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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오계 문공 행장(梧溪文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02
오계 문공 행장
행실이 돈독하면서도 문장이 화려하며 명리(名利)에 담담하면서도 바쁘게 경쟁하여 우뚝하게 일가(一家)의 법도를 이루어 대대로 이를 잃지 않고 지켜온 자를 근세에서 찾자면 오직 우리 고을의 오계(梧溪) 문공(文公)이 그런 인물이다. 문공의 휘는 봉환(鳳煥), 자는 익중(翊中)이고 오계(梧溪)는 공의 호이다. 고려조의 강성군(江城君) 휘 익점(益漸)이 이름난 조상이고 중엽에 이르러 휘 자수(自修)는 곡성 현감(谷城縣監)을 지내고 향사(鄕祠)에 배향되었다. 증조는 휘가 혁진(爀鎭), 호가 오재(鰲齋)이고 조부는 휘가 영덕(永德)이고 본생조(本生祖)는 휘가 영수(永壽), 호가 죽와(竹窩)이다. 고(考)는 휘가 정휴(定休), 호가 긍재(兢齋)이다. 처음에 파평 윤씨(坡平尹氏) 휘 종진(宗鎭)을 딸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재취(再娶)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식(栻)의 딸로 철종 기유년(1849, 즉위년) 10월 3일에 부춘(富春)의 우봉(牛峯)에서 공을 낳았다. 이보다 앞서 양씨가 꿈에서 신인(神人)이 비단 주머니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너희 집안의 보물이니 조심해서 간직하거라." 하였는데, 이윽고 해산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자애롭고 온화하여 부모의 뜻을 공손히 받들었으며 스승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히게 되자 매우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8세에 들에 나아가 새를 쫓다가 새 그물을 세워놓은 기둥에 "소호(少昊) 시대에는 새의 이름으로 관직을 삼았는데 네가 관명(官名)을 지니고서 어찌하여 나라의 싹을 해치는가."라고 적어놓아 보는 이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죽와공(竹窩公)이 만년에 늘 병석에 누워 있었다. 공은 대인(大人)이 곁에서 모시면서 밤낮으로 힘을 다해 섬기는 것을 보고 매번 서당에서 돌아오면 그 수고를 대신하고 간혹 아우에게 하루씩 교대로 대신하게 하였다. 을축년(1865, 고종2) 가을에 벽산재(碧山齋)에서 책을 읽었다. 하루는 마음이 갑자기 놀라고 뛰어 마침내 급히 집으로 돌아와 죽와공을 뵈었더니 병이 이미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다음날 새벽 죽와공이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 가운데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경오년(1870, 고종7) 가을 대인(大人)이 아주 심한 이질(痢疾)에 걸리자 대인이 한 숟갈을 들어야 공도 한 숟갈을 먹고 대인이 두 숟갈을 들어야 공도 두 숟갈을 먹으면서 지극히 근심하였고 변이 단지 쓴지를 맛보기도 하였다. 의원이 자라 탕이 가장 좋은 약이라고 하자, 당시에 강물도 줄고 날씨도 추웠건만 공은 그물을 마련하여 자라를 구하려고 하였다. 마침 커다란 자라 한 마리가 낮은 모래밭에 나와 있어 마침내 갖다 바치자 병이 과연 차도가 있었다. 임신년(1872, 고종9) 봄 대인이 또 병에 걸리자, 일어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 공에게 이르기를, "네가 약질(弱質)의 몸으로 상례를 치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몸이 상하게 될 것이다. 거처나 음식 등, 몸을 보양하는 데 관계된 모든 일을 하나하나 헤아려 네 아버지가 죽어서도 걱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말라." 하자, 공은 울음을 삼키면서 승낙하였다. 대인이 운명하자 스스로 남긴 당부를 생각하여 감히 마음껏 슬픔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인정과 예를 다 갖추었다. 홀어머니를 섬길 때는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반드시 여쭙고 유순하고 곡진하게 어머니의 뜻대로 모셔 어머니를 대하는 도리를 잘 갖추었다. 제사에는 반드시 기일보다 며칠 전에 집 안팎에 훈계하고 술과 고기를 금하고 쓸고 닦아 정갈하게 하도록 힘을 쏟았으며 방에 들어가거나 문을 나서면서 감개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제사를 올리는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 셋과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선행으로 인도하고 학문을 면려하는 것이 너그러우면서도 정성이 가득하여 한 번도 화락함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경계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은 그 단서가 규문(閨門)을 먼저 바로잡는 데 달려있다. 규문이 올바르지 않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부부 사이에 절대로 허물없이 가까이하지 말고 반드시 엄숙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임한다면 그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화곡(花谷)과 임동(林洞)의 일족과 화수회(花樹會)를 만들어 수시로 친선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았다. 봉남(鳳南) 홍공(洪公)과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처음 학문에 나아갈 때부터 늙어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의심스러운 사항을 묻고 가르침을 청하며 병이 들거나 무슨 일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일찍이 서로 떨어져 지낸 적이 없었다. 봉남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스승이 돌아가셨을 때의 복제(服制)인 심상(心喪)을 하였다. 구암(龜巖) 문송규(文頌奎)와는 도의(道義)로 교제를 맺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강론을 벌이고 학문을 익혔으며 서로 의기가 매우 잘 투합하였다. 고향 마을의 사우(士友)들과 모여 향음(鄕飮), 향사(鄕射), 강규(講規), 독법(讀法) 등의 예를 행하는 것을 봄가을의 상례(常例)로 삼았다. 병자년(1876, 고종13)의 흉년에는 공이 약간의 물자를 내어 굶어 죽을 지경에 놓인 향리(鄕里) 사람들을 진휼하였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그대는 자신을 구원하기에도 넉넉하지 못하건만 도리어 남을 우선으로 삼으니 어찌 상정(常情)을 거슬러 명예를 구한다는 비난이 없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죽을 지경에 놓이지는 않았다. 넉넉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다른 사람을 진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재물을 중시하고 의리를 가볍게 여기는 장사치들의 상담(常談)과 같을 것이다." 하였다. 계미년(1883, 고종20)부터 그 이후로 공이 우연히 병에 걸리더니 앞뒤로 8~9년에 걸쳐 차도가 있기도 하고 발병하기도 하고 심해지기도 하고 좀 덜하기도 하면서 이런저런 고초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어버이를 섬기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 붕우에게 나아가 강론하고 익히는 방도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자신의 힘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어 자기 몸에 병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거처하는 방의 좌우 벽에 태극도(太極圖), 서명도(西銘圖), 인설도(仁說圖), 경재잠도(敬齋箴圖)와 기타 요언(要言)과 격회(格誨)를 걸어놓고 몸소 상관(常冠)과 일상복 차림으로 중앙에 단정히 앉아 항상 눈으로 접하며 경계하고 성찰하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경인년(1890, 고종27) 8월 29일 숙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나 송석면(松石面) 성곡촌(聲谷村) 뒤에 있는 도지연(倒池蓮) 비탈 아래 손좌(巽坐)의 언덕에 장례를 치렀다. 배(配)는 능성 구씨(綾城具氏) 본수(本修)의 딸이고 계배(繼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 규환(奎煥)의 딸이다. 서씨는 2남 1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재연(載淵), 재인(載寅)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아, 문씨(文氏)는 예전부터 지금껏 대대로 유학(儒學)을 계승한 유서 깊은 집안으로 죽와공(竹窩公)과 그의 아들 긍재공(兢齋公)은 모두 효우(孝友)와 행의(行誼)로 향리(鄕里)에서 이름이 높았다. 공은 선대인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행실을 삼가고 학문을 쌓아 가정에서 효제(孝悌)를 행하고 향리(鄕里)에서 충신(忠信)으로 이름이 나 문채가 화려한 한 고장의 선사(善士)였다. 지초(芝草)에 뿌리가 있고 예천(醴泉)에 근원이 있음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내가 보잘것없는 처지로 욕되게도 공의 지우(知遇)를 입어 타계하실 때 손수 편지를 보내 남아 있는 아들의 학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진실로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슬프고 마음이 아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재연(載淵)이 학문에 뜻을 두고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으니 대대로 계승한 학문은 또한 장차 실추되지 않을 것이다. 공이 타계하고 3년이 지난 여름 재연이 중부(仲父)가 지은 가장(家狀)을 받들고 와서 내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선친(先親)을 가장 잘 아시기로는 장인(丈人)만 한 분이 없습니다. 원하건대 행장(行狀)을 지어서 사가(私家)에서 대대로 전하는 실제 자취로 삼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 마음이 애처롭고 뜻이 가상하여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梧溪文公行狀
軒質行而輊文華。右恬退而左奔競。偉然爲一家之成法。世守而不失者。在近世惟吾鄕梧溪文公是耳。諱鳳煥。字翊中。梧溪其號也。麗朝江城君諱益漸爲名祖。至中葉有諱自修。官谷城縣監。腏享于鄕祠。曾祖諱爀鎭號鰲齋。祖諱永德。本生祖諱永壽號竹窩。考諱定休號兢齋。初娶坡平尹氏諱宗鎭女。無育再娶濟州梁氏諱栻女。以哲宗己酉十月三日。生公于富春之牛峯。先是梁氏夢神人遺以錦囊曰。此是汝家寶物。謹受而藏之也。已而解娩。天性慈詳溫雅。承順親意就傅上學。執業甚勤。八歲出野打鳥。書于鳥幕柱上曰。少昊之世。以鳥記官。爾帶官名。而何以害邦國之苗乎。見者奇之。竹窩公晩年常病在床。公見其大人侍側。晝夜服勞。每自書塾歸。輒代執其苦。或令其弟更日代之乙丑秋。讀書碧山齋。一日心忽驚動。遂急還家。見竹窩公病已危劇矣。翌日平明棄世。隣里莫不驚異之。庚午秋。大人患痢甚劇。一飯再飯。極其致憂。嘗糞甛苦。醫云鱉湯最良。時水落天寒。公擧網將求之。適有一大鱉。出在淺沙。遂持以供之。病果見差。壬申春。大人又遘疾。自知不起。謂公曰。汝以弱質。若欲執禮。必至傷生。居處飮食。凡係衛養之節。一一斟酌。不使乃父抱歸未忘之心。公飮泣諾。及遭故。自念遺托。雖不敢任情致毁。而必誠必愼。備盡情文。事偏慈。大小必稟。柔順委曲。甚得幹母之道。祭祀必先期數日。戒飭內外。絶酒肉灑掃洗濯。務令潔淨。入室出戶。愾然肅然。以致如在之誠。與弟三人友愛純篤。導之以善。勉之以學。從容懇惻。未嘗失和。嘗戒之曰。孝於父母。友於兄弟。其端在於先正閨門。閨門不正何事可行。夫婦之間。切戒狎昵之私。必以莊敬涖之。可見其效矣。與花谷林洞諸族。作花樹會。爲隨時講好之資。與鳳南洪公同里閈。自初上學。至老白首。質疑問業。疾病甚故之外。未始相離。及其沒也。服心喪之制。與文龜巖頌奎爲道義之交。往復講磨。相得甚深。會鄕坊士友。行鄕飮鄕射講規讀法等禮。春秋爲常。丙子荒年。公出若干力。以賙鄕里之濱死者。或曰。子將自救不贍。而反急他人。豈無矯情干譽之譏耶。公曰。吾雖不贍。尙不至濱死。若諉不贍而不急人。則此是賈兒販竪。重財輕義之常談也。自癸未以來。公偶然遘疾。或差或發。或加或減。首尾八九年。備經艱楚。而事親服勤之節。就友講討之方。未嘗不自力。不知病之在身也。居室左右。揭太極西銘仁說敬齋箴圖。及他要言格誨。自以常冠便服。端坐其中。常目警省。日以爲常。庚寅八月二十九日。以宿疾終于正寢。葬松石面聲谷村後倒池蓮崎下巽坐之原。配綾城具氏本修女。繼配利川徐氏奎煥女。徐氏生二男一女。男載淵載寅。女幼。嗚乎。文氏素是詩禮古家。竹窩公及其子競齋公。皆以孝友行誼。聞于鄕里。公承襲先訓。謹身績學。孝悌行於家庭。忠信著於鄕里。蔚然爲一方之善士。芝根醴源。豈不信然。余以無狀。辱爲公知。臨歿手書。致其遺孤學問之託。余固知不敢承當。而追念悲悵。不覺涕零。然載淵立志向學。刻勵不怠。其世世繼述之業。又將不墜矣。歿後三年夏。載淵奉其仲父所撰家狀。示余而言曰。知先親最密者。莫如吾丈。願狀其行以爲私家傳世之實蹟也。哀其情嘉其志。不敢以非其人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