸子。不許作時文赴科場曰。誤我足矣。豈令再誤汝輩耶。日以讀書窮理。檢身飭行。指授課程。俾無放過。聞有賢士友。則程途雖遠。而必使往從之。聞有好文字。則事力雖艱。而必令買置之。其樂善好學。出於至誠。而不知人間世復有名華利達之爲好也。忌克之意。不萌於心。忿戾之氣。不形於色。鄙悖之聲。不出於口。溫仁子諒。闔室薰染。每閒居暇日。見其羣弟羣從諸子諸姪。聚對侍列。面面和氣。怡怡融融。如在春城萬花之中。嘗戒諸子曰。人有萬金之産。不如作一介善士。彼牛襟馬裾者。於人世果何爲也。又曰。洪範五福。德居其四。而其實德爲五福之本。吾以爲天下之福。莫過於德。每惓惓引喩所欲式穀者。無所不用其至。一室四壁。蕭散澹泊。簡墨書帖之外。無他長物。家藏一奕枰。人號寶物。一日見諸兒竊間圍戲。遂取其枰。碎而焚之。性好禮。手抄祭儀。賜門子弟習之。至於俗節朔望及四時之祭。修其廢墜。燦然可觀。又以諺書抄一本。賜婦女習之。門內有將冠者。令依三加而行之。每令門子弟。聚於書社。習鄕飮講規等儀節。平日經綸。著於施爲之間者。不涉苟簡而的有條緖。不囿俗習而曲有義理。雖大小有殊。顯晦不同。而要不出於惻怛慈愛利人澤物之心也。惜其沈晦林樊。不少槪見於世也。乙未六月二十五日考終于愚忍堂。遠近人士知不知。莫不痛惜。操文來哭者相續。至於閭巷婦孺。市井販傭。亦皆一辭嘖嘖。以爲善人逝矣。八月十七日。葬于淨川後佳玉峙戌坐原。有四男。準基準會準奎準遇也。夫仁者天之尊爵也。人之安宅。人生之初。孰不有此箇道理。而受之以姿質之美。濟之以學問之功。在家庭爲孝順之子。在鄕閭爲忠信之士。愛人而人恒愛之。敬人而人恒敬之。與世無怨。與物無競。處於至寬之地。遊於至順之境。無人不得生死活潑者。吾於公見之矣。公邃於禮說。謹於經旨。博於史學。精於物理。明於世故。與之言。滾滾若源泉之不渴也。行義風裁。固人人所共見所共聞。而若學問所就。則此是杜門養病十年間所得。非勤於從逐者。不能悉其裏許也。嗚乎。吾輩殘生。雖甚落莫。而相從於缺界頹波之中。以守一縷幾絶之脈。以待後生少年早晩消息。豈知公不少留。而遽爾相棄耶。餘生踽踽。只有淸血霑襟。嗚乎。知我者。莫如公。知公者。亦莫如我。其於述平生之行。撰平生之德。有不可辭而委諸他手也。玆敢序次以還其家。若其德之有未形。行之有未備。則準基當有以補足之。以俟他日立言之筆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