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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 농암 홍공 행장(聾庵洪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9 / 행장(2)(行狀(2))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9.0001.TXT.0001
농암 홍공 행장
공은 휘가 규주(圭周), 자는 경휴(卿休), 호는 농암(聾庵)이다. 홍씨(洪氏)는 세계(世系)가 풍산(豐山)에서 나왔다. 고려조에 도첨의(都僉議)를 지낸 휘 간(侃)이 이름이 알려진 선조이다. 중엽에 휘 치(治)는 행의(行義)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휘 준(埈)은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휘 경고(景古)는 호가 침수정(枕漱亭)으로 은덕(隱德)을 지녀 참판에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휘가 영한(永漢)이고 조부는 휘가 희우(羲禹)이다. 고(考)는 휘가 수모(壽謨)이고 비(妣)는 순천 박씨(順天朴氏) 대현(大鉉)의 딸이다. 순조 을유년(1825, 순조25)에 능주(綾州)의 우봉리(牛峯里)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서 백부 수영(壽榮)의 후사로 나갔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처음에 서당에 나아가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책을 읽으면서 문리(文理)가 날로 발전하였다. 하루는 연로한 부모님이 매우 고생스럽게 일하는 것을 보자 바로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기를, "자식 된 자라면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커다란 직분이다. 어찌 편안히 앉아 책을 읽으면서 늙으신 부모에게 봉양을 받겠는가." 하였다. 이에 고기를 잡고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등, 직접 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매번 셋째 아우 채주(埰周)에게 경계하기를, "너의 재주와 성품은 내와 견줄 바가 아니다. 부지런히 노력하여 부모의 바람에 부응하고 또 네 형이 이루지 못한 소원을 위로해다오." 하면서 유학(遊學)하여 명유(名儒)가 되기를 권하였다. 아우들, 여러 사촌 형제와 한마을에 모여 살아 대문과 담장이 서로 이어지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마주하여 은의(恩誼)가 매우 두터웠으며 일찍이 한마디 말로 서로 따지면서 화합을 해친 적이 없었다. 추위와 굶주림을 겪으면 진휼하고 병에 걸리면 도와주고 죽어서 장례를 치르면 서둘러 달려가 같은 마을의 오랜 붕우에까지 이르렀으므로 모두 흡족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일찍이 아들과 손자들에게 경계하기를, "집안의 흥성과 쇠퇴는 자손이 현명한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려있고, 자손이 현명하고 그렇지 못하고는 학문에 부지런한가 게으른가에 달려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스승으로 삼을 만한 덕을 지닌 자가 있다면 그가 인근 마을에 살고 있더라도 응당 가까이하고 가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하물며 집 안에 그런 인물이 있다면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너희 숙부는 평소에 입으로 하는 말에 가릴 것이 없고 몸으로 하는 행동에도 가릴 것이 없어 내가 매우 아끼고 있다. 너희들은 숙부를 모범으로 삼거라." 하였다. 숙부는 아마도 호가 봉남(鳳南)인 채주(埰周)를 가리키는 듯하다. 일찍이 해적(海賊)이 변경을 침범하여 시끄러운 소문이 크게 떠돌자 집을 버리고 도망가 숨는 백성이 많았다. 공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놓고 일깨우기를, "이웃 마을에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달려가 구원해야 마땅하다. 하물며 화란이 드러나지도 않았건만 성급하게 부모와 집안을 버린다면 이것이 인정이겠는가. 금수(禽獸)만도 못한 짓이다." 하니,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감히 도망하는 자가 없었다. 공의 행의(行義)가 사람들에게 신복(信服)을 받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았다. 무자년(1888, 고종25) 7월 16일에 편안히 생을 마치니 향년 64세였다. 해하리(海鰕里)의 선영 아래에 장례를 치렀다가 나중에 우봉(牛峰) 뒤의 사좌(巳座)로 이장(移葬)하였다. 배(配)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광식(光植)의 딸로 좌상(左相)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 1411~1456))의 후손이다. 부덕(婦德)이 뛰어났고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우석(祐錫), 우전(祐銓)이고 딸은 문석휴(文錫休)에게 출가하였다. 계배(系配)는 김해 김씨(金海金氏)로 2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우용(祐鏞), 우건(祐鍵)이고 딸은 최환필( 崔煥泌), 임봉우(林逢雨)에게 출가하였다. 아, 공은 외모가 소박하고 예스러우며 풍의(風儀)는 대범하며 언사(言辭)는 간결하고도 어눌하며 행동은 간략하고 곧았다. 다른 사람과 큰소리를 내거나 곡직(曲直)을 따지지 않았고 일에 임하여 앞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시비와 훼예(毁譽)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듯하고 이해와 득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계책이나 농락, 간계와 부정한 일에 관련된 사람이나 가무(歌舞)나 사치(奢侈), 유랑(遊浪)이나 방탕에 관한 것에는 일찍이 한마디 말도 섞지도 않고 한 발자국도 딛지 않았다. 오직 산골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지키고 자신의 의를 행하여 안으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면서 산수를 즐기고 농사를 지으며 여유롭게 세월을 보내는 것이 곧 평생에 걸쳐 계획하고 살아가는 방도였다. 오늘날 인심은 날로 부화(浮華)해지고 선비들의 풍습은 날로 보잘것없어지는 것이 수심(水深)이 더욱 깊어지듯 하니 당시에 선배가 보여준 풍도를 다시금 볼 수 없으리라! 이에 성인(聖人)이 선진(先進)을 따랐던 뜻이 우연이 아님을 비로소 알겠다. 뒤늦게 회포를 드러내는 것이 집안 간의 교분과 대대로 교유한 우호를 끝내 잊을 수 없어서일 뿐만이 아니다. 우석(祐錫)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내게 보여주고, 인하여 한마디 말로 세상에 영구히 전할 계책으로 삼고자 청하였다. 내가 행장을 지을 적절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로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해 삼가 이와 같이 적는다.
聾庵洪公行狀
公諱圭周。字卿休。號聾庵。洪氏系出豐山。麗朝都僉議諱侃爲顯祖。中葉有諱治。以行義除厚陵參奉。諱埈。中司馬兩試。諱景古號枕漱亭。有隱德贈參判。曾祖永漢。朝羲禹。考壽謨。妣順天朴氏大鉉女。以純廟乙酉。生公于綾之牛峯里。旣長。出爲伯父壽榮后。天稟朴實。事親至孝。初就塾。讀擊蒙諸書。文理日進。一日見老親幹務甚勞。輒掩卷太息曰。人子之職。忠養爲大。豈安坐讀書。而被養於老親乎。於是漁樵耕稼。無不躬親爲之。以極甘旨之奉。每戒其三弟埰周曰。君之才性非我比。勉之以副父母之望。又以慰乃兄未就之願也。勸令遊學以成名儒。與羣弟諸從。聚居一巷。門墻相接。日夕聚對。恩誼甚洽。未嘗有一言相稽以失其和也。其有飢寒則賙之恤之。有疾病則扶之將之。有死喪則匍之匐之。以至隣里朋舊。無不各得其心焉。嘗戒子孫曰。人家興替。在子孫賢否。子孫賢否。在學問勤惰。又曰。有德可師者。雖在鄕隣。猶當親近遊從。況在家內乎。汝之叔父。平生口無擇言。身無擇行。吾甚愛之。汝等視爲表則也。叔父蓋指埰周號鳳南也。嘗有海賊犯邊。騷說大作。民多棄室奔竄。公招村人喩之曰。隣里有急當赴救。況禍色未形。而遽棄其父母室家者。此人情乎。曾禽獸之不若也。村人感之。無敢逃者。其行義之服於人。類如此。戊子七月十六日考終。享年六十四。葬于海鰕里先壠下。後移于牛峰後巳坐。配全州李氏光植女。左相文安公思哲后。極有婦德。生二男一女。祐錫祐銓。文錫休。系配金海金氏。生二男二女。祐鏞祐鍵。崔煥泌林逢雨。嗚乎。公體相質古。風儀坦夷。言辭簡而訥。施爲約而直。與人少欸曲。臨事少表襮。是非毁譽若不聞也。得失利害若不知也。凡機關籠絡詭譎回僻之人。聲技繁華遊浪曠誕之地。未嘗與之接一語着一步。惟是隱淪林樊。守吾分行吾義。使內不愧於心。外不愧於人。而山水桑麻。優哉游哉。乃其平生計活也。目今人心日就浮華。士習日就菲薄。如水益深。則先輩當日之風。不可得以復覩乎。於是乃知聖人從先進之意有不偶爾也。追言想感。非直爲通家之講。誼世之好。有不能終諼也。祐錫持家狀示余。因請一言。爲傳世不朽之計。余以非其人。牢辭不得。謹爲之說如是云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