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호남근현대문집
  •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 회신재 이공 행장(懷愼齋李公行狀)

일신재집(日新齋集) / 권18 / 행장(1)(行狀(1))

자료ID HIKS_OB_F9001-01-202101.0018.0001.TXT.0025
회신재 이공 행장
우리 고을은 호좌(湖左 충청남도)에서 시(詩)와 예(禮)로 일컬어졌으며 근고(近古) 시대에 이르러 경전에 밝고 품행이 단정한 선비가 더욱 빈빈(彬彬)하였다. 회신재(懷愼齋) 처사(處士) 이공(李公) 휘 춘형(春馨) 또한 그런 인물이다. 공은 공산(公山)의 이름난 집안 출신으로 국초의 공숙공(恭肅公) 휘 명덕(明德)이 중조(中祖)이다. 5대조 휘 위(韡), 호 혁회재(衋悔齋)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주 84)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효우(孝友)와 학문(學問)으로 사림(士林)의 의표(儀表)가 되었다. 고조 휘 동명(東鳴)은 진사이고 증조는 휘 만휘(萬輝)이다. 조부 휘 윤제(崙齊), 호 화암(華庵)은 도암(陶庵) 이 문정공(李文正公 이재(李縡))에게 학문을 익히고 상소(上疏)하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두 선생을 구원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고(考)는 휘가 정후(政厚)이고 비(妣)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재탁(再濯)의 딸이다. 영조 갑자년(1744, 영조20)에 능주(綾州)의 부춘방(富春坊)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자애롭고 온화하며 근면하고 신중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명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어려서 부친의 병을 수발하면서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 차도가 있는 것을 보고는 모친이 병들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고생을 이겨내면서 글을 읽어 문사(文詞)가 풍부하였으며 부모를 위해 과거를 준비하기는 했으나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중년에는 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주 85)을 찾아뵙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하여 들을 수 있었다. 만년에 칠송(七松)으로부터 가솔을 거느리고 헌무정(獻舞亭)으로 이주하여 두문불출하며 심신을 수양하였다. 손수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옮겨 적고 깊이 연구하고 본질을 완미(玩味)하여 그 기쁨에 자신이 늙어가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 자신의 광채를 드러내지 않았건만 명성과 실제가 더욱 융성해져 마을과 향당(鄕黨)의 오랜 벗이나 생도(生徒)들이 공에게 의지하고 존중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평소에 저속한 말은 입에 담지 않았고 사벽(邪僻)한 색은 눈으로 보지 않았으며 발길은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았고 몸은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선행을 보면 자기가 한 것처럼 여기고 악행을 보면 자신을 더럽힐 듯이 여겼다. 《춘추(春秋)》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의리를(에 대해) 더욱 연구하여 밝히고 힘써 지켜나갔으며 대명유민(大明遺民) 4자를 크게 써서 앉는 자리에 걸어두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었다. 상사(上舍) 남익(南熤)과 이웃하여 책상을 마주하고 학문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봄가을로 향리(鄕里)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강하였으며 간간이 나라 안의 장덕(長德)과 종유하며 더욱 자신의 경륜을 키웠다. 아, 공은 고상하고 소탈한 운치(韻致)가 시나 말 등에서 매우 많이 드러날 뿐만이 아니다. 〈권학론(勸學論)〉, 〈신우기(新寓記)〉 등의 저작은 공이 어떤 인물인지 더욱 알 수 있게 한다. 게다가 향리(鄕里)와 도내(道內)에서 공을 천거하는 문서가 앞뒤로 빈번하게 이어지고 공이 남긴 성덕(盛德)의 향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증거가 될 수 있으리라! 바다에 숨겨진 구슬이지만 반드시 훗날 외사씨(外史氏)의 기록에서 빠지지 않아 능양(陵陽)의 고사(故事)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배(配)는 제주 양씨(濟州梁氏) 휘 철한(澈漢)의 딸이며 아들은 문규(文圭)ㆍ문익(文翊)ㆍ문표(文{白+表})이다. 손자와 증손자 이하는 다 적지 않는다. 너무 많아 적지 않는다는 뜻인 듯합니다.) 묘(墓)는 지동촌(池洞村) 뒤의 입동(笠洞) 을좌(乙坐)에 합장하였다. 현손 장환(長煥)이 유집 1권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어 한마디 말로 공의 덕을 드러내 주기를 청하였다. 내가 향리의 후생으로 평소에 공을 우러러 흠모하였기에 감히 적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주석 84)은봉(隱峯) 안 문강공(安文康公)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사언(士彦), 호는 은봉(隱峰)ㆍ우산(牛山)ㆍ빙호(氷壺)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국난을 당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였다. 지평(持平), 장령(掌令),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저서로 《은봉전서》이 있다.
주석 85)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
송환기(宋煥箕, 1728~1807)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ㆍ성담(性潭)이다.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다.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저서로 《성담집》이 있다.
懷愼齋李公行狀
吾鄕在湖左。以詩禮稱。至近古。經明行修之士。尤彬彬焉。懷愼齋處士李公諱春馨。亦其人也。公公山著族。以國初恭肅公諱明德爲中祖。五世祖諱韡號衋悔齋中進士。師事隱峯安文康公。孝友學問。爲士林儀表。高祖諱東鳴進士。曾祖諱萬輝。祖諱崙齊號華庵。受學于陶庵李文正公。疏救尤春兩先生。有遺稿。考諱政厚。妣濟州梁氏諱再濯女。以英宗甲子。生公于綾之富春坊。慈祥勤勅。事親無違。幼侍父病。血指見愈。母病又如之。刻苦讀書。詞藻贍富。爲親供擧。不以得失介意。中年謁性潭宋先生。得聞爲己之學。晩自七松。挈移獻舞亭。杜門養靜。手抄心經近思錄等書。沈潛玩素。怡然不知老之將至。潛光鏟輝。望實彌隆。閭里鄕黨知舊生徒。無不倚以爲重焉。平生口不出鄙俚之言。目不覩邪僻之色。足不妄行。身不妄動。見善若己有之。見惡若己凂之。於春秋尊攘之義。尤加講明而力守之。大書大明遺民四字。揭於座側以見志焉。與南上舍熤。結隣對床。講磨無闕。春秋會鄕里士子。講小學大學。間從國內長德。益自展拓焉。嗚乎。其高韻逸趣。見於吟哦咳唾之餘者。不啻多矣。而至若勸學論新寓記諸作。尤可以見公之爲公矣。況鄕道剡報。前後頻仍。而遺芬餘馨。藉藉人口者。足以爲百世不刊之證耶。滄海遺珠。必不見漏於後日外史之筆。而爲綾陽故事之一也。配濟州梁氏諱澈漢女。子文圭文翊文白+表。孫曾以下不能盡錄。墓池洞村後笠洞乙坐合祔。玄孫長煥。持遺集一卷示余。因請一言以狀其德。余以鄕里後生。慕仰有素。不敢以匪其人辭。